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당신의 영원한 아기들이 바치는 축사

아빠 칠순 잔치

by nomad

5월은 우리 부부에게 더욱 특별한 달이다. 시부모님과 친정 아빠 모두 음력 4월 생이시다. 특히, 올해는 어머님과 아빠 두 분 모두 칠순을 맞이하셔서, 예년보다 더 바쁘게 보냈다.


남편은 본디 세심한 사람이다. 어머님 생신을 맞이하기 수개월 전부터 잔치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고민했다. 남편의 분주한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효심이 샘솟았다. 남편이 바지런하게 준비할 때마다, 나 또한 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준비할지 의견을 나눴다. 가령 남편이 인당 1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급 중식당을 예약하면, 나는 룸 형식의 소고깃집에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현찰 100만 원이 든 떡케이크를 준비하면, 나는 생과일 케이크에 칠순 축하 토퍼를 얹었다. 남편이 스냅사진 작가를 섭외하면, 나는 셀프 스튜디오를 예약했다. 내친김에 촬영 소품으로 헬륨 풍선까지 주문했다. 우리는 '가성비 칠순 잔치'를 치르기로 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5월의 넷째 주 일요일, 우리 부부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길이 뚫려 제때 맞춰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친정 부모님과 동생들을 모두 만났다. 함께 예약해 둔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머릿속에 그려놓았던 계획을 일사천리로 펼쳐냈다. 케이크에 토퍼를 꽂고 삼각대에는 카메라를 설치했다. 간단하게 가족사진을 찍고, 아빠의 소원 시간도 가졌다. 10분도 안 돼서 간단한 행사가 끝이 났고 우리는 바로 고기를 주문했다.

70번째, 눈부신 오늘. 그냥 지나'칠순'없지!

밥을 먹으며 한창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의 유럽 여행 후기, 나의 일터 하소연, 여동생의 다가오는 출산일과 준비, 남동생의 대학원 적응기. 쉴 새 없는 이야깃거리들이 봇물 터지듯 했다. 시장통같이 바글대는 우리를 조용히 보시던 아빠가, 불쑥 입을 여셨다. 아뿔싸. 우리는 이기적이게도 우리 사는 이야기 하기에 바빠, 아빠 소감을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죄송함이 밀려왔다. 급히 카메라를 켜고 아빠의 목소리를 남겨두기로 했다.


"학교 다닐 때, 태워다 주고 태워 오고 했던 때가 제일 행복했던 거 같아. 지금이야 학교가 가까운 데가 많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학교가 참 멀었어. 그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고. 나는 나이를 안 먹은 것 같은데, 너희들 보면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싶고.... 나는 항시 너희들 학교 다닐 때, 그때 그 마음인데 지금 이렇게 되돌아보면 해놓은 것 없이 이렇게 나이만 먹었다.... 고맙다. 이런 자리 마련해 줘서."

남편은 놀란 눈치였는지, "학창 시절 내네요?"하고 물었다. 아마 7, 8년 됐을 것이다. 아빠는 우리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신 뒤, 곧장 당신의 일터로 향하셨다. 그뿐인가. 토요일 4교시가 끝나면 어김없이 마중도 오셨다. 꾸준함. 그것이 아마 아빠의 사랑 표현이었을 게다. 그걸 깨닫기엔 우리가 너무 어렸을 뿐. 아빠의 말씀이 끝났을 때, 우리는 그제야 마음을 다해 손뼉을 쳤고 아빠의 칠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렸다. 아빠는 머쓱하게 웃으시며, 엄마에게도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을 드러내시기도 하셨다. 엄마는 '충분히 잘 하고 있다'며 덕담하셨다. 식사 시간 내내, 훈풍이 우리를 감쌌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사진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관을 예약 했을 때, 동생들 모두가 찬성했다. 아빠가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 찍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아빠는 그저, 찍히는 것을 좋아하실 뿐, 완벽한 표정과 자세를 끌어내기까지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45분. 우리는 충분히 걸작을 남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굳어 있는 아빠의 표정과 몸짓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팔짱을 끼워 드리면, 그 모습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춰 계셨다. 표정 하나 바꾸는 일도 난관이었다. 모두 내심 속으로 아찔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촬영 말미가 돼서야 엄마가 아빠 조련법을 터득하셨다. 아빠의 허리 뒷부분을 살짝 꼬집으셨다. 아빠는 "아야!"하고 소리를 내며 크게 웃으셨고, 카메라는 그 찰나를 용케 포착해 냈다. 5분 남기고 깨달은 유레카였다. 진작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는 "다음엔 시작하자마자 아빠를 꼬집자!"며 웃음으로 촬영을 마무리했다.



친정집으로 돌아가 케이크와 과일을 나눠 먹으며 일정을 마무리했다. 차가 막힐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빠가 하신 말씀을 곱씹어 보았다. 문득, 최근에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극 중 아버지 관식은 결혼식장에서 걸어오는 딸 금명이를 바라보며, 꼬마 금명이, 어린이 금명이, 어른이 된 금명이까지의 시간을 되새긴다. 나의 아빠도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구나— 생각이 미치자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 먹먹함은, 오래전 남동생이 남긴 한 문장으로 이어졌다.

남동생은 입대 전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편지 끄트머리에 '엄마의 영원한 애기'라는 말이 적혀 있었고, 그 한 줄에 엄마는 끝내 눈물을 터뜨리셨다. 아빠의 마음속에도 우리 남매는 '영원한 애기'였는가 보다.



이 글은,

당신의 영원한 애기들이 바치는 작은 축사이자,

마음 깊은 곳에서 드리는 헌사입니다.


아빠,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게 우리 곁에 머물러 주세요.


2025.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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