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앉은 이 남자. 얼굴을 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에 드는 것 무엇
정신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그 속에서 나의 시간도 휩쓸려 간다. 마음속에 아빠를 향한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간직하고 살아간다. 도시를 향한 애정보다 시골 농촌을 향한 그리움이 더 커서일까? 시골 대학교에 내 온 우주가 빨려 들어갔다. 3년 동안 알고 지냈던 여린 살갗 같은 모든 관계들을 서울에 남겨두고 시골 대학교로 왔다. '나 사실은 활발한 아이였어'라는 정체성을 찾은 지 얼마 안돼 다시 움츠려 든다. 다만 대학교 문 앞에서 좌절했던 고향에서의 꿈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낯선 곳에서의 삶에서 붙잡을 수 있는 건 교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를 가기로 결정한 건데 이상하게 어떤 기대 같은 것이 조금 생겼다. 새로운 인연을 기대한 걸까? 무조건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라고 할까? 자리는 적당히 중간 보다 한 줄 뒷줄이고 구석보다는 가운데 앉았다. 비스듬히 앞에 어깨가 넓고 머리는 적당히 짧으며 파마끼 없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다. 얼굴을 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인가? 피부색은 목 색깔로 보아 흑인은 아니지만 동양인치고는 흑인에 가까운 색깔이었다.
잘생긴 청년부 목사님이 설교도 깔끔하게 하시고 찬양도 지나친 감정 부화가 없이 인도하시고 짧게 기도로 마무리하셨다.
"오늘 새로 왔제? 저 가운데 방으로 가"
청년부 회장으로 보이는 언니였다. 하얀 피부에 쌍꺼풀 짙은 예쁜 언니가 경상도 사투리로 툭 얘기했다. 아무 소리 없이 가운데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 두 명에 여자 세 명이 있는데 다 나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리고 남몰래 속으로 흠칫했다. 내 앞에 앉았던 그 사람이 여기에 있다. 좋으면서도 겁이 난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 사람 옆에 앉은 남자가 경상도 사투리로 이름을 물어본다. 여기 순장(소그룹장)이라고 한다.
"이름은 금이고요 성은 손입니다."
"손금? 어려서 놀림 많이 받았겠네요"
"한예대 신입생?"
"네"
"나도 한예대구 3학년"
"학부는 뭐지?"
"법학부요"
"오~ 그러고 보니 여기 이 친구도 법학부인데"
"후배네. 전 전준홍 이구 3학년이요. 연락처가 어떻게 되세요?"
그러더니 내 옆으로 온다.
조금 당황했지만 얼떨결에 핸드폰 번호를 불러 줬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걸어준다. 저장하라는 거다. 바로 저장하고 굳어진 몸과 빨개진 얼굴색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모임이 끝나고 학교 선배들 뒤를 졸졸 따라가 갔다.
"아 우리 밥고(밥 고정으로 먹는 날) 만들자.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네"
"준홍이랑 금이랑 언제가 좋아?"
"전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 언제든 좋아요."
"그럼 준홍이는?"
"수저?"
"그럼 그때로 하자. 아 그리고 밥 같이 먹을 사람 없으면 언제든 우리 불러."
"네"
다들 기숙사 살아서 저녁도 학교에서 같이 먹는 게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방에 들어가니 새내기 동기만 누워서 뒹굴 거리고 선배들은 없다. 같은 동기이지만 나이가 두 살 많아 언니라고 부른다.
"언니, 교회 정했어?"
"응"
"어땠어?"
"우리 학교 선배들도 많고 해서 괜찮았어"
"너는?"
"난 학교 채플 그냥 듣으려고. 저녁 같이 먹을까?"
"응"
"학식?"
"그래. 다해야! "
"응"
"보통 교회에서 처음 모임할 때 연락처를 다 물어보나?"
"그러기도 하는데 다 물어봤어요? 아님 한 명만?"
"다는 아니고 학부 선배라면서 한 명이 먼저"
"에~ 언니 마음에 들었구나?"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잘생겼어요?"
"그렇게 잘생기진 않았는데 멋있어"
"뭐야~ 빠졌네~"
"낼 점심 몇 시에 먹어?"
"12시?"
"언니는?"
"나는 수업이 점심시간이어가지고 끝나면 2시 반. 엄청 배고 플것 같은데"
"그때 나는 수업 있네. 언니. 그 오빠한테 밥 먹자고 해봐요~"
"진짜? 그래도 될까?"
"해봐요"
"그럴까?"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구리빗이라 좀 남자답고 무서울 줄 알았는데 정작 얼굴을 보니 부드러웠다.
다음날 수업이 끝나고 배가 고파서야 생각났다. 미리 연락해 볼걸. 그래도 한번 해볼까?
"오빠 혹시 점심 식사하셨어요?"
"먹었지. 아직 못 먹었어?"
"네. 수업이 지금 끝나서"
"알았어. 학관에서 기다려."
뭐지 온다는 건가? 이건 좋은 신호 아닌가? 근데 이따 오면 무슨 말하지?
"금이야!"
