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째 날, 4월 1일(화)
할매들은 쉬고, 푸르공에 꽂힌 남이는 더기 씨와 친구 바스카가 매달려있는 차 수리 장소 근방에서 서성거린다. 푸르공의 나이 스무 살, 그 험한 길을 그렇게나 달렸으니 심한 몸살이 날 만도 하다. 엔진이 있는 조수석을 떼어내고 한참을 수리하더니, 기름을 빼야 한다며 1m 가량 되는 호스를 입에 물고 기름을 빨아당긴다. 호스 입구는 기름통에 꽂혔으나 입안의 기름은 바닥에 흩뿌려진다. 와중에도 둘은 마주보며 웃느라 정신없다. 60년대 어느 시절, 흔하게 봤던 장면 하나가 불쑥 소환되었다.
산의 실핏줄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길을 잡는다. ‘어머니의 바다’ 홉스골은 몽골이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싶은 비밀지도 같은 곳이다. 숨조차 사라질 듯한 고요 속에서 혼자 걷는다. 홉스골은 해발 3,000m 이상의 산들로 둘러싸인 천혜의 배경을 지니고 있어 색다른 비경을 자랑한다. 호숫가를 따라 걷기도 하고, 벗어난 신작로를 돌기도 한다. 자연이 오래도록 지켜낸 시간을 발바닥으로 밟으며, 차근차근 나의 시간을 챙긴다.
홉스골을 지키는 표지판이다.
블루 플래닛은 신선한 물을 사랑합니다
에르데닌부르간 하브스골 호수: HAVSGUL 호수는 세계 담수자원의 0.4%, 몽골 표층수자원의 74.6%를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 중 하나입니다. 특별보호구역에서는 불법행위를 금지합니다!!!
물론 한국어로 쓰여 있을 리는 없지, 그런데 내가 몽골어를 어떻게 읽겠는가? 번역 앱에 들어가서 몽골어↹한국어 설정해 카메라로 표지판을 찍은 거지. 지난 몽골 여행 때는 울란바토르의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몽골 전국 도서전이 열렸었다. 어슬렁거리다가 시집과 명상집을 한 권씩 샀더니, 몽골 시인이 난해한 눈으로 나를 본다. 그의 궁금증을 이해하고, 얼른 시집을 펴서 사진을 찍어 보여주었다. 자신의 몽골 시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는 걸 보고, 이해했다는 따뜻한 눈으로 웃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번역기 덕분에 외국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관람 시 엄청 높은 식견으로 유물이나 유적지, 예술품 등을 향유할 수 있다.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모퉁이 돌아 다음 마을까지, 그 모퉁이 돌면 또 다음 마을까지... 두어 시간을 걸었나 보다. 가만히 서서 호수 깊은 곳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보이스톡이 울린다. 기념품 파는 팀이 와서 기본적으로 지름신이 오른 나를 기다리고 있단다.
아무리 빨리 가도 1시간은 걸릴 텐데, 그냥 보내라고 해도... 뛰었다. 툰드라의 부드러운 흙을 밟고 뛰는 것이 좋을 듯해 언덕을 내려갔다가, 풀이 잡고 있던 숨은 물구덩이에 빠져 식겁했다. 결국 다시 올라와 신작로 길을 뛰었다.
좌판은 다섯 개. 할매들은 자꾸 마지막에 앉은 남자 상인이 하나도 못 팔았다며, 그에게 개시해 주라며 난리다. 가축 문양의 키링 몇 개와 물 채워 불면 새소리 나는 호루라기 두 개를 샀다. 돈을 받은 아저씨는 지폐에 침을 퉤퉤 뱉더니 머리 위에 문지른다. 어라? 저건 한국의 마수걸이 동작인데?
모닥불 아래서 두울라아라이, 두울!
상상하지 못했던 크기, 점화식이 필요할 정도의 모닥불이었다. 아들들이 모아온 키 큰 나무들을 세워 인디언 게르 높이의 모닥불을 쌓고, 더기 씨가 우리를 불러낸다. 미니 사막에서는 미니 모닥불을 피웠는데, 거대한 호수 앞에서는 거대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감동이다. 장작 사이로 튄 불꽃은 검은 밤을 붉게 물들이고, 나의 심장도 서서히 뜨거워졌다.
두울라아라이(노래하세요), 두울(노래해)! ‘모닥불 피워놓고~’ 아, 할매들이 노래는 약하다. 가사가 떠오르지 않으면 노래하기 어렵구나...
몽골 민요가 따라나온다. 더기와 바스카, 어기와 언더야(바스카의 아내)가 목청껏 노래한다. 에이, 노래 못하면 어깨춤이라도 추자. 바스카가 가더니 자신의 차를 끌고 와 오디오를 켠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한바탕 뛰고 나니, 체력이 고갈되면서 할매들은 한 명씩 의자를 찾는다.
언더야의 발랄한 춤이 시작된다. 신명 오른 어기가 분위기를 맞춰주면서 더기의 투박한 춤도 나오고, 잘 웃고 귀엽고 애교 많은 아내에게 반한 바스카는 예쁜 뽀뽀를 선사한다. 손을 맞잡고 돌아가는 원 안에서 우리는 같은 박동으로 숨 쉬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다.
사위어가는 재 속의 불빛처럼 천천히 ‘어머니’의 노래가 터진다. 그리움이 짙어지며 혹 눈물도 흐르겠지. 어머니는 불길 따라도 오시고, 물길 따라도 오시고, 모닥불 위로도 오신다. 어머니 때문에 불꽃이 꺼진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우린 추워질 때까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그렇게 몽골의 뜨거운 밤은 깊어졌고, 우리의 기억은 천천히 돋을새김되었다.
마지막 난로와 함께 춤을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은 혹 못 일어날까 봐 불침번 시간을 알람으로 맞춰두고 순식간에 수면으로 빠진다. 생각해 보니 마지막 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