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잊게 해 주세요. 삭제하게 해 주세요.
사랑을 기대해 봐도 될까? 시작해도 될까? 이제야 나에게도 사랑이 오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나는데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다. 위암 직전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순간 수많은 생각이 지나간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엄마가 그렇게 아플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그동안 가정을 잃어버린 상실감, 아빠를 잃어버린 슬픔을 엄마에 대한 미움으로 쏟아부으며 살아왔다. 한마디로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의 이 미움 때문에 엄마가 그렇게 된 건 아닌지 무서워진다.
무작정 휴학을 쓰고 엄마 옆으로 올라갔다. 엄마는 고향에 두고 온 아빠에 대한 미안함을 이 남자에게 갚고 살고 있다. 마누라는 결혼 후 아기 낳고 집 나갔다. 그리고 그 어린 딸 하나 데리고 혼자 사는 이 남자를 보는 순간 두고 온 남편에게 못다 한 사랑을 부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아빠에 대한 나의 슬픔의 자리를 빼앗아 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나는 전혀 아빠의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떻게 이런 큰 병까지 왔을까? 엄마의 표정이 좋지가 않다. 단순히 아프고 피곤한 표정이 아니다. 엄마 옆의 그 남자가 말을 뗀다.
"그동안 애써 모은 돈. 나한테나 주지 참. 너네 엄마 4천만이라는 전 재산을 사기당했다. "
엄마의 얼굴이 다시 해석된다. 단순히 아프고 힘이 없는 얼굴이 아니다. 세상을 잃은 얼굴이며, 딸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심을 품은 얼굴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울지도 않는다. 그 얼굴 그대로 들지도 못하고 구석에 그저 앉아 있다. 어떻게든 공감하고 어떻게 살 수 있는 힘을 주고 싶다.
"이미 저지른 일을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 이제 훌훌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 엄마. 알았지?"
나의 말은 전혀 엄마에게 효과가 없어 보인다. 돈 때문에 얻은 상처 어떻게든 돕고 싶어서 휴학하고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처는 국가에서 받는 엄마 집으로 하면 되겠다고 결정했다. 지금 이곳은 서울 강서구 가야동이다. 가야 할 곳은 김포.
"엄마. 나 휴학했어. 돈 좀 벌려고. 휴학하는 동안 비어 있는 김포 집에서 살아도 되지?"
"그래. 그래라."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대학 준비 당시 다녔던 대안학교 졸업생 방에 올렸더니 오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졸업생들의 취업을 돕는 선생님이 일자리 소개를 해주셨다. 강남에 패밀리리 레스토랑 서빙 일이었다. 처음 하는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일했다. 꼬박 7개월을 힘들지만 다시 복학할 생각 하며 버텼다. 그리고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금전적 도움 주려고 하니 엄마가 허용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일해서 적금 통장에 700만 원을 채웠다.
엄마에게 문자와 사진이 와있다. 고향에 있던 이모가 생도강(아무 도움 없이 두만강을 건너 탈북)에 성공해서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고향 소식도 듣고 싶고, 이모도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엄마가 있는 서울 집으로 가서 문을 열었는데 어찌나 진지하게 이야기에 빠져 있는지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언니, 그때 언니 가구 나서 언니 첫사랑 그분 몇 번이나 찾아 왔댔소."
이건 무슨 소리지?
"그때 사실 같이 도강(두만강을 건너 탈북)하려고 했는데, 우리 금이 남겨 놓고 도저히 그렇게 못하겠더라"
엄마의 첫사랑. 그 명국동무는 엄마가 운명이었던 걸까? 엄마는...... 그 남자가 아닌 나를 선택했다. 이십 대의 꽃 같은 나이에 애틋했던 순정. 그토록 오래 간직했었구나. 그럼 우리 아빠는?
엄마의 고된 삶, 아픔. 그게 내 탓인 것 같아서 엄마에 대한 연민이 그 모든 미움을 덮었었는데. 우리 아빠는? 고향에서 남겨진 우리 아빠는? 결국 난 엄마가 원하지 않는 사랑의 열매였던 건가?
이모와 가볍게 인사 나누고 고향 이야기 듣고 가려고 했다. 근데 남겨진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이모. 우리가 오고 나서 아빠 어땠어?"
