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고 없고 따져보면 알게 되는 것
머릿속 '틀린 그림 찾기'를 곧잘 한다. 오늘은 출근길에 한 판 했다. 나는 중학교에서 방과후 지원 업무를 하는데 오후 출근이다. 수요일 열두 시 반이 안 된 시간이었다. 학교 후문을 통과해 학교 건물로 들어가면 바람골을 만난다. 건물 입구 문이 앞뒤로 트여서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나를 반겨주었다. 트인 공간 너머로 학생들이 보였다. 문이 액자 틀이 되고, 아이들이 피사체로 사진에 찍힌 듯했다. 프레임 속에는 커다란 나무 아래 앉은 여학생 둘의 뒷모습이 담겼다. 넓게 그늘진 자리가 시원해 보였다. 손으로 부채질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점심을 얼추 먹고 나온 아이 몇은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 뛰어다니기도 했다. 여기가 학교 맞나? MSG를 약간 치면 올림픽 공원 잔디마당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만큼 편안하고, 여유로운 공간에서 누리는 휴식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느새 '틀린 그림 찾기'를 하고 있었다. ‘나 때는 어땠지?' 기억을 더듬으며 다른 점을 찾기 시작했다.
나 때는 말이야. 라테를 찾는 꼰대들이 생기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경험한 선에서 다른 것을 보고 이해하게 되니 말이다. 각자의 경험 틀이 기준치가 되곤 한다. 자기가 겪고 알게 된 것으로 다른 이의 상황이나 경험을 미뤄 짐작, 판단하게 된다.
나는 어땠냐고? 학교란 곳이 편안하고, 고급스럽진 않았다. 한없이 단출하고, 소박한, 약간은 불편한 그런 데였다. 국민학교 2학년 때인가?_앗! 나이가..._집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 학교가 생겨서 분교 하다시피 단체로 학교를 옮겼다. 학교 공사 마무리 단계라 운동장이 고르지 못했다. 한동안 체육 시간이면 운동장에서 돌을 줍던 게 생각난다.
그때는 학교 운동장에서 전체 조회를 했기에 건물 입구 중앙에 교단이 있고, 주변을 스탠드가 둘러섰다. 학생 다리 길이만큼 높고, 폭이 넓게 만든 계단을 겅중대며 오르고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보통 거기는 앉는 곳은 아니었다. 그늘막 없이 직사광선에 열 받은 스탠드에는 도저히 앉을 수가 없었다. 인내심 테스트라면 모를까. 평상시 의자로서 역할을 잃어버리고, 운동회 때 학부모 응원석으로 쓸 정도였다.
우리가 주로 앉았던 곳은 등나무 자리였다. 철봉 모래밭 옆 작은 쉼터. 낮은 의자가 몇 놓였고, 위로는 덩굴이 덮여서 그늘이 졌다. 새똥이 묻은 자리를 피해 옹기종기 앉으면 웬만한 아지트 부럽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거의 교실 붙박이로 지내면서 제 발로 운동장에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가끔가다 체육 시간에 볕이 엄청 뜨거울 때는 체육쌤 허락하에 우리는 등나무 시간을 보냈다. 어찌나 좋았는지. 친구들과 깔깔대며 수다 떨던 자리가 아직도 그리워지곤 한다.
내가 기억을 되짚으며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동안 오늘 운동장에 있던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겪었던 불편함은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좋겠다.'라고 부러워할 만한 상황에서, 당사자도 그만큼 '진가'를 누렸을지 궁금하다. '좋다'는 생각을 못 했을지도 모르겠다. 잘 모를 수도 있다. 그 친구들에겐 이게 처음 겪은, 원 경험이니 말이다. ‘원래 그런 거 아니야?’라고 당연시할 수도 있다. 경험치가 적으면 그게 전부 인줄 안다. 경험치가 쌓이면서 여럿을 두고, 좋고 나쁘고 하는 주관적인 기준이 생긴다. 그게 심해지면 훗날 꼰대짓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비교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절대적인 가치를 확인하는데 때로 상대적인 가늠이 필요하다. 빈자리가 생기면, 없어지면 알게 되는 게 있다. 있고 없고를 따지면서 찐 가치를 깨닫게 된다. 당연시했던 그것이, 으레 있을 거라 여겼던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제야 알게 된다. 없어져봐야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뼈를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