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봄 저녁, 엘리베이터 앞에서
퇴근하고 버스에서 내렸을 땐, 분명 해가 아파트 허리춤쯤에 걸려있었다. 땅을 내려다보고 터벅터벅. 열 걸음은 걸었나.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보다도 퇴근이 빠른 해를 보며 '찰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 든 생각. 오늘은 기필코 일기를 쓰리. 이 찰나를 기록하리. 그런데, 무슨 일로?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서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이야기를 써재낀담. 그러다,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을 덮친 건 다름 아닌 허기였다.
근처 편의점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만한 것을 샀다. 달걀, 요플레, 김밥 등등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겨우 섰다. 고층까지 올라갔던 엘리베이터는 버선발로 마중하는 법을 모르는 양, 이곳저곳을 다 들르고는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저 위만 올려다보면서 한숨을 푹 쉬어댈 때, 남자아이 하나가 꾸벅 인사를 했다. 뽀글거리는 파마머리, 똘똘한 눈동자, 분홍빛 노을이 스며든 볼을 지닌 소년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숫자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재미없어 뵈는 어른에게 대뜸 자랑을 늘어놓았다.
"제가요, 무적 딱지를 만들었어요."
"네?"
딱지...? 요즘 애들도 딱지를 하나. 시선이 아이의 손으로 자연스레 내려갔다. 과연, 연습장 종이로 만들었음 직한 조악한 딱지가 놓여있었다. 아이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 딱지라고 단언했다. 나는 물었다. 이게요?
"네! 제가 만든 딱지예요."
아이는 신이 나서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딱지 만드는 방법 아시죠? 이거는요, 물에도 적셔서 완전 납작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테이프도 붙여서 찢어지지도 않아요. 멋있죠?"
너무 귀여워서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자랑스레 딱지를 더 들이밀었다. 사진을 막 찍었을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우리는 장소를 옮겨 막간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래봤자 한두 마디 정도? 내려올 땐 그렇게 느리더니, 올라갈 땐 어찌나 빠르던지. 나는 정말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 이겼어요?"
아이의 대답은 여전히 귀여웠다.
"아뇨, 아직 안 싸워봤어요. 내일 이길 거예요."
아이의 집에 다다랐다.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아이에게 나는 인사를 건넸다.
"내일, 꼭 이겨요."
생각해 보면, 나도 어렸을 적 무적 딱지에 버금가는 책받침이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우리는 책받침에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열심히 붙였더랬다. 한 번은 정말 특이한 캐릭터 스티커가 나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옆 반까지 소문이 났다. 옆 반 남자애가 나를 불러 거래를 시도했다. 나는 아주 당당하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어느 때보다도 당당했고 내가 멋있었다. 그 호쾌하게 걷던 소녀는 어디로 가버렸다. 책받침 한 귀퉁이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그 스티커도, 이젠 기억 속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남은 건 터덜터덜 퇴근하는 어른 하나뿐. 소녀야, 너는 어디로 갔느냐.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지금은 빨리 저무는 해를 잘 떠나보내리, 소년을 기록하고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리. 그리고 나만의 '무적 딱지'도 만들어봐야겠다는 결심도 조용히 품어보았다. 그날 저녁, 소년이 남기고 간 분홍빛 노을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3개월이 지나, 한 바닥 채워진 그날의 일기를 보며 그 아이를 생각해 본다. 아이는 이겼을까. 역시 내가 만든 딱지는 최강이라며 자축했을까.
아니면 졌을까. 뽀글뽀글한 머리를 한껏 쥐어뜯으며 왜! 하고 소리치며 자책했을까.
이왕이면 이겼으면 좋겠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의 맛을 아직은 몰랐으면. 아이의 내일이 아직은 '무적'이길. 더불어 나의 내일에도, ‘무적'이 조금씩 더 많아지길.
2025.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