"한동안 미친 듯이 찾아다녔지. 근데 결국 안 되겠는지 망나니 같은 여자 만나서 허랑방탕하게 살더니.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가슴만 더 미어진다.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가슴에 돌덩이는 더 커지기만 했다. 아무 미련, 미안함도 없이 짐을 싸서 다시 대학교 기숙사로 내려왔다. 보고 싶은 아빠 사진 책상에 내려놓고 다시 공부 준비를 한다. 힘들게 일하고 나니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졌다. 공부가 원래 이렇게 재밌었나?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학년 1학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학점을 받았다.
시간은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는 새 학기가 또 찾아왔고 학기가 끝날 때쯤 공부에 대한 열정, 배터리가 다해갔다. 가슴속에 꽁꽁 숨겨놨던 돌덩어리가 머리를 쳐들었고 나라는 인간은 폐인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외로울 새 없이 옆을 지켜줬던 그 존재, 준홍이 오빠가 하늘처럼 커 보였다.
그리고 나의 뇌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무작정 고백하기로 결정했다. 무작정. 주말 영화 같이 보자고 약속 잡고 밥 먹고 오는 길에 고백했다.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도저히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 그 답만 남아 있을 뿐이다.
"너의 마음은 잘 알았어. 근데 우리는 오빠 동생 사이로만 지냈으면 좋겠어."
차인 것이다. 모든 것이 뜬금없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의 머릿속은 아니다. 첫 만남부터 오빠 고향 교회에서의 일들까지. 내가 고백하면 무조건 이뤄질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연민이었던 걸까? 이후 우리는 여전히 오빠 동생으로 잘 지냈다. 예전처럼 말이다. 고백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렇게라도 그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내가 언제까지 이 마음을 가지고 갈 수 있을까? 언제까지. 영혼 깊숙이까지 수분이 삐쩍 말라 갈 때쯤 그 사람은 졸업해 버렸다. 교회 청년부에서 인사하는데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서운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렇다고 대놓고 투정 부릴 수도 없고. 그때 나에게로 다가온다. 준홍이 오빠가.
"금이야. 오빠가 졸업해도 연락할 거지? 계속 전화하고 카톡 하고 지내자."
"네."
어떤 약속도, 고백도 아니지만 마음이 안심이 된다. 그 이후로 전화가 부쩍 많아졌다. 전화 한 번 하면 1시간, 2시간이 넘어가기도 했다. 같은 순의 순장 결혼식에 차를 운전해 왔다가 가는데 졸린다며 전화를 끊지 않는다. 그러면 뭐 하는가? 고백을 하지 않는데. 살아난 듯한 영혼은 다시 말라가기 시작했다. 마르다 못해 타 들어갈 때 하나님 앞에 도전장을 꺼내든다.
"하나님. 이 사람이 아니면 더 이상 생각나지 않게, 깨끗이 잊게 도와주세요."
오직 공부와 신앙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사랑, 연애? 남자? 깨끗이 잊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을 쑥쑥 흘러 보내고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두만강 인접 지역 단기 선교를 간다고 공지를 냈다. 무조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장에 모아 놓은 돈을 조금 꺼내 신청을 완료했다.
꽁꽁 얼어붙은 고향을 보며, 고향과 연결되어 있는 얼음을 만지며 통곡했다. 모든 원망과 후회를 다 쏟아붓고 돌아왔다. 내 안에 그 돌 찾을 수 없을 만큼 작아진 것 같다. 그때 삭제한 그 사람이 연락 왔다. 서울에 취직했다며, 첫 월급을 탔다며 밥을 산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고 하자 차라도 한잔 하자고 한다.
지방에서만 자라서 서울 지하철이 서툰, 쑥스러움이 많은 그 오빠가 저기서 걸어온다. 가까이 올 수록 이상한 냄새가 난다. 술 냄새다. 첫 회사에서 회식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마셨다고 한다. 서툴지만 자기가 예약한 카페로 나를 안내했다. 홍대에 핫한 카페였다. 테이블마다 예쁜 생화가 꽂혀 있었고 커플들이 쌍쌍이 앉아 있었다.
아메리카노와 차 한잔을 시켰다. 찻잔과 함께 나온 차 주전자에는 꽃이 둥둥 떠다녔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슨 말을 걸어왔도 단답 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앞에서 계속 무슨 말을 한다. 커피 한잔을 거의 다 마실 때쯤.
"나 곧 결혼할 거야."
"누구랑요?"
"함경도 여자랑. "
그러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숙인다.
"제가 모르는 함경도 여자가 따로 있어요? 결혼할 때 꼭 저 불러요. 축의금 할게요~"
구릿빛 얼굴이 까매진다. 그리고 뚝딱 거리며 짐을 챙긴다. 따라서 일어났고 긴말이 없이 곧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