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삑사리 장인 옆 유쾌한 마법사

늘 재밌다고 말해주는 K에게-

by nomad

친구 K는 내가 면접 준비를 할 때 알게 되었다. 학원에서 무작위로 짜인 조에서 만나게 됐다. 첫인상이 무척 똑 부러졌다. 그녀는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의 의도와 준비 방향을 설정해 줬다. 조장을 굳이 고르지 않아도 모두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의 당찬 모습이 부러웠다.

운이 좋게도 그녀와의 인연이 이어졌다. 점차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생겨났다. K는 나와 동갑내기이지만, 나의 선배나 다름없었다. 이른 나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터라, 일찍이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 자연히 그녀에게 종종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녀에게는 뻔하고 지루한 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경청했다. 최근까지도 나를 둘러싼 인물과 나의 사사로운 일정까지도 줄줄 꿸 정도다. 들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녀의 말은 늘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감사한 마음이 컸다.




새해가 다가오기 꽤 오래전부터 버킷리스트 하나 정도는 필히 실천하리라 다짐해 뒀다. K에게 연필로 쓴 엽서를 보내 새해 인사와 감사를 꼭 전해야지. 시간이 흘렀다. '진짜 새해는 구정이잖아'하며, 내 게으름을 스스로 용인했다. 설 연휴가 지났다. 그렇다면 2월엔 K의 생일이 있으니, 축하 인사까지 담긴 카드를 보내보리. 그녀의 생일도 지났다. 마음을 적은 글은 유통기한을 놓친 채로 겨우 보내졌다. 2월의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다음날 K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들려온 대사는 내가 기다렸던 것이 아니었다.

- 혹시 택배 보냈어?

- 응, 잘 받았어?

- 어.... 그게, 본청으로 갔나 봐.

- 본청....?

- 내가 있는 곳은 별관이거든. 근데 우리 이런 적 또 있지 않았었어?

- 맞아. 네가 발령 나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었지.

이럴 수가. 그녀의 말대로, 같은 실수만 두 번째였다.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의 일터 홈페이지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내선 전화번호, 그녀의 이름까지 검색해 가며 꼼꼼히 검색했다. 이번엔 한 번에 갈 거야. 맹신에 가까웠던 내 기대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허탈했다. 모니터로는 실망감은 전달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K는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녀는 기분 전환하는 마법을 부리는 데에 숙련자였다. 실망했을 나를 위해, 그녀가 화제를 전환했다.

- 내일 본청으로 출장 가시는 분이 있어서 받아와 달라고 미리 말씀드렸어. 도와주신대. 내일쯤에는 꼭 받아볼 수 있을 거야! 나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내용이 뭔지만 미리 알려주면 안 돼?

나는 금세 그녀의 마법에 걸려, 함께 즐거운 생각을 하게 됐다.

- 나도 내일 출근길에 좀 설레보게 비밀로 할래. 내일 직접 상자 열어보고 반응 알려주라!

대화를 마치고 나서 우리의 추억 하나가 더 생각났다.




사실 이런 해프닝은 처음도, 두 번째도 아니다. 2년 전 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평소 클래식에 관심이 많았던 K에게, 나는 쇼스타코비치 연주회를 같이 가보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좋다고 했다. 상냥한 그녀는 약속 당일에도 음료를 사주겠다고 했다.

- 나 지하 2층이야. 연주회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음료 하나 마실까 하는데, 뭐 마실래?

- 아, 여기 아래 카페가 있었던가? 그러면 나는 딸기라떼!

- 알았어.

이미 올라오고도 남았을 시간이 지났다. 슬슬 입장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 어디쯤이야?

- 건물이 두 개인데 대극장이야?

느낌이 이상했다. 일단 대화를 이어 나갔다.

- 아니? 여기 건물이 하나인데.... 근처에 보이는 글자가 뭐야?

- 응? 해누리 극장 아니야?

아뿔싸. K는 다른 곳에 있었다.

- 네가 있는 곳은 OO 아트센터 같아, 여기는 아트센터 OO이야!

- 아! 아이고, 일단 인터미션 있는 알아봐 줄 수 있어?

중간에 15분 정도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녀는 시간까지 맞춰 오겠다는 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미스 커뮤니케이션으로 화가 날 법한 순간이었음에도 그녀는 침착했다. 오히려 너무 재밌게 됐다는 내용으로 문자를 보내주며 주문을 걸었다. 그녀의 말과 글은 전염성이 강했다. 덩달아 나까지 설렘으로 가득 차서 공연을 듣고 그녀를 기다리게 됐다. 긴 듯이 짧은 1막이 끝났다. 쉬는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1등으로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바로 보이는 벤치에 K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딸기라떼 한 잔도 다소곳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웃음이 날 수밖에. 우리는 한 달 가까이 다른 장소를 이야기하며 공연에 대한 기대감만 부풀렸으니) 그녀 옆에 앉아서도 쉬는 시간의 절반을 웃으며 보냈다. 그러고는 나는 기다림이란 시럽까지 담긴 딸기라떼를 흡입하며 먹어 치웠다. 시럽이 녹인 음료는 적당하게 차가웠고 달콤했다. 살면서 잊지 못할 맛이었다. 공연 또한 더할 나위 없었다.




새해 인사 겸 생일 선물 겸 각종 축하와 감사의 글이 담긴 선물은, 선물을 보낸 다음 날도 아닌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K에게 도달했다. 출장 가셨던 분은 임무를 깜빡하고 사무실로 돌아오셨단다. 금요일 오후에 그녀가 직접 받아왔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기뻐해 주었다. 인사가 늦어 미안하다는 말에, 오히려 좋았다며 웃었다. 그저 짜증으로 남을 뻔했던 일이 그녀 덕분에 재미난 추억이 되었다. 덕분에 만나서 나눌 이야기가 하나 더 늘었다. 참 따뜻하고 유쾌한 인연. 앞으로도 이렇게 웃으며 추억을 쌓아갈 수 있기를.


2025.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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