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 찾아온 맛있는 냄새. 그리고 그 추억!
2010년 여름.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지금 한국에 와 있고, 이 모든 것을 만든 엄마를 보기 싫어서 나는 기숙사 대안학교에 와있다. 오직 잘 해내야겠다는 의지와 각오만 있을 뿐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시도 때도 없이 외로움은 자주도 찾아온다. 다들 학교 끝나면 어디로 가는지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진다. 나 혼자 기숙사로 간다.
어디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 바람은 쌀쌀하며 주변은 온통 다 낯설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데 이 냄새는 나를 따뜻한 집으로 초대한다. 기름도, 해물도, 고기도 없이 된장 조금과 감자로 맛을 낸 장국 냄새다. 학교에서 해가 넘어가도록 정신없이 놀다가도 집으로 올 때면 늘 이 냄새가 간절했다. 멀리 언덕 위 작은 마을, 저저마다 흰 연기를 뿜어내며 정신없을 때 우리 집 굴뚝에 연기가 난다면 무조건 마음이 따뜻해진다.
큰길에서 언덕을 이어주는 작은 오솔길. 하도 많이 걸어 다녀서 바위처럼 굳어진 길. 기름을 발라 놓은 것처럼 반들 반들하고 잘못 헛디디면 하염없이 미끄러져 갈 길이다. 발 끝에 힘을 빡 주고 걸어야 한다. 밭 사이에 난 길로 고랑이 계단처럼 경계선을 알려주지만 거의 의미가 없다. 배고프면 아무리 힘을 내도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데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본 날은 빠르다.
저 밑 경비초소를 지날 때쯤 우리 집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을 확인했다. 발걸음이 가볍다. 금세 대문 앞에 도착했고 대문을 열어젖힌다. 삐그덕 소리와 함께 쾅하며 닫힌다. 히물히물 웃으며 꼬리를 흔드는 또록이. 뒤뚱뒤뚱 거리며 반갑게 다가오지만 배고파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성급히 집 문을 벌컥 연다.
뜨끈하게 가슴 한가득 쐬어지는 김, 맛있는 장국 냄새는 기분을 좋게 한다. 밥을 하는 큰 쇠가마, 그 앞에 국, 반찬 등을 하는 작은 가마, 밥 가마 옆에 가장 큰 돼지죽 가마. 서로마다 경쟁하는 김을 뿜어 낸다. 가끔은 선율을 뿜어내기도 한다.
옷을 옷걸이에 마구 걸어 놓고 가방을 벗어 놓고 상부터 차린다.
"야! 옷을 그렇게 걸지 말라고 했지? 이제 다 큰 여자애가 언제까지 말해야 해?"
아빠가 그렇게 소설처럼 말하던 예쁜 엄마는 어디로 갔는가? 뾰족한 말만 잘하는 아줌마다. 소리 지를 때 목소리가 어찌나 좋은지.
"앞집 미향이 봐라. 그 집 엄마는 집안 살림 아예 신경을 안 쓴다더라. 걔는 너보다 한 살 어린데 두 벌써부터 밥, 설거지, 집안 정리, 빨래. 싹 다 알아서 한다더라. 아이고~ 넌 언제 미향이처럼 할래?"
'아니 걘 나만큼 공부도 못하고, 학교에서 인기도 없는 것 같은데. 걘 내가 잘하는 거 하나도 잘 못하는데. 엄만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
괜히 말대꾸했다가 엄마 잔소리는 또 늘어날 줄 알기 때문에 잠자코 가만히 있기로 한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많다.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지리 선생님이 내일 새로 개편된 아래 학년 지리 교과서 빌려오라고 했는데. 앞집 미향이가 아래 학년이라 물어보면 될 것 같긴 한데. 아무리 무서워도 엄마가 맨날 말하는 미향이 한데 굽신거리기는 싫다. 꼴두 보기 싫다.
온 하루 종일 농사일 하느라 엄마가 힘들었을걸 아니까 설거지는 알아서 했다. 그래도 엄마는 칭찬해주지 않는다. 힘들어서 신경이 잔뜩 곤두서있다. 아빠는 술 한 병이면 언제든 기분이 만사형통이다. 오늘은 언제 술을 사 왔는지 마시고 기분이 좋으셔서 별말씀 없다. 어렸을 때는 그리도 많이 노래를 시키시더니, 이제 커서 그런가 노래를 시키지 않으신다. 다만 텔레비전을 보면서 눈물이 많아지셨다. 오늘도 텔레비전연속극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신다.
내일은... 지리교과서 빌리는 건 포기했고, 숙제 안 하면 맞아야 하는 영어숙제부터 하기로 한다. 단어 외워가야 하고 Reading 부분 미리 번역해 가야 한다. 하기 싫지만 맞지 않으려면 해가야 한다. 수학은... 수학도 해가야지. 할 게 너무 많다. 그런데 뭐 이런 걸 엄마 아빠는 아는지, 모르는지. 하긴 어려서부터 쭉 관심이 없으셨는데 갑자기 관심이 생길 일이 없다. 숙제하면서 텔레비전연속극 같이 본다. 오랜만에 연속극 시간에 정전이 되지 않아서 포기할 수 없었다.
요새 하는 연속극은 "석개울의 새봄"이다. 이 연속극은 너무 유명해서 옛날에는 중국 사람들도 우리나라 통로(채널)를 잡아서 봤다고 한다. 정옥이가 아빠 기다리면서 부르는 노래가 나올 때 마 너무 마음이 아프다.
