4. 내가 좋아하는 색깔
“선생님은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독서치료 강사가 내게 물었다. 그녀는 지금 그림책의 표지화를 보고 느낀 감상으로 독서치료 접근법을 강의 중이다. 나는 질문을 받고 잠깐 생각해보았다. 구체적으로 이것이다, 하는 색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무슨 색을 좋아하는 것일까.
먼저 녹색이 떠오른다. 아니 초록색이 떠오른 것이다. 녹색이나 초록색이나 같다고 하겠지만 내가 느끼는 두 색은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내 소지품이나 옷가지에는 초록색인 것도 녹색인 것도 없다. 좋아하는 색과 이용하는 색이 다를 수 있지만 내 생활에서 너무 멀리 있는 초록색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그렇다. 그러면 무슨 색을 좋아한다고 말해야 할까.
흰색 옷을 많이 입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손수 한복을 지어주셨다. 치마는 자주색이나 검정 치마였는데 저고리는 주로 흰색이었다. 열 살 무렵까지는 그렇게 입고 학교에 다닌 것으로 기억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 발령을 받았을 때도 나는 흰옷을 많이 입었다. 색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그랬던지 아니면 어려서부터 흰색 옷을 주로 입은 기억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내 하얀 피부에 흰색 옷이 잘 어울린다는 동료들의 칭찬도 한몫했을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색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다. 내 옷은 회색이나 검정이 대부분이고, 기껏해야 감색이었다. 그러나 중후하고 세련된 회색과 단정하고 깔끔한 감색도 내게 오면 후줄근한 색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손때와 삶의 흔적이 뒤범벅되어 구정물이 튀긴 것처럼 꾀죄죄해지는 것이었다. 나중에 딸아이는 제 남동생들더러 엄마 옷을 살 때는 절대로 회색이나 검정 옷은 사지 말라고 했단다. 왜 그렇게 어두운색 옷만 입냐며. 그러나 회색이나 검정 옷은 웬만큼 더러워져도 표가 잘 나지 않으니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내게 안성맞춤인 색이다.
나는 초록색을 좋아한다. 녹색이 아니고 초록색을 좋아한다. 새싹이 연두를 막 지난 바로 그때, 5월의 초록을 좋아한다. 어리지 않은 색, 그러면서도 생명과 활기가 충만한 초록색을 좋아한다. 반면 녹색은 두렵다. 이상은 녹색의 들판을 보며 권태롭고 지루하다고 했지만 나는 녹색 들판이 두렵다. 바람에 일렁이는 거대한 녹색 들판이 서걱거리며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아 두렵고, 태풍을 맞은 큰 나무숲이 녹색의 제 몸을 뚝뚝 잘라 던지며 몸부림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두렵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 옷을 입는 내 초라한 몰골을 생각하는 것이 더 두렵다.
요즈음 내가 선택하는 색깔은 녹두색이라고도 할 수 있고, 황록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카키색이다. 녹색이 땅바닥을 몇 바퀴 뒹굴어서 흙을 닮은 듯한데, 녹색이나 초록과는 달리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카키색은 군인의 색이기도 하다.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군인들을 지키기 위한 보호색이고, 부대나 막사를 은폐하기 위해 칠해놓은 색이다. 나도 카키색 옷 속에 숨어 있으면 내 초라한 모습이 숨겨질 것 같다. 카키색은 두려운 세상에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한 색이기는 해도 한 가지만 선택하라면 선뜻 내키지 않는다.
그렇게 여러 색을 훑고 지나온 뒤 마지막 떠올린 것은 보라색이다. 왜 보라색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보라색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녔다. 고귀하고 신비스러우면서도 병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색이다. 마음 깊은 곳에 억압된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이라고도 한다. 내 안에 보라색보다 더 아름다웠을 감정을 색깔조차 띄지 못하게 억눌러 왔다는 것을 어느 부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예쁜, 아니 좋아하는 색 하나 고르지 못하고 이 색 저 색을 훑어 내려온 나지만 고귀하고 싶은 마음이 거기 보라색에 투영되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청초해 보이는 보라색 도라지꽃, 허리 굽혀 봐야 하는 애잔한 보라색 제비꽃, 우아한 보라색 붓꽃, 그들도 마음속에 간직했던 아름다운 감정을 보랏빛으로 아름답게 피워 올리는 것은 아닐까? 내가 마지막 선택한 색깔이 보랏빛인 것처럼.
(2012년 충남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