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파리를 잡으며

5. 9회말

by 문영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이 있다. 나같이 나이 먹은 사람더러 이제 그만 쉬라고 하면서 위로하느라 만든 말이기도 하다. 수명이 길어져서 앞으로도 삼사십 년쯤 남아 있으니 이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말일 수도 있다. 이젠 ‘진짜 인생은 80부터’라는 말이 생겼다.

문맹으로 평생을 살아온 여든 살이 넘는 어머니들이 한글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이 맞지 싶다. 인생은, 경기가 끝나가는 9회 말에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는 야구 경기와 같다. 내 나이 육십이 넘은 지 한참 지났지만 9회 말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고 열심히 뛰어볼 일이다.

요즈음 야구 시즌이다. TV 스포츠 시간에 야구 경기를 자주 방영해 준다. 홈런을 날리고 만족한 얼굴로 베이스를 도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허탈한 얼굴을 하고 눈으로 공을 쫓는 상대 팀의 투수도 있다. 문득 지난해 3월 일본과의 WBC 준결승전 장면이 떠오른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준우승을 놓고 쫓기는 경기를 했다. 운동경기에 별 관심이 없는 나도 상대국이 일본이라서 시선이 가고,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마지막 희망을 품었던 9회 말에 투 아웃이 되자 이제 볼 것 없다고 조마거리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동점을 만들어냈고 끝내 연장전까지 몰고 갔다. 아깝게 점수를 잃었을 때는 내 가슴 속에서 휑하니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승세를 이어가 야구 제1 강국 미국을 이기고 우승한 것이다.

같은 구기 종목 경기라도 점수를 내어 승리하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 배구나 탁구 같은 경기는 정해진 점수에 먼저 도달하는 팀이 승리하는가 하면, 축구는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 안에 점수를 많이 낸 편이 승리한다. 그러나 야구는 아홉 번씩 번갈아 가며 공격하고 방어하여 점수를 많이 내는 편이 승리하는 경기다. 자연히 경기를 운영하는 시간도 정해지지 않아 세 시간 가까이 되는 때도 허다하다. 또 축구나 농구 경기는 점수를 내기 위하여 상대 팀과 한 덩어리가 되어 공을 빼앗는데 반하여, 야구는 공격할 때는 공격만 하고 방어할 때는 또 방어만 하니 다른 구기 종목과 많이 다르다.

간혹 나는 야구 배트를 들고 마운드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공을 던지고 나는 그 공을 힘껏 쳐내야 하는데 기회가 그리 많이 주어주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기회는 안타를 치느냐, 아니면 볼 네 개, 그것도 아니면 스트라이크 세 개뿐이다. 1루밖에 진출할 수 없는 볼넷보다 2루, 3루 아니 홈런을 날릴 수 있도록 날아오는 공을 힘껏 쳐야 한다. 투수의 눈속임에 속아 넘어가 스트라이크를 세 개나 치게 되면 시작해 볼 기회조차 잃고 만다. 내가 홈런을 날리게 되면 나를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각 루에 나가 있는 내 편 모두를 구할 수 있어 많은 점수를 낼 수도 있다.

배트를 휘둘러 공을 쳐냈다면, 그리고 그 공이 홈런이 아니라면 힘껏 달려야 한다. 외야수는 날아가는 공을 받으러 달려가고, 내가 밟고 지나가야 할 길에는 먹이를 향해 막 질주하려는 표범의 자세로 발 한 짝을 루에 걸친 적이 나를 잡으려고 지켜 서 있다. 때론 팀을 위해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기하고 번트를 날려 자멸해야 할 때도 있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동료들을 내 잘못으로 맥없이 주저앉힐 수도 있으니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른 경기에서는 몰래 하는 짓은 반칙이라 하여 인정되지 않는데 야구는 도루가 인정된다. 적이 안보는 틈을 타서 재빠르게 다음 루로 달려갈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인생과 같지 않은가.

법과 질서를 어기면 벌을 받는다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나쁜 일을 하여 상대에게 피해를 주었더라도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안겨 주었으면 인정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군사독재로 이룩된 새마을 운동이 가난 탈피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그를 칭송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야구에는 아주 도덕적인 규칙도 있다. 내가 달리기를 잘한다고 내 앞에 가는 내 편을 앞서갈 수 없으니 말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젊은이건 늙은이건 누구라도 앞서가는 사람을 추월해서 가야만 승리할 수 있은데 말이다. 인생도 그러하다.

세상은 나에게 그렇게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공은 나를 눈속임하기 위한 변화구도 있고, 눈앞까지 날아오다 배트를 휘두르려는 순간 코앞에서 땅에 떨어지고 마는 직구도 있다. 이 나이에 상대방을 눈속임하며 내 달릴 기운도 없고, 앞서가는 사람 추월할 힘도 욕심도 없다. 하지만 내게 날아오는 볼을 스트라이크 세 개로 마치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렇다고 위험이 두려워 볼넷을 맞고 안전하게 한 루만 나가는 짓도 하지 않겠다.(2007. 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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