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럽고 외로운 나에게 첫사랑 처방전을 내린다.
여기 한국으로 온 후 나는 오로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의사가 되야겠다는 열정으로 1분 1초를 아깝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기숙사에서 셔틀버스 타고 학교에 와서는 수업 스케줄에 맞게 공부하고 끝나면 또 셔틀버스 타고 기숙사로 가서 공부한다. 19살이지만 한국에서의 공부는 1년 차로 턱없이 부족하다고 늘 느낀다. 하지만 그 열정이 늘 유지되지는 않는다. 잠깐 쉬려고 눈을 들면 쌍쌍이 연애하는 또래 친구들이 보이고, 아무도 나에게 호감의 눈빛을 보내지 않는 것이 속상하다. 그럴 때마다 약처럼 한때 북한에서 사랑받았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힘들어 부들부들 떠는 나에게 첫사랑 처방전을 내린다. 몇 년 전인 2007년 여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지리교과서 그 사건이 있은 후로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영광이와 나를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그런데 아직 나는 영광이와 단둘이 만난 적이 없다. 언제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나는 모른다. 다만 학교 가는 것이 예전보다 더 좋아졌고 설렐 뿐이다.
"다음 주부터 여름 방학이고 오늘 우리 반 여자들 경비인 거 알지?"
담임 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잊지 말라고 공지하신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서 밥 먹고 이불 챙겨서 오면 된다. 겨울에는 온돌을 뜨끈하게 데워 줄 나무도 가져와야지만 여름에는 땔감을 챙기지 않아서 좀 좋다. 얇은 담요 하나만 챙겨 오면 된다. 아 그리고 윗동네 같은 반 친구 봉순이와 같이 오게 될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자는 것보다 친구들과 같이 자는 이 경비가 좋아졌다.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 수 있고, 또 은밀한 뒷얘기들도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오늘은 과연 어떤 재밌는 말 거리들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집에서 이불을 챙기고 봉순이와 경비서로 내려온다.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니 저기 구석에 시커먼 그림자들이 수근 수근 거린다. 무서워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뛰어서 경비실로 들어간다. 아랫마을 친구들이 와 있다. 서로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자리에 담요를 깔아 놨다. 제일 늦게 도착한 우리는 남은 구석 자리에 담요를 깔아 놓는다.
"탕탕탕!"
"뭐지 뭐지? 누가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다들 무서워서 아무도 나갈 용기를 못 낸다. 나는 이상하게 이런 건 무섭지가 않다.
"내가 나가볼게"
밖으로 나가서 문을 연다. 아까 운동장에서 봤던 그 시커먼 무리들이었다. 우리 반 남자들이다. 히물 히물 웃으면서 막 밀고 들어온다. 못 이기는 척 뒷따라 들어온다.
"야 너네 심심했지? 그럴 줄 알고 우리가 왔지."
"아닌데. 우린 안 심심했는데."
"그럼 갈까?"
"아니... 그럼 뭐 할 건데?"
"편주로 주패 하는 거 어때?"
"그래!"
남, 녀 쌍쌍이 4명씩 옹기종기 모여 앉아 주패를 하기 시작한다. 영광이, 철혁이, 설희가 자리 잡고 먼저 앉았고, 서성거리는 나한테 영광이가 눈짓을 해서 거기에 끼우기로 했다. 빨간 10 끼리 편이고, 빨간 10 없는 나머지 두 명이 편이다. 54장의 카드들 네 명이서 시곗바늘 돌아가는 반대 방향으로 차례차례 나눠 갔는다. 빨간 10이 왔다. 나머지 하나가 누구에게 갔는지를 최대한 빨리 알아 채야 쉽게 이길 수 있다.
"밤이니까 공병 3 누구야?"
"나!"
영광이다.
"3,4,5!"
그 옆이 나인데 나한테 빨간 10이 있는 8,9,10 늴리리가 있다. 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일찍 내면 나의 팀이 나를 알아보겠지만 반대편도 내가 적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아끼기로 한다. 그다음이 철혁이다.
"없어? 그럼 8,9,10!"
빨간 10이다. 내편이다. 최대한 상황 봐서 우리 둘이 먼저 나가도록 플레이를 해야 한다. 첫 판이라 잘하고 싶은데 8,9,10 외에 단골들이 너무 많다. 어떻게든 노력을 해봤지만 지고 말았다. 철혁이는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대신 진 벌칙으로 우리 둘은 상대 팀으로부터 딱밤을 맞아야 한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때리기로 했다. 아플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아픈걸 잘 참는 편이기 때문이다.
상대편이었던 설희는 철혁이의 이마가 시뻘게지도록 아프게 때린다. 그걸 보니 좀 아찔하긴 하다. 그런데 영광이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오더니 귓속말을 한다.