기럭 기럭 기러기야
너 어디로 날아가나
단풍 들 때 떠나갔던
정든 집을 갖가지
기럭 기럭 기러기야
우리 아빠 언제 오나
자나 깨나 기다리는
나를 보러 언제 오나
언제 잠들었는지 벌써 눈 뜨기 싫은 아침이다. 동네 수탉들은 왜 그리도 부지런한지. 시끄러워서 더 잘 수가 없다. 엄마는 아침밥을 이미 하고 있고 아빠는 이불 거두고 담배 한 대 태우고 있다. 겨우 일어나서 이불 거두고 세수수건 목에 걸치고 세수하러 개울로 간다. 아침 개울물은 한 여름에도 시원해서 좋다.
엄마가 저번에 장마당에서 사준 새 블라우스에 교복 치마에, 한국몽신(키 높이 통굽 구두) 신고 등교한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학교를 잘 다니는 성옥이 언니네 집에 들러 같이 간다. 말을 함부로 해서 상처받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학교 갈 때 유일한 길동무다. 우린 말없이 부지런히 걷고 또 걷는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 가서 지리 교과서 좀 빌릴 수 있을지 찾아볼 수 있다.
학교에 도착하니 이미 사상부위원장이 출석을 부르고 있다. 알아서 체크는 해 준 것 같다. 내 뒤로 줄줄이 한 두 명씩 계속 들어온다. 요새는 청년동맹 가맹 준비 한다고 조회 끝나면 수첩에 4시 5가, 계몽기가요 등을 정리한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온통 지리교과서 생각 밖에 없다. 안 빌리면 그 무서운 선생님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저번에는 우리 반에서 제일 힘이 센 혁민이가 좀 태도가 나빴다고 백묵을 걔한테 던졌다. 백묵은 정확하게 혁민이 책상 코 앞 모서리에 맞았고 백묵 파편들이 불이 번쩍 나게 교실 사방으로 튀겼다. 우리 모두는 삽시에 얼어 버렸고, 그 배짱 좋은 혁민이도 얼어버릴 정도였다.
이따 두 번째 수업인데. 바로 옆 교실이 아랫반 교실인데 복도에서 계속 서성거리기만 하고 아무한테도 말을 못 걸었다. 도저히 용기가 안 난다. 그냥 교실로 와서 앉았다. 첫 번째 수업 끝나고 몇몇 남자애들이 히쭉히쭉 거리며 옆 교실 아랫반에서 교과서 빌려 오는 눈치다. 좋겠다.
수업시간 종이 울린다.
"땡땡땡 땡땡땡 땡땡땡"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모두가 일어섰다.
"쾅"
책상 위로 뒤에서 지리 교과서가 날아왔다. 갑자기 모든 애들이 나를 주목한다. 머리를 절대 들 수가 없다. 그 애들이 나를 어떻게 쳐다보는지 보기가 싫다. 그리고 갑자기 가슴이 너무 두근 거린다. 보지 않아도 누가 그랬는지 안다. 뒤에 앉은 애중에 나한테 교과서 갖다 줄 애는 걔 밖에 없다.
교과서를 빌리지 못한 애들은 다들 일어났고 엄청나게 혼이 났다. 나는 유일하게 교과서를 빌린 몇 안 되는 인원에 속해 다행히도 욕을 면했다. 용기도 없고, 친구도 몇 안 돼서 어디서 뭘 빌리거나 얻는 걸 진짜 못하는데 요새는 자꾸 누가 도와준다. 걔가. 영광이가.
다들 눈치챘겠지. 영광이가 나 좋아하는 거? 수업이 끝나니까 다들 수군대느라 바쁘다. 내 옆에 앉은 영심이는 엄청 부러워하는 눈치다. 근데 어차피 내 짝꿍은 공부에 영 관심이 없어서 지리 교과서 한번 빌린다고 최우등이 될 수 있는 애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저 유영광. 이거 고마워."
"오. 다음 수업 때 또 갔다 줄게."
걔는 교과서를 받아서 책상 서랍에 넣고 친구들과 휙 사라져 버린다.
오후에는 그 싫은 농촌동원이 또 있다. 제발 공부만 하면 안 되는가? 우린 분명 학생인데 무슨 일을 이렇게 많이 시키는지. 오늘은 김매기라고 한다. 오전 4 수업 끝나고 집에 가서 밥 먹고 올 때 호미를 챙겨 와야 한다. 집에 잘 먹는 호미가 있어야 할 텐데. 엄마가 좋은 호미 가져갔으면 어떡하지?
다행히도 엄마는 오늘 김매기를 하지 않는가 보다.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호미가 남아 있다. 밥 먹고 챙겨서 학교로 간다. 어찌나 더운지 학교에 도착하면 하얀 블라우스가 등이 땀에 싹 젖어버린다. 그래도 학교 복도에 들어서면 좀 시원하다. 오후 수업 두 수업을 마치고 김매기 농촌동원을 나간다.
두만강 옆 큰 옥수수 밭에 도착했고 우리는 한 고랑씩 맡아서 섰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고랑이다. 김매기가 시작됐다. 서걱서걱 열심히 김을 매기 시작했다. 우리 여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 줄로 쭉 속도가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등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열심히 김을 매는데 왜 저 남자들을 따라갈 수가 없다. 초등학교 때는 여자들이 일을 더 잘했는데 작년부터 남자들이 일하는 속도가 우리 여자들의 두 배다.
저 앞에서 누가 마중을 나온다. 분명 내 고랑이다. 다른 애들 고랑 앞에도 한 명씩 다들 오고 있다. 거의 다 가까이 와간다. 걔다. 영광이.
"고마워"
말이 없다. 다 하고 나선 친구들 한 테로 쑥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