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앉아있는 자리
몹시 피곤한 하루다. 퇴근할 때 시내버스에는 학생들로 만원이다. 어디 자리 양보해줄 학생 하나쯤 있나 싶었다. 나도 모르게 둘레를 두리번거렸던 모양이다.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말도 없이 벌떡 일어난다. 자리 양보를 바라는 나의 몰염치한 표정 때문에 마지못해 일어난 것이 역력한 얼굴이다. 어쨌건 그날따라 관절의 통증이 심했던 나는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녀석이 앉으라고 한마디 권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앉은 이 자리는 정말 내가 앉아도 되는 자리일까 하고 생각해본다. 혹시 자리를 양보한 저 학생이 다리가 아프다거나 몸이 불편해서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서 있는 사람 중에 나보다 더 불편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자리는 마땅히 그 사람의 차지가 되어야 옳다.
열차를 타고 서울에 가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나는 서너 시간의 열차 여행을 편히 하기 위해서 일주일 전쯤 왕복 열차표를 예매해 둔다. 그리고 정해진 좌석을 찾아 편히 앉아 여행을 한다. 하행열차를 탔을 때 종종 내 좌석에 다른 사람이 미리 앉아 있는 경우가 있다. 나는 기차표에 적힌 좌석번호를 다시 확인한 뒤, 그 좌석이 내 자리임을 알려주고 옆에 서 있으면, 앉아 있던 사람은 계면쩍어하며 부스럭대고 일어난다.
앉아가고 싶으면 당신도 나처럼 표를 예매해 두지 그랬냐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차지했던 이기심이 부끄럽다. 내가 그 열차표를 예매하지 않았고, 역에서도 차례대로만 표를 팔았다면 그 좌석은 금방 일어선 그 사람 차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보다 그 사람에게 더 필요한 자리일 수도 있다.
지하철이나 시내버스 안에서 빈자리를 향하여 돌진하듯이 달려가 짐부터 던져놓아 자리를 점거하는 아낙들과 나의 기차표 예매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남이 생각하기 전에 합리적인 방법으로 미리 차지해 버리고 말았으니 더 야비하다고 할 수 있다.
나라고 지정 좌석에 앉아서 편히 여행하는 것만은 아니다. 언제인가 입석표를 들고 기차에 탔다. 한 시간쯤 뒤에 빈자리가 생겼다. 만약 주인이 돌아오면 일어나줄 요량으로 얼른 앉았다. 그러나 그 자리 주인은 내가 내릴 때까지 오지 않아서 편히 앉아 온 일이 있다. 그 좌석의 주인은 잠깐 화장실에 갔다가, 내가 미안해할까 봐 먼발치에서 언제쯤 내릴지, 하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는 셀 수 없이 많은 선거를 치르고, 선거 때만 되면 대여섯 명 이상이 한 자리를 놓고 그것이 내 자리라고 기염을 토한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만이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외친다. 정말 그들의 말대로 자신만이 적격자라면,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맞다면 우리는 누구누구 가릴 것 없이 모두를 선출해 주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출마자 중에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적임자가 없는데 누군가를 선출하고 그 사람에게 능력 밖의 일을 시킨다면 자리를 비워두느니만 못하다.
수년 전에 내가 알고 있는 노 교장이 버스 안에서 사고를 당한 일이 있다. 그는 맨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버스가 덜컥거리는 바람에 앞으로 미끄러져 나와 허리를 크게 다쳤다. 버스 안에서 노인에게는 앞자리가 알맞다. 뒤에는 남학생들이 주로 앉는다. 버스 회사에서도 그걸 알고 앞에 경로석을 지정해 두었다. 시내버스에도 그 자리에 앉을 알맞은 사람이 있는데, 하물며 세상의 모든 자리에는 적임자가 있게 마련이다.
세상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다. 국회 개원 때 비록 의석은 비어 있을망정 누군가의 자리로 정해져서 명패가 놓여있게 마련이다. 당선자가 법을 위반하여 자격을 상실하면 제꺽 보궐 선거로 그 자리를 채워 놓는다. 그런 경우 전에 차점으로 낙선한 사람이 당선 된는 때도 있다. 그렇다면 전에 자격이 없어 탈락된 사람이 짧은 기간에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능력이 없어도 자리에 앉게만 되면 알아서 잘 한다고 한다. 그렇게 선출한 우리의 대표들이 이곳 저곳에서 배를 산으로 끌고 가는 능력 밖의 일을 해내느라 땀 흘리고 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를 탐한다. 자기에게는 어울리지도 않고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리까지 욕심을 낸다. 직장에서는 상급자리, 단체에서는 명분이 있고 이권이 있는 자리, 군대에서는 좀 편한 자리. 오죽잖게 여겨지던 사람도 그 사람이 내미는 명함에 적힌 직함을 받고, 다시 봐 지는 경우가 있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철없는 나이에 자식을 둔 여자도 어머니의 역할을 잘 해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를 세상의 어머니들과 같은 심정으로 지켜낸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이 어려운 세상을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식물은 제가 서 있을 자리가 알맞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좋지 못한 자리에서도 살아남는다. 주변을 자신에게 알맞게 변화시키고 그것도 안 되면 자신을 바꾸어가며 자리를 지켜낸다. 나쁜 자리를 좋게 바꾼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자리 값도 못하면서 주변을 오염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리에 대한 집착은 이제 벗어야겠다. 나무처럼 땅이 나를 거부하면 그만 일어설 일이다. (2007. 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