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나이들어 좋은 것들

5. 다시 시작하는 삼월

by 문영

사람들은 새해를 맞으며 한해를 계획하고 실천하며 살아간다. 나는 벽에 새 달력을 걸어 두었는데도 해가 바뀌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2월이 지나고 3월이 시작되면서부터 이젠 일어서야 할 것 같고, 무엇인가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조급증이 생긴다.

십여 년이 훌쩍 넘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또 자녀들의 학교생활을 돕고, 교직에 몸담았던 나는 2월은 섣달 같았다. 3월이 되어야 비로소 해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봄이 되면 밭 갈고 씨 뿌리던 농민의 유전자가 몸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 봄이 3월부터 시작되기 때문인 것도 한 이유이리라.

열 평 남짓 되는 텃밭이지만 밭일을 하기엔 아직 쌀쌀하다. 3월이 되었는데도 할 일이 없는 나는 불안하고 우울하다. 창문의 커튼을 들추고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내다보는 나 자신이 처량하다. 정년퇴직한 공무원이 우울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남의 일 같지 않다.

전화벨이 울린다. 이번 주 목요일 기산 두문마을 노인 문해과정 강의 시각을 잊지 말아 달라는 서천군 담당자의 확인 전화다. ‘그래, 새로 시작할 일이 있었어!’ 나는 발끝부터 가슴높이까지 차올라오던 어둠을 걷어내고 책꽂이에서 강의 교재를 찾아들었다. 교과 과정을 살펴보고 출석부의 이름도 살펴보았다. 강의 계획서도 만들고 낱말카드도 만들고 이름표도 만들었다. 나와 비슷한 시대에 태어나고 살아온 사람들이라 정자, 순례, 복순이 등 비슷한 이름이 많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낯익은 얼굴들이 반갑게 손을 잡아주었다. 한글을 모르리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어른들이 대부분이다. 가난이 원수였던 지난 세월에 딸로 태어난 것이 죄가 되었던 어른들이다. 어디 가는 버스인지 남에게 묻지 않고 탈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는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는 이도 있다. 그래도 며느리가 챙겨주었다며 호주머니에서 몽당연필을 꺼내는 노인의 표정에 희망이 보인다.

사실 좀 걱정스러웠다. 나도 금방 읽은 책 내용을 깜박 잊는 때가 많다. 나보다 열 살도 더 많은 어른들이 잘 따라와 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모두 열심히 하신다. 1학년 아이들 같으면 10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어수선해지는데, 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화장실에 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받아쓰기 시험 볼 때 내 눈치를 살피며 옆 사람 것을 슬쩍 보고 쓰는 것은 여덟 살 꼬마의 눈을 닮았다. 일흔의 어른도, 여든의 어른도 열심히 공부한다. 침침해진 눈으로 하얀 보드 판의 글씨에 집중하다 보면 노인들의 눈은 더 작아지고 초점이 흐려진다.

‘이’와 ‘니’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것은 틀니 때문이고, 자신의 이름을 정성 들여 썼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보드 판이 미끄럽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손가락에 힘이 없어 펜이 꽉 쥐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앞으로 나오는데 한참 걸리는 것은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했기 때문이고, 글자가 공책의 네모 칸 밖으로 삐져나가는 것은 손마디가 뻣뻣해져 마음대로 안 되는 데다 눈까지 나빠졌기 때문이다. 거뭇거뭇 검버섯이 핀 손으로 책상에 고부라져 글씨를 쓰는 분들 등 뒤에서 나는 메인 목을 적시느라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두 시간의 공부가 끝난 뒤 내 손에 음료수를 쥐어주는 어른의 손은 마디가 굵고 거칠었지만 따뜻하다.

밖에 나오니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바람이 몹시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그래도 그 나뭇가지 마디마디에 연둣빛 새싹이 빼꼼히 고개 내밀고 있다. 양지쪽에 광대나물이 연보라색 꽃을 피우고, 좁쌀 같은 하얀 냉이꽃도 피었다. 봄까치꽃으로 개명한 개불알풀꽃이 파란 물결을 이룬다.

봄이 벌써 여기 와 있다. 3월이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

(2010 서림 뉴스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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