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이끄는 그 운명 적 사랑. 그것이 시작된 걸까?
말한 적은 없지만 늘 내 마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25살에 결혼할 거야. 나는 백마 탄 왕자님이랑 결혼할 거야.'
자세한 이상형 같은 건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인생이 꼭 이렇게 되게 하려고 노력 같은 걸 하지는 않았다. 25살 되던 해 설날 나는 ‘올해에 결혼해야 하는데 남자 친구가 없다니’ 하며 한숨만 쉬었다. 무엇이 나를 25살에 백마 탄 왕자님과 결혼해야 한다고 속삭인 것일까? 그것은 설마 운명?
인생에서 제일 재밌는 이야기는 로맨스이다. 누구는 액션, 누구는 판타지이겠지만 나에게는 그렇다. 어려서 나는 아빠에게서 엄마를 쟁취한 사랑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밌었다. 적어도 몇십 번을 들었을 것이다. 로맨스이기 때문에 재밌었던 것이다. 아빠는 엄마가 "홍길동" 영화에 나오는 연화아가씨를 닮았다고 했다. 달밤에 홍길동을 기다리며 눈물 흘리는 연화아가씨를 보며 늘 엄마 생각을 했다고 했다.
엄마는 청진 시내에서 태어나 자랐다.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지만 미모가 빼어나 동네에서 인기가 자자 했다고 한다. 작은 이모들 친구들은 엄마를 보면 늘 배우 닮았다며 이모들과 친구 되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 미모에 어울리는 일을 하지는 못했다. 엄마 말로는 동생들 사이에 치우고, 늘 술 먹고 들어와 싸움 벌리는 아빠가 싫어서 집을 빨리 나가 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 졸업하자마자 돌격대에 지원하여 집 떠나 기숙사 생활을 했다고 한다.
...
돌격대. 그곳은 너무도 힘든 곳이다. 나라에서 힘든 공사를 할 때마다 동원되는 1순위가 돌격대이다. 예쁘게 생기면 뭐가 달랐을까? 달랐다. 예뻐서 엄마의 인생은 달랐다. 지휘관들의 사랑을 받아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미용 기술을 배워 돌격대 내 미용사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권력 있는 지휘관의 눈에 들어 가능했던 일이다.
그럼 그런 그녀의 로맨스, 그 로맨스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엄마는 지적이며 입이 무거운, 남자다운 사람을 좋아했다고 한다. 지적인 남자를 좋아하지만 엄마는 전혀 지적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돌격대 동기 중 가장 인기 있는 남자가 머리 깎으러 왔다. 입이 가볍지 않고, 무엇보다 잘 생겼다. 그러니 돌격대 내에서 많은 여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겠지. 이미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까? 이 남자는 머리 깎으러 오는 여기까지 책을 옆에 끼고 왔다. 지적인 남자인 게 분명하다. 이러니 인기가 없을 리가 없다.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더 멋지게 깎으려고 하니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머리는 왜 이렇게 잘 생겼는가? 어떻게 깎아도 멋있을 것 같다. 째깍째깍 가위 소리보다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여자가 체면이 있지, 먼저 마음을 들켜버려서는 절대 안 된다. 최대한 진정하고 얼굴 낯빛을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해야 한다.
'나는 너 보다 더 멋있는 남자를 많이 봤다.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계속 나 자신을 세뇌시키며 머리를 깎는다.
어느덧 머리를 다 깎았고 깨끗이 턴 다음 면도를 해준다. 그런데 너무 잘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실수를 해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면도하다가 조금 흔들렸을 뿐인데 살을 베였다. 피가 난다.
"괜찮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저~"
"네 말씀하세요."
"혹시 이 책 좋아하세요?"