'내가 아프지 않게 때릴 테니까 여름 방학숙제 해줘. 알았지?'
나는 말없이 머리를 끄떡거렸다.
이상하게도 편은 왜 자꾸 철혁이하고만 되고 영광이가 나를 때리던가, 아니면 내가 영광이를 때리는 상황만 온다. 영광이와 나는 서로 때리지 않고 시늉만 계속한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설희와 철혁이는 서로 이마가 구멍 날 정도로 아프게 때린다. 다들 옆에서 저러다 정분난다며 낄낄 거린다. 서로 죽자고 때리는 게 재밌어서 우리한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놀다 보니 밤 자정이 거의 돼 갔고 남자아이들이 이제 가겠다며 갔다. 그 애들이 간 후 우리도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 학교 가는 평일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가야 지각하지 않는데 다행히도 일요일이어서 늦잠을 잤다. 다 가고 윗동네 봉순이랑, 중간 마을 설희만 남았다. 우리도 가려고 준비해서 나왔다. 경비실 문을 잠그고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쿡 찌른다. 영광이다. 슬그머니 무리에서 빠져서 다시 경비실로 들어갔다.
영광이는 말이 없는 아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쉴 새 없이 내 앞에서 남자아이들 얘기를 한다. 누구는 누구를 좋아하고 오늘 오후에 시내로 가서 사진 찍을 거란다. 그 아이가 말한 조합은 한 번도 상상 못 했던 조합이었다. 그리고 우리 말고도 서로 좋아하는 커플이 두 커플이나 된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시내 가서 사진 찍을까?"
"난 안될 것 같아. 우리 엄마랑, 아빠가 혼자서 시내 가는 거 허락 안 하셔!"
"알았어!"
이런저런 얘기하다 우리는 헤어져서 나는 집으로 갔다. 올라가는 내내 그 아이가 말해 줬던 이야기들을 곱씹으면서 행복한 마음을 오래 간직해 본다. 기분이 너무 좋다. 나만 특별한 얘기를 아는 것 같아서 그것도 좋고, 영광이가 확실히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것도 좋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중간 마을 지나서 군부대 마을 거의 벗어날 때쯤 인가가 없는 산 밑 외통길이 있는데 거기서 누군가가 기다린다. 어젯밤에 같이 주패를 했던 철혁이다.
"이제 집에 가서 뭐 해?"
"나? 아마 물 길을 걸"
"알았어"
그러더니 사라져 집으로 가버린다. 별 싱거운 애가 다 있다 싶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 아빠는 농사일하러 가고 없고, 예상대로 물독은 비어 있다. 아침밥 대충 챙겨 먹고 물 길으러 나선다. 물을 한번 길러 오는데 길목에 철혁이가 또 나타났다.
"야 이번 여름 방학숙제 좀 부탁해도 돼?"
"아니 안돼. 싫어"
그리고 무거운 바께쯔 두 개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바로 나가면 밖에 있을 것 같아서 한참을 있다가 나간다. 다행히도 없다. 그런데 대문 옆 돌 담에 하얀 종이로 된 두꺼운 공책과 가죽으로 된 비싼 수첩이 놓여 있다. 두꺼운 책은 방학숙제 용일 것이고 수첩은 나 쓰라고 준걸 것이다. 나는 영광이 숙제를 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 숙제까지 해줄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나는 영광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철혁의 부탁과 마음을 받아 줄 수가 없다. 다음 주 금요일 방학 중 첫 집합 날 철혁이한테 이걸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한다.
무더운 한 주가 금방 지나가고 방학 중 첫 집합 날이다. 일찍이 준비해서 학교로 향한다. 다들 얼굴 볼 생각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교실에 들어서니 한창 진지한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신명심이~ 쟤는 빠쳐서 아마 일찍 시집갈걸? 21살?"
"아니거든! 그럼 쟤는? 금이 말이야"
"걔는 아마 25살쯤 가지 않을까?"
"뭐야 차별하는 거야?"
아무 말이 없다. 나는 모르는 척 내 자리에 와 앉았고 어떻게 하면 책을 넣어놀까 생각만 하고 있다. 방학중 중요한 공지는 약초를 캐서 준비해 놓으라는 공지였다. 공지사항 끝나고 다들 나갈 때 제일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철혁이 책상 안에 책을 제꺼덕 넣어 놓는다. 한 시름이 놓인다.
사랑받던 그때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이 흐뭇해지고 자신감도 조금 올라가는 기분이다. 뚱뚱해진 이 살을 빼기 위해서는 밥을 조금 먹고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 오늘부터 기숙사에서 가까운 석촌호수 공원을 학교 갔다 오면 뛰어야겠다. 무조건 뛰고, 살을 빼는 거야. 그러면 나도 언젠간 남들처럼 연애를 하게 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