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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Jun 30. 2023

아마추어 예술가, 오픈 마이크를 잡다

아마추어 뮤지션들의 공연, 거기에 내가 있다

동네에 비영리로 운영되는 작은 문화 공간이 있다. The Royal이라는 이름을 걸고 두 해 전쯤 문을 연 곳인데,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공연이 꾸준히 이어지는지, 사람들로 붐비는 것을 지나가다가 종종 보곤 했다. 뮤지션일 법한 사람들이 기타를 메고 그 앞을 오고 갔다. 곁눈질로 창 안을 흘끔 들여다보면서 어떤 곳인지 염탐을 하기도 했지만, 그게 다였다.  한번 들어가 보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곳은 괴리된 공간, 내가 침범할 수 없는 세계 같았다.


어젯밤, 그 세계에 문이 열렸다. 아니지, 문은 항상 열려있었으니, 그 문을 열고 들어갈 구실이 생겼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다. The Royal에서는 매주 수요일에 오픈 마이크 행사가 있다. 공연을 하고 싶은 예술가들은 누구나 무대에 설 수 있는 날이다. 딸의 친구 제이콥이 이 무대에서 밴드 공연을 한다며 딸을 초대했다. 미성년자인 딸을 혼자 보낼 수가 없어서, 딸의 동네친구까지 데리고 온 가족이 The Royal로 향했다. 넷이 경쾌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공상하고 있는 내가 멋쩍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드디어, The Royal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서늘한 곰팡이 냄새가 훅 하고 우리를 덮쳤다. 내부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다. 듬성듬성 놓인 테이블과 의자에는 뮤지션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곧 시작될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제이콥과 그의 밴드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남편과 나는 맥주를 주문한 후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좀 어색했지만, 이 미지의 세계가 생각보다 낯설지는 않았다. 온통 거무칙칙한 실내에서 작은 무대만은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궁색한 공간이었지만 음향 시설 하나만은 고급진지, 마이크 테스트를 하고 있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우아하게 들렸다. 틴에이저부터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뮤지션들을 흘끔거리며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열여섯 팀의 아마추어 뮤지션들, 그중에 제이콥의 공연은 열두 번째라 두 시간 넘게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두 시간 동안 다양한 뮤지션들의 공연을 봤다. 나이도, 스타일도, 실력도 각개 각색이었다. 클래식 기타 연주를 듣다가, 포크 송의 코믹한 멜로디와 가사에 웃었다. 랩송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전자기타의 울부짖음에 빨려들었다. 스탠드업코미디에 깔깔거리다가 장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노래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추어 뮤지션들의 공연을 차례차례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그들의 열정에 동화되어 신나고 즐겁기만 했었는데, 아마추어 뮤지션으로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무대 위에서 하나 둘 펼쳐지자 이들의 못다 이룬 꿈 떠올랐다. 틴에이저였던 소년은 음악이 좋아서 싸구려 기타를 장만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을 가서 자랑스러운데, 그런 아들은 대학에서 공부 말고 음악에 빠졌다, 음악으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직장을 구하고 아버지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사랑에 빠지고 가정을 꾸린다, 못다 이룬 꿈과 음악은 삶의 쓸쓸함을 달래는 취미로 남는다, 간혹 펍에서 공연을 펼칠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렇게 영원히 아마추어 뮤지션으로 산다.......  


한 사람의 공연이 끝나고 다음 공연을 기다리는 막간에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뮤지션들은 공연이 시작되면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집중했다. 작은 공간에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음악보다 관중들의 정적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진지하게 누군가의 노래를 듣고 있는 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 담겨있는 그들의 염원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진지한 삶들이 하나로 포개졌다.


제이콥의 밴드 공연이 시작되었다. 열네 살 틴에이저들의 연주 실력이 대단했다. 드럼, 전자기타와 베이스가 멋지게 조화를 이루며 마음을 쾅쾅 쳐댔다. 그러자 울적했던 마음이 다시 가뿐해졌다. 수줍어서 나와 남편의 눈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는 제이콥도 무대 위에서만은 카리스마 넘치는 뮤지션이었다. 연주를 하며 관객들을 둘러보는 폼이, 벌써 프로였다.


모험은 끝났다. 제이콥의 공연이 끝나자마자 문을 열고 현실 세계로 건너갔다. 상쾌한 공기에 기분이 맑아졌다. 딸은 어른들의 공연이 재미없어서 제이콥의 공연을 기다리기까지 지루했다며 한마디 하더니, 친구와 둘이 우리를 앞서 뛰어갔다. 틴에이저 소녀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그림자처럼 남아서 우리를 이끌었다. 현실에만 살고 있는 소녀들이 잠시 부러웠다. 공연 하나 보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오가며 이랬다 저랬다 착잡해하던 나의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미지의 세계에 문을 열고 들어 선 순간, 나는 나의 모습을 본 듯하다. 글을 쓰는 나는 그들처럼 '아마추어' 작가이다. 그들처럼, 나도 긴 세월 동안 글을 쓰겠다는 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마음 한편에 쟁여 둔 것이다. 잘 감추고 있다가,  원할 때면 '아마추어'라는 꼬리표를 달고 어느 동네의 무대에 선다. 관중의 비웃음이 두렵기도 하지만, 미친 척하며 비밀스런 마음을 쏟아낸다. 내 머리카락도 멋드러지게 노래하던 할아버지들처럼 언젠가는 백발이 될 텐데, 나 역시 그때까지 아마추어 작가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잠시 두려웠던 것 같다. 이름 한번 날려보지 못한 세상의 수많은 아마추어들이 오늘도 노래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졸작들이 태어났다가 먼지 속에 묻혀 꺼지지 않는 목숨을 연명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오늘 만든 졸작도 그럴 테다. 아마추어라서 부끄러운가? 내 삶이 하찮다고 생각되는가? 잠시 그랬던 것 같다. 기어코 살아서 목숨을 유지하는 그 끈질긴 생명력을 잠시 잊고 있었다.


The Royal의 문을 연 날, 그곳에서 만난 나를 기억하자. 나의 졸작을 누군가는 진지하게 경청할 것임을 명심하자. 꿈을 꾸는 세상의 모든 아마추어들에게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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