"네"
"식사하셨으면 안 오셔도 되는데"
"우리 새내기 혼자 먹게 둘 수는 없지. 난 먹은 지 꽤 돼서 또 먹을 수 있어"
"진짜요? 감사해요~"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건 없지만 이미 내 마음은 옆에 남자 친구가 생긴 느낌이다. 점심을 혼자 먹지 않게 됐고, 멋있는 오빠가 옆에 있다는 게, 이미 너무 만족한 대학생활이다.
그리고 그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계속 그 시간이면 준홍이 오빠와 밥을 먹었다.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 벌써 중간고사 기간이다. 여기는 학생들이 공부를 진짜 많이 한다. 밤이 돼도 도서관 문이 닫히지 않고 계속 열려 있다. 오늘은 나도 도서관에서 밤샐 작정으로 저녁 먹고 도서관으로 왔다. 자리 잡아 놓고 물 뜨러 나왔다가 휴게실 창가 쪽에 준홍이 오빠가 친구랑 있는 것이 보인다. 말 걸 용기는 없고 모르는 척 그 옆을 지나가 보려고 한다. 물을 뜨고 자리를 찾는 척하면서 그 옆을 지나친다. 못 본 눈치다. 그런데 내 귀가 얼마나 밝은 무슨 소리하는지 너무 잘 들린다. 연애상담이다.
"내가 요즘 관심 있는 친구가 있는데 좀 고민이야!"
"뭐가"
"그 친구는 새내기고 나는 3학년이니까 얼마 같이 못 있는데 시작해도 되는지 모르겠어"
너무나 잘 들렸다. 그리고 마음이 얼어버렸다. 그래서 아직까지 아무 고백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 버렸다. 정식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니 가서 따지거나 물어볼 처지도 못된다. 마음만 아프고 얼어붙을 뿐이다.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월요일 늦은 점심. 차분하거나 따뜻한 표정, 행동 따위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퉁명스럽고 날카로운 말만 뱉어낸다. 그리고.
"오빠, 첫사랑 얘기 해줘요"
"첫사랑? 에이. 금이가 해줘"
"음... 비밀인데 오빠한테만 말할게요. 고향에서 우리 학교는 시골 학교여서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쭉 한 반이었어요. 코 찔찔 흘릴 때부터 본 사이들이었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면서 우리는 다 별명이 하나씩 있었어요. 그리고 이름이 아니라 별명을 불렀어요. 그런데 중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마치고 우리 반 학급장이 함흥이라는 도시에 놀러 갔다 왔는데 우리한데 이제는 서로 별명을 부르지 말자는 거예요. 여자들은 남자들한테 중학교 이후에는 별명을 잘 안 불렀고, 남자들이 유독 별명을 많이 불렀거든요. 이제 서로 나이가 먹을 만큼 먹었으니 존중해 주자는 취지였어요."
"오~ 그 친구 멋있는데. 혹시 그 친구가 첫사랑이야?"
"네"
부끄럽게 웃는다.
"어떻게 시작한 거야?"
"음... 시작은 오락회에서였는데."
"오락회가 뭐야?"
"아~ 같이 모여서 노는 건데. 게임하다가 걸리면 노래하거나 춤추는 거요. 원래는 노래만 했었는데 중학교 4학년 지나면서 몇몇 애들이 춤을 배워 오더니 한국노래를 녹음기로 틀어놓고 춤추는 걸 좋아했어요. 근데 그 학급장 친구가 게임에 걸려서 춤을 추게 됐는데 그러면 꼭 짝을 골라야 하거든요.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서 앉았는데 그 애는 대각선 맞은편 구석에 있었어요. 아주 부끄럽게 쭈뼛쭈뼛 일어나더니 제가 있는 쪽으로 손 짓을 하더라고요. 저는 그 친구가 나를 지목했을 거라고는 전혀 예견을 못해서 옆에 춤 잘 추는 친구를 일으켜 세웠어요. 그러고 나서 집으로 가는 길에 학급에서 인싸였던 친구가 그 학급장이 남자들 모인 데서 제가 제일 좋다고 했다나요? 그러니까 괜히 마음이 이상해지고 아까 전에도 나한테 손진한 건가 싶더라고요. 그 이후로 학교에서 어려운 일하거나 그러면 항상 도와주더라고요. 설날에 선생님 집에 인사하러 모였을 때는 몰래 불러서 선물도 주고요"
"오~ 무슨 선물인데?"
"그때 최신 유행하던 건데. 중국에서 나온 키 달린 수첩이었어요. 키가 두 개 달렸는데 하나는 자기가 가지고 하나는 나보고 가지라고 하더라고요. "
"뭐야 뭐야. 그럼 지금도 그 친구 보고 싶어?"
"네. 가끔요."
"나중에 신문 같은 000을 찾습니다. 이런 거 내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요"
"너 혹시 그거 알아? 우리 도서관 옆에 히즈커피에서 커피 쿠폰 익명으로 선물할 수 있는 거?"
"아니요"
"혹시 왔는데 아직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
"진짜요?"
"핸드폰 문자 한번 봐봐. 온 게 없나"
"어떤 거지?"
"에이~~ 여기 왔네 왔어. 누구야?"
"우와 신기하네요~"
나는 이 커피 쿠폰이 제발 이 오빠가 아니길 바랐다. 이젠 싫어졌다. 마음의 문이 닫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