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를 해버렸다

이렇게 쉽게?

by 한은혜

봄이 오면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핀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노력인 마냥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다만. 꽃을 피우지 않았으면서도 피웠다고 하며, 생색내려고 하는 마음. 그 심리. 그것이 우리 인간 마음속에 있다. 그것이 늘 우리 마음을 괴롭히며 사악한 길로 가는 문을 연다. 하늘의 햇빛을 따라, 바람을 따라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햇빛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을 수긍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해가 지고 달이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또 해가 지고 달이 떴다. 그렇게도 애끓이고 아팠던 마음은 어디로 간지 안 보인다. 저 달이 비추고 있을 그 옛날 작은 집, 아빠 얼굴이 그리울 뿐이다. 해가 비추고 바람이 불며 10년이 지나면 어떤 잘 난 것도 해지고 낡아지며 없어지건만. 아빠 얼굴은, 추억은 시간이 갈수록 더 그립고 짙어만 져간다. 또 보고 싶다.

이제 나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확신이 섰다. 고향을 위한 시간으로 보내야겠다. 큰 교회에서 장학금 받던 것을 포기하고 고향 출신 사람들이 다니는 작은 교회를 섬기기로 작정했다. 짙은 쌍꺼풀에 진한 눈썹, 통통한 몸 집에 강단 있는 눈빛의 여 목사님이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자 온 가족이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하늘에서 부어지는 사랑이 너무 커서 끊임없이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 북송당한 한 여인의 딸, 고아 된 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탈북여성 몇 명과 교회를 시작하셨다.

교회를 섬기기 위해 왔다고 하니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주일학교 선생님을 맡아 달라고 하신다. 이날을 위해서였을까? 휴학하고 서울에 머무는 동안 모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었다. 당시 사용했던 찬양들과 파일들을 참고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 온 선생님이 궁금해서 말썽 부릴 생각조차 못하는 아이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린다. 저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 하늘에서 그런 사랑이 내게 부어지기를 기도한다.

"금이 선생. 다다음주에 서울에서 큰 연합 수련회 있는데 꼭 같이 갑시다. 우리 교회 선생님들은 필수예요."

"네"

일주일 동안 진행하는 수련회라고 한다. 최대한 간단하게 짐을 준비했다. 교회 스타렉스 차량으로 같이 이동하기로 했다. "2월은 봄입니다"라는 노래가 고향에 있었지만, 사실 2월은 겨울이다. 춥다. 추운 건 정말 싫은데. 제일 따뜻한 스웨터를 입고 차량에 올랐다.

도착하니 접수를 하고 명찰을 준다. 그리고 규칙을 설명해 준다. 이곳에서는 많은 시간을 하늘과만 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규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핸드폰을 압수당했다. 말도 큰 소리로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하늘과 대화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에 가서 짐을 풀고 큰 강당으로 모였다. 사람들이 꽤 많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연령대가 다양하다.

시간이 되니 무대 위에 두 사람이 나타난다. 여자는 나보다 작아 보이는데 아주 똘똘해 보인다. 북한 출신이란다. 남자는 남한 출신. 둘이 사회자인데 레크리에이션을 준비한 것 같다. 막힘이 없고 신이 나게 아주 진행을 잘한다. 그 많은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며 여러 번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들기도 하고 꼬리 잡기 같은 활동도 시킨다.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언뜻언뜻 체크가 되는 인물들이 몇 있다. 아빠 나이로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들. 그리고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 키는 큰 편이며 눈썹은 짙고 이목구비는 또렷하며 서구적으로 생겼다. 잘 생겼다.

레크리에이션이 끝나고 저녁 식사하러 줄을 서서 간다. 순서대로 앉다 보니 바로 옆 테이블에 그 잘 생긴 사람이 앉았다. 체크가 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뭘 해볼 생각은 전혀 없다. 또다시 쉽게 사랑에 빠져서 애끓는 힘든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런데 저녁 식탁이 왜 이리 고급스럽고 좋은가? 수련회 같은 데는 보통 줄을 서서 차례로 밥, 찬 몇 가지를 담아 먹는 것이 보통인데 여긴 고급스러운 식탁보와 음식도 직접 담아 오는 것이 아니라 코스요리처럼 서빙을 해주신다. 음식 하나하나가 어찌나 맛있는지. 마치 아주 귀한 대접을 받는 손님 느낌이다.

저녁 식사 후 저녁 예배를 드리고 오랜 시간 기도 시간을 가졌다. 목사님이 기도회가 끝나갈 때쯤 대표로 몇 명 자유롭게 기도를 부탁하셨다. 마음속에 강하게 기도하라는 푸시가 느껴졌다. 고향을 향한 기도를 거침없이 뿜어 냈다. 이후 이어서 많은 전도사님들이 기도하셨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도 기도가 멈춰지지가 않았다. 고향이 그리워서 아빠가 보고 싶어서.

모든 예배 시간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무도 말을 걸거나 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씻고 기도하며 잠이 든다. 씻고 돌아와 자기 전에 하늘을 향해 말을 걸었다. 기도하기 시작했다. 준비했던 말들이 다 끝나가는데 눈앞에 그 사람이 보인다. 잘생긴 그 사람. 체크가 됐던 그 사람.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마음에 다가온 그 아픔을 붙들고 한참을 울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그 사람 얼굴이 더 자주 느껴진다. 우연히 점심시간에는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같이 자리에 앉은 김에 서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다. 고향이며 이름 정도까지. 그분은 대홍단에서 왔단다. 이름은 한민. 말이 많은 편이 아니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다.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잠들기 전 하늘에 대화를 요청하는데 또 그 얼굴이 눈앞에 보인다. 마음이 뜨끔하다. 하나님 왜 오늘도 보여주시나요? 혹시 이분이 제가 기다리던 그분인가요? 하지만 하나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이성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많이 받아서요. 제가 적극적으로 할 수는 없어요. 만약 그분이 맞다면 내일 그분이 제 옆에 와서 앉으면 그분이 맞는 것으로 알게요.

다음날 아침 식사 후 레크리에이션 시간. 뱀꼬리 같이 긴 줄을 서서 차례대로 줄을 맞춰 앉는다. 그분은 저 뒤에 있다. 애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체크가 되어졌다. 내 순서가 되어 줄을 맞춰 앉았다. 물론 우린 거의 다 성인이니 얼마든지 스스로 줄을 맞춰 앉을 수 있지만 여기는 앉는 것도 안내해 주는 섬김 이가 있다. 내가 앉고 나서 그분은 내 옆에 한 자리를 비우고 다른 분을 앉혔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순서대로 앉는데 왜 한 자리를 비워 둔 거지?

그렇게 한 명씩 한 명씩 쭉쭉 자리를 앉는데 뒤를 슬쩍 보니 그분이 앉을 차례인 것 같다. 그분은 내가 앉은 뒷줄 맨 끝쯤에 앉을 것 같다.

"나는 여기에 앉아야겠다."

그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와 앉았다. 안내하는 분이 아무 관여를 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분이 내 옆에 와 앉았다. 어젯밤 내 기도 이렇게 빨리 이루어진다고? 너무 당황스럽다. 이렇게나 빠른 전개 무섭기까지 하다. 내 옆에 와 앉으면 그분인 줄 알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제대로 된 연애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이후를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까지 하나님과 나와 만의 이야기이니까. 이것만으로 그분의 마음도 나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다.

그렇게나 까다로웠던 나의 애정사. 이렇게 쉽게 풀린다고? 그럴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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