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쓰작

슬픈 선물

마음 속 선물 상자에서 오랜만에 꺼낸 곰 인형

by 검은별 Toni


수줍게 내민 갑작스러운 선물 앞에서 가슴 설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가족에게, 연인에게, 친구에게, 혹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게 선물 받고 감동해 하던 순간이 내게도 있다. ‘너를 좋아해’라는 마음이 담긴 선물을 고이고이 간직하기로 했는데 분명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현재 대부분의 선물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내 마음이 변한 건 절대 아닌데 도대체 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가 잃어버린 게 분명한데 저절로 소멸하기라도 한 것처럼 불가사의한 마음마저 든다.


그렇다고 선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만질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종적을 감춘 선물의 영혼이 내 마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파란 오르골 상자에서 흘러나오던 감성적인 멜로디, 손 위에 올려놓으면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던 은목걸이의 묵직함, 샘플용으로 제작된 미니 향수병에서 나던 달콤한 향기, 잿빛 하늘 아래 홀로 강렬하던 빨간 장미 한 송이 등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선물이 많다.


오랜만에 마음속 선물 상자를 한번 열어 본다. 상자를 열고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이었던 곰 인형을 꺼냈다. 내 키의 반쯤 되려나, 그래도 덩치는 나보다 커서 두 팔로 두르면 폭 안길 수 있어 좋아했던 선물이다. 곰 인형은 소파 베개로도 완벽했다. 푹신한 배의 각도가 누워서 TV 보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오래도록 나와 산 곰 인형은 태어난 딸에게도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선물 상자에서 꺼낸 곰 인형을 보니 토실토실하던 배가 꺼지고 보드랍던 털이 거칠게 뭉쳐 볼품없다. 세월의 흔적은 무생물도 피할 수 없나 보다. 곰 인형을 살포시 안아 봤다. 내가 풋풋했을 때, 그러니까 곰 인형이 처음 내게 왔을 때가 떠오른다. 곰 인형을 보내 준 W의 환한 미소가 되살아난다.


짝사랑을 칠 년이나 할 정도로 고지식하고 연애 젬병이었던 내게 W가 좋아한다고 고백해 왔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기로 작정했다. 이십 대 중후반을 넘기면서 위기의식이 느껴졌던 건지 나도 남들처럼 가벼운 연애를 해 보자는 생각에 W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이 없으면서 연애 고수인 척 행동했다. 6개월 후 한국을 떠날 W와 딱 재밌게 연애만 하고 마음을 깊이 내어주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두려울 게 별로 없었다. W는 나보다 여섯 살이 어렸는데 귀엽고 명랑하고 잘 놀면서도 성실했다. 같이 있으면 항상 편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가끔 바람기를 의심하게 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이별이 예정된 연애이니 그래도 상관없었다. W의 무한 애정 공세에 공주처럼 행복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내가 먼저 한국을 떠났다. 이별이 아주 슬프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떠난 지 이틀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나를 다시 만났을 때 W가 진지하게 자신의 가정사를 고백했다. W가 어렸을 때 아빠가 집을 나갔고 엄마는 자신을 방치했으며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녔다고 했다. 결국 아빠의 친구가 보다 못해 자신을 입양했는데 양부모님께서 정말 좋은 분들이라고 했다. 엄마 때문에 자신은 여자를 절대 믿지 않게 되었으며 결혼 역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를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고 했다. 나를 미국에 데려가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이 주 후 W가 예정대로 미국으로 떠났다. 집에서 몇 주 휴가를 보낸 후 다음 발령지인 아이슬란드로 떠날 계획이었다. W가 미국에 있는 동안 자주 전화로 이야기하면서 그리워했다. W의 부모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이때 W에 대한 나의 믿음은 반반이었던 것 같다. W의 약속은 믿지 않았지만, W의 진심 어린 고백이 내 마음을 움직인 건 분명했다. W가 곰 인형을 배편으로 보냈다고 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무척 슬펐던 게 기억난다.


W가 아이슬란드에서 군복무를 시작한 지 2달 만에 우리의 장거리 연애는 끝났다. 둘 다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상실감이 예상보다 컸다. 엄청 마음이 아프다가 나중에는 W를 의심하는 마음마저 생겨났다. 2달이면 배 타고 오고도 남았을 곰 인형은 깜깜무소식이었다. W가 정말 곰 인형을 보낸 게 맞나 의심스러웠다.


6개월 쯤 지날 무렵 곰 인형이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났다. W가 