"네 좋아합니다"
책 제목도 보지 않고 무조건 좋아한다고 해버렸다. 이 기회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보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은 무조건 이 책 다 읽고야 말 거야. 어떤 책도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없지만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다 읽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기숙사에 들어섰다. "세기와 더불어 1권"이었다. 학교에서 혁명활동, 혁명역사 과목을 통해 시험 보기 위한 목적으로 수령님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지만 회고록은 처음이다. 다 읽으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책이 두꺼워도 너무 두껍다. 오늘 저녁 다 읽을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스스륵 펼쳐본다. 생각보다 사진이나 지도도 꽤 있다. 책을 펼치면서 새삼 느끼지만 우리 수령님은 참 잘 생기셨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님이신 김형직 선생님도 참 잘 생기셨다. 명국 동무와 이야기를 나눌 때 할 이야기가 있으려면 기억에 남도록 일기장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언제인가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나라를 독립시키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내 몸이 찢기어 가루가 될지언정 일본 놈들과 싸워 이겨 야하겠습니다.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 세기와 더불어 1권 19-20p
왜놈들의 총칼에 수모받던 나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셨다니 너무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된다.
"네가 어려서부터 부모들을 따라다니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이제 다시 조선에 나가면 그보다 더 큰 고생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너를 조선에 내보내자고 결심하였다. 조선에서 태어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 네가 조선에 나가서 우리나라가 왜 망했는가 하는 것만 똑똑히 알아도 그것은 큰 소득이다. 고향에 나가서 우리 인민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걸 체험해 보아라. 그러면 네가 할 바를 잘 알게 될 것이다.
-세기와 더불어 1권 58p"
김형직 선생님께서는 소학교를 졸업하는 수령님께 천리길을 걸어 고향에 가라고 하신다. 12살 된 어린아이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천리길을 걸어서 가게 하다니. 이건 수령님이어서, 그 아버님이어서 가능했다고 본다.
책을 읽어가면서 처음으로 책에 빠져들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정말로 혁명적인 사람이구나를 느낀다. 앞으로 더 멋있는 사람이 될게 분명하다. 최대한 빨리 읽자. 그래야 더 빨리 이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초등학교 때 철봉에서 떨어진 이후 머리에 문제가 생겼는지 책은 5분만 읽으면 잠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잠도 안 오고, 심지어 너무 집중이 잘 된다. 이건 기적이다.
- 다음날
오늘 밤에 다시 만나자고 쪽지를 전달했다. 책을 다 읽지는 못했다. 사실 하룻밤에 다 읽겠다는 생각부터 잘못된 거였다. 하지만 그 동무 앞에서 시험 보는 것도 아니니 말할 수 있는 거리가 몇 개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서두르는 걸까? 이렇게 두꺼운 책을 하룻밤 사이에 다 읽었다고 하면 믿을까? 모르겠다. 이미 일은 저질렀다. 오늘 밤에 보기로.
유일하게 남자들을 볼 수 있는 데가 화장실이다. 작업을 하면서 마주치기는 어렵다. 남자들은 작업하러 가고 나는 이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작업이 끝난 후 취침 전 화장실 사용은 자유로우니 거기가 딱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밤이 딱이다. 오늘 밤 8시 반 화장실 뒤에서 간첩이 방책을 만나듯 나는 그 사람을 만날 것이다.
화장실 뒤 두 번째 큰 황철나무에 숨어서 기다린다. 캄캄해서 알아볼 수나 있을까 걱정이다. 괜한 걱정이었다. 하루 전에 내가 깎아 준 머리를 모를 리가 없다. 눈코입이 안 보이더라도 달빛에 머리 모양은 선명하다. 보기 드물게 잘 생긴 머리.
"옥미 동무"
"네!"
"하루 만에 다 읽기에는 책이 너무 두꺼웠죠?"
"아니요. 너무 재밌어서 금방 읽었는걸요. 수령님은 정말로 대단하신 분 같아요. 그 어리신 나이에 천리길을 걸으시다니요."
"배움의 천리길 말씀이시군요. 저는 수령님을 가르치신 김형직 선생님도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옥미 동무! 제가 내일 집에 갔다 오는데 혹시 필요한 게 있으세요?"
"아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쁜 연지(립스틱)나 피야스(파운데이션)를 갖다 주면 참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책은 사실 필요가 없다.
"네 알겠습니다. 혹시 내일 중에 못 올 수도 있으니 모래 이 시간에 다시 봐도 될까요?"
"네 "
"그럼 조심히 들어가 쉬세요."
"네. 명국 동무도요"
기숙사에 들어왔지만 잠이 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