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렁이
올해는 봄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날씨가 자주 변덕을 부린다. 4월에 눈이 오는가 하면 비 오는 날도 잦더니, 5월에 들어서기 바쁘게 여름의 문턱을 훌쩍 넘어섰다. 바람이 후덥지근하고 햇볕이 따갑다.
녹색으로 변해가는 들판이 나를 부른다. 밖으로 나온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저쪽에서 누가 손짓하는 것 같고, 까르르 웃는 아이가 아름드리 은행나무 사이에서 언뜻 스쳐 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들판 개울에서 작은 수생식물이 뽀글뽀글 물방울을 올리며 나를 부르는 것 같다.
노인 요양병원 앞을 지나다 양지쪽 긴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들을 본다. 무채색 표정, 주름 속에 자리 잡은 우묵한 눈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초점 없이 좇아간다.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 회관에 동네 노인들이 모여 논다. 그러나 그분들은 거기 가지 않는다. 밖으로 나온다 해도 요양원 주변만 빙빙 돌다 되돌아가곤 한다.
나는 들판으로 간다. 겨울 들판을 지켰던 벼의 그루터기에서 삭신 주저앉는 소리가 들리고, 무성하게 자란 둑새풀이 이삭을 밀어 올리느라 분주하다. 논두렁 옆 수로엔 물이끼가 더덕더덕 내려앉은 물풀이 허릴 굽히고 졸고 있다. 그 위에 역시 이끼를 잔뜩 뒤집어쓴 우렁이들이 딱지를 밀어 올리고 햇볕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길 질을 한다. 색이 허옇게 바랜 우렁이 빈껍데기 몇 개가 물풀에 걸려있다. 새들에게 알맹이를 빼앗겼나 보다. 어쩌면 제 몸속에 키우던 새끼들에게 육신을 내어주고 난 뒤 껍질만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속에 손을 넣는다. 물이 뜨뜻하다. 제법 굵직한 우렁이를 건져 올렸다. 겨우내 물속에 가라앉아 곰삭은 진흙의 해감내가 따라온다. 이끼가 덮인 껍질은 녹두색 비로드처럼 매끄럽고 보드랍다. 우렁이란 놈이 나이테 무늬가 있는 딱지로 얼른 입구를 봉인해버린다. 그리고 돌멩이처럼 나뒹군다. 개울물이 말랐을 때는 더욱 단단히 문을 닫고 쩍쩍 갈라진 땅속에서도 잘 견디니, 칩거하는 데는 달팽이보다 한 수 위다. 나는 몇 마리를 더 건져 올렸다.
헌 비닐봉지를 주워서 흙범벅이 된 우렁이를 담아 들고 오다가 요양원 앞에서 강원도가 집이라는 김 노인을 만났다. 우렁이 때문이었던지 문득 지난해 우렁이를 잡아다 주던 전라도 박 노인이 생각나서 안부를 물었다.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의 일이다. 노인 요양원에 사는 박 노인이 진흙 범벅이 된 우렁이가 반 됫박쯤 들어있는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운동 삼아 나갔더니 개울에 우렁이가 많아 옛날이 생각나서 잡아 왔다고 했다. 주방에 가져다 주었더니 끓여주기는커녕 좋지 않은 낯을 하여 버리기는 아까워 가져왔단다. 박 노인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우렁이가 든 비닐봉지를 가져왔다. 그때마다 그냥 말 수 없어서 천 원짜리 서너 장을 쥐여주곤 했다. 처음에는 사양하더니 용돈이 궁했던지 계면쩍은 얼굴로 돈을 받아 넣었다. 나중에는 우렁이를 닦달하기도 귀찮아서 그만 가져오라고 했다. 서운한 눈치였다.
해가 바뀌었는데 박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요양원에 입소한 사람들은 며칠 혹은 몇 달 보이다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앰블런스가 자지러지게 울부짖은 후나, 명절 뒤에 그런 일이 많다. 그래 박 노인도 명절에 집에 다니러 가서 오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잘된 일이라 여겼는데, 중병에 걸려 큰 병원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나는 뒤늦게 생각한다. 그때 김 노인이 우렁이를 가져다준 것은 몇 푼의 돈을 바란 것이 아니라 우렁이 된장찌개를 먹고 싶었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정인 줄 알면서도 몇 푼의 돈으로 정리해버린 나의 무심함이 뒤늦게 미안하다.
요양원 앞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까 그 노인들이 나뭇등걸 같은 모습 그대로 앉아 있다. 어쩜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나 표정과 자세는 비슷하다. 동굴 같은 얼굴, 딱지로 봉인해버린 듯한 입, 우렁이의 모습과 흡사하다. 속살까지 다 내어주고 껍질만 남아 허옇게 산화되어가고 있는 우렁이를 닮았다. 그 껍질 안에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냈다는 기억조차 잊은 노인들이 아름다운 5월의 저녁놀 속에 아직도 녹지 않고 굳어진 얼굴로 앉아있다.
(2014, 계간 수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