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3년 전의 일입니다. 토요일 아침에 회사에 혼자 출근해 밀린 일을 마치고 나니 모처럼만에 ‘마음이 한가한 시간’이 생겼습니다. 이런 때면 저는 사두고도 읽지 못했던 책이나, 한쪽에 밀쳐놓았던 지나간 신문들을 읽습니다.
그 날은 별 생각 없이 ‘그동안 못 읽은 신문’들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 중앙일보가 하나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우연히 펼쳐든 그 신문에서 저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큰 가르침’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가르침은 어떤 분이 고정적으로 게재하는 칼럼 속에 담겨 있었는데, 기가 막힌 것은 그 칼럼이 아주 멋진 문장 한 줄로 시작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칼럼을 읽은 뒤 몇 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칼럼의 첫 문장을 100% 똑같이 기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앙일보 홈페이지에 가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검색을 해보았지만 제가 원하는 칼럼의 원문(原文)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 문장의 요점을 기억이 나는 대로, 문맥을 살려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매우 영리(怜悧 : 눈치가 빠르고 지능이 뛰어나다.)하다. 너무나 영리해서 영악(獰惡 : 성질이 매우 모질고 사납다.)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 뒤에 이어진 칼럼의 취지를 요약하면 이런 말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똑 같은 사물이나 일, 사건을 놓고서도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 사물이나 일, 사건에 관한 사실이나 진실은 하나이지만 그 일이나 사건과 관련돼 있는 자신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이익이 되는 말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일을 놓고도 서로 다른 말을 하기도 하고, 없는 말을 만들어서 둘러대기도 한다. 그것이 사람이다.”
사실 이런 말은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칼럼을 쓴 사람이 굳이 이런 글을 쓰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일일 테니까요.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서나, 아니면 사회생활과 대인관계를 통해서 익히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칼럼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아하!” 하고 무릎을 탁 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칼럼의 첫 문장이 제가 체험했던 1976년도 4월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1976년 4월에 나는 무엇을 했을까?
1976년 4월은 제가 대학교에 입학을 해서 한 달을 막 넘긴 때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절은 ‘10월 유신 반대 데모’로 대학들이 소란스러운 때였습니다.
대학 선배들은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인 우리들을 앞에 앉혀 놓고 주먹을 흔들며 “피 끓는 젊은 대학생들이 ‘10월 유신 정권’을 타도하고 이 나라를 민주화시키는데 앞장을 서야 한다”고 외쳐댔습니다.
그런 시기에 학생운동권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사람들은 소위 ‘학생운동’이나 ‘10월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 걸려서 제적을 당한 학생들, 제적을 당했다가 운 좋게(?) 복학한 학생들이었습니다. 우리 신입생들은 그런 복학생이나 제적생들을 보면 나름대로 '예'를 갖추고 표했습니다.
우리같은 신입생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에게는 개인의 이익이나 출세를 위해 공부를 하는 일반 학생들과 달리 국가와 민족, 국민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명분’과 ‘대의’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진학하면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제가 4월부터 5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제적당한 선배와 복학생들을 비밀리에 찾아다니면서 만났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2달 동안 저는 13명의 제적생과 복학생들을 알음알음으로 수소문 해서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들과 만난 장소는 각각 달랐지만 결국은 소주를 사들고 선배가 숨어 지내는 하숙방이나 은신처에 가서 밤새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아직 어두운 새벽 골목길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일을 반복한 것이지요.
◆‘13번째 사나이’가 남긴 말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저는 학생운동이나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가 제적을 당했던 선배들, 그리고 정부의 구제를 받아 다시 학교로 돌아온 복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생활하고, 무엇을 원하는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3번째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제적생을 만나고 돌아오던 새벽길에서 “이제는 더 이상 제적생이나 복학생들을 찾아다니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왜냐 하면 13번째 만난 그 제적생으로부터 ‘폼 나는 얘기’가 아니라 ‘제적생의 진짜 속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새벽에 그 제적생 선배가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저에게 해준 말은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합니다. 저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 제적생 선배가 한 마지막 말을 저의 금과옥조로 삼아 살아왔고, 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어떤 분께서는 “도대체 그날 그 새벽에 그 제적생 선배로부터 들은 말이란 것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실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 이후 누구에게도 그 제적생 운동권 선배가 제게 피를 토하듯 내뱉은 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선배가 그 새벽에 술에 취해서 잠결에 스치듯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던 그 말이야 말로 그 선배의 ‘가장 정직하며 가장 깊고 어두운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날 이후 그 선배와 저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그 선배의 이름도 얼굴도 모두 희미할 뿐입니다. 다만 그날의 만남을 통해서 제가 깨달은 한 가지 교훈은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시대 세종 시기에 편찬된 청구영언에 실린 작자를 알 수 없는 어느 가요의 마지막 후렴구인 “님아 님아 온 놈이 온 말을 하여도 님이 짐작하쇼서”라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의미'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아무리 많은 얘기를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알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전국이 LH사건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누구는 땅 투기를 한 LH직원을 비난하고, 또 다른 누구는 그 사람을 두둔합니다. 그러다보니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지 국민들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사실과 진실 역시 오직 하나일 것입니다. 다만 그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짧은 생각과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혀서 자기에게 유리한 이런저런 말을 해대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숨어 있는 진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글 : 김중배 [한국조명신문] 발행인 겸 편집인. 조명평론가.
# 이 글은 [한국조명신문] 2021년 4월 1일자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