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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어딘가에 불시착

by 박수미

어린 왕자는 일곱 번째로 지구별에 닿았다. 다른 소행성만큼이나 지구별이 낯설었을 거다. 지구별 어느 한 지점, 낯선 땅에 내가 떨어졌다면 어땠을까? 동영상을 보면서 상상해 봤다.

여기는 몽골이다. 고비사막으로 가는 길에 찍은 영상을 엄마가 보내주셨다. 1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영상인데 정지화면처럼 화면구성이 거의 똑같다.

도로 양쪽으로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사방이 들판이다. 하늘을 향해서 차는 끝없이 달린다. 도로포장이 없었다면 차도도 역시 들판이었겠지. 굳이 영상으로 찍지 않아도 될 화면이지만, 사진만으로는 전달력이 떨어졌을 듯하다. 몽골 여행을 다녀온 엄마는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고비사막까지 6시간 넘게 걸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다. 이 영상을 보고서야 그 여정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름대로 고비로 가는 길이 순탄치 않다. 명맥을 이어가던 한 가닥 포장길도 어느 틈에 사라지고 나중에는 허허벌판 모레 길을 달려갔다고 했다.


나름의 가상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몽골로 순간이동을 해서 지금 내가 저 차를 타고 있다면, 아니 저 들판에 나 홀로 있다면 어떨까? 우선, 처음에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외치겠지. 나는 자연인이다!! 광활한 자연 앞에서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치게 될 것 같다. 온 세상을 독차지하는 듯한 느낌은 정말 황홀할 거다. 자연에 흠뻑 취해서 한동안 넋을 잃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그 무궁무진함에 말문이 막히고, 매료되어 한참을 쳐다보겠지. 엄마. 엄마야, 엄마를 연거푸 찾고, 우와, 와. 우와. 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잊고 지냈던 자연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확인하게 되면 아찔하고, 오싹하기도 할 거 같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상대하는 건 웬만한 강심장 아니고선 어렵다.


몽골 영상을 보다가 예전에 겪었던 비슷한 일이 떠올랐다. 육지에서 바다로 순간 이동한다. 캐나다 빅토리아섬에 있는 ‘돌핀 투어’ 선착장이다. 돌고래를 보겠다고 겁도 없이 배를 탔다. 다섯 명 남짓 승객을 태운 통통배가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고 해안가를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빠르게 달리는 배의 속도감에 신이 나고, 돌고래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떴다. 얼마 가지 않아 배는 속도를 줄이더니 여기도 바다, 저기도 바다, 사방이 바다인 곳에서 멈추다시피 했다. 조그만 바위섬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한 대해 한가운데 배가 덩그러니 놓였다.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듯했다. 돌고래는 튀어나올 기미가 없고, 바다는 고요하기만 했다. 망망한 바다 가운데에 점을 찍어 놓은 것처럼 우리가 탄 통통배는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살짝 튕기기만 해도 배가 뒤집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자연의 위대함 너머에는 짜릿함과 섬뜩함이 버티고 있다.


가끔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고 싶을 때가 있다. 옛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선비들처럼 말이다. 자연을 벗 삼아 책을 읽고, 시조를 읊으며 지내는 시간이 그렇게 고리타분하고 심심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자연은 매력적이고, 대자연의 아우라가 우리를 넉넉하게 품어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과감하게 실행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거주지를 산으로, 초야로 옮길만한 배포가 나에겐 없다. 거기서 살아낼 만한 요령도 없다. 섣불리 갔다가는 며칠도 못 버티고 도망 나올 게 뻔하다. 그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자연을 즐기는 안전한 방법을 찾아봤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엿보는 거다. 자연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직접 자연을 찾아 나선다. 거기에서 겪은 것을 아낌없이 풀어준다. 궁금한 자는 들을지어다. 눈만 뜨고 있어도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가는 여정’에 참여할 수 있다. 산길을 오르지 않아도 자연인 아저씨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월든’을 읽으면서 숲속으로 들어가 생활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을 짐작해 본다. 힘들이지 않고도 자연에서 신선놀음할 수 있다.


산책하듯이 가볍게 즐기는 자연도 참 좋다. 평소에 자연 생각을 별로 안 하는 도시인에게는 당일치기로, 한두 시간이라도, 자연을 구경하는 게 신선한 자극제가 된다, 산 넘고 물 건너가지는 못해도 하늘과 이어진 땅을 밟고, 흐르는 물을 보는 것으로도 괜찮다. 자연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존재감을 확인하게 되니까 말이다. 안부를 묻듯 자연과 인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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