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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그의 편

우리 식구 모두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by 한은혜

외 할머니는 가끔 그때 할아버지가 술만 마시지 않았다면 엄마의 운명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보다 엄마의 첫사랑, 그 백두산 줄기 총각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누가 봐도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인물은 텔레비전연속극에서 나오는 주인공 같고 태도와 말은 점 잖았으며 무엇보다 집안 토대가 좋으니 어떤 일이 있어서 흔들릴 일이 없는 가문으로 여자가 시집가기에는 너무 좋은 일등 신랑 감이었다고 한다.


"그때 이 영감이 술만 마시지 않았으면 됐을 것을. 으~ 쯧쯧!"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엄마의 첫사랑, 그 명국 동무는 엄마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고 엄마가 돌아간 후에도 여러 번 집으로 찾아갔던 것으로 보아진다.


"엄마, 근데 엄마는 어떻게 아빠한테 시집오게 됐어? 진짜 할아버지가 술을 마셔서야?"


엄마는 말이 없다. 마치 아직 처녀라도 된 것처럼 새침해지면서 절대 말하지 않을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 표정에 아빠가 넘어간 건 아니겠지? 나는 엄마의 저런 표정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고 오싹하며 싫다. 그리고 나에게 말을 안 해주는 것이 너무 서운하다. 이제 나도 남학생들의 관심을 받는 처녀가 다 됐는데.


저녁 식사를 마치니 텔레비전 연속극 할 시간이 됐다. 텔레비전에서 날씨를 알려준다. 끝나고 노래 하나가 지나가면 재밌는 연속극이 시작된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6.25 전쟁을 맞아 "붉은 흙"이 나온다. 무섭지만 재밌다. 황해도 신천에서 조국해방전쟁 때 일어난 실제 있은 이야기를 담은 연속극이다.


"그 그 그러니까 나 음전이~ 사촌오빠 부위원장도 오구, 도위원장도 왔다네~ 어서 우리 포전으로 불러오라고~"


"개소리하지 말라요!"


"이런 기회에 판정수확고두 낮추면 좀 좋아? "


저녁에 도위원장이 신천리에 옴으로 회의가 열리고 음전이는 몰래 도위원장을 엿본다.


별 별 그리운 별 그 어데 있나

꿈에도 꿈속에도 비쳐오는 별

은하수 건너서 가고 또 가면

그리운 별 있단다 내 사랑의 별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음전이와 도위원장이 순사에게 잡혀가며 헤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애틋한 사랑 노래에 비치는 장면은 분명 도위원장이 음전이의 첫사랑 일거라고 생각이 된다. 그런데 음전이는 왜 저런 떼떼버버리, 머저리 만수와 살게 됐는지는 안 나온다. 사촌오빠에게 리혼을 부탁해 보지만 전쟁이 일어난 난리로 인해 일 키우지 말라며 무시해 버린다. 도위원장에게 부탁해 달라고 편지를 썼지만 전달하지도 않고 잘라버린다.


붉은흑 의 주인공 도위원장은 농군이었으나 해방 후 김일성의 은덕으로 도위원장 최고인민위원회위원으로까지 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정을 이루고 딸까지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음전이의 남편 만수는 그 가문에 대해서 나오지는 않지만 미군이 들어왔을 때 치안대로 활동하며 빨갱이들이라 불리는 당원들을 잡아 가두는 앞잡이 일을 한다. 그리고 이런 만수를 음전이는 최종회에서 처단한다. 조국을 위해 남편이지만 치안대 이기 때문에 처단한 것이다.


엄마의 첫사랑의 집안은 아마 저 도위원장네보다 더 좋은 가문이었을 것 같은데 왜 엄마는 그 사람이 아니라 아빠랑 결혼했지?



농촌지원에서 부대에 복귀하고 나서 명국 동무에 대해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뱃속에 돌덩어리 하나가 생기더니 점점 딱딱해진다. 서운하지 않은데 체한 것 같은 이 기분과 애써 밀어내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몇 번씩이고 집에 같이 가자고 쪽지가 왔지만 수락할 용기가 매번 부족하다. 사실 수락한다고 해서, 둘이 다시 집으로 찾아간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명국동무의 마음은 나를 향해 있지만 그 동무의 집에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치안대 집안과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집에서 연락이 왔다. 멀리서 손님이 왔으니 빨리 집으로 오라는 전보였다. 전보를 칠만큼 급한 손님이 누구지?


...


급히 집에 도착하니 해가 똑 떨어진 저녁이 됐다. 대문 문을 여는데 집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 아버님, 한잔 드십시오! "


"그래 주게나"


"저는 따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저의 운명적 색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마음이 변한 적이 없습니다. 4년이 흘렀지만 매일과 같이 그리워하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데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버님!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자네 술 마시는 걸 보니 아주 통이 크고 큰 일 할 사람 같군! 그래 그러세나!"


나도 없는 자리에서 저렇게 큰일이 결정되다니. 사실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몰라. 명국 동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평생 살면 아무렇지 않게 행복할지도 몰라. 저렇게나 나에게 정열적인 사람이라면 내 인생 맡겨도 되지 않을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술기운에 얼굴이 벌건 아빠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손훈 동무가 보인다. 나를 보자마자 그는 활짝 웃으며 자기 옆으로 손짓하며 오라고 한다. 지금은 져줘야 하는 때인 것 같다. 아무 말 없이 그 옆에 가 앉았다. 그는 슬펴 시 산밑에서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어찌나 크고 따뜻한지. 4년이라는 그 긴 시간 나를 기다려 온 그 마음이 한꺼번에 물 밀듯 흘러 들어온다.


"옥미야, 이렇게 훌륭한 신랑감을 왜 여태 말하지 않았니? 이번에 날을 잡을 거니 그렇게 알거라!"


"네"


지그시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아무 토를 달지 않게 했다. 긴 고민을 하지 않게 했다. 최근 엄청나게 복잡한 생각과 고통에서 너무도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던 나에게 해답을 건네는 것 같았다. 우리 식구 모두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운명은 저 겁 없는 시골총각 손훈 동무의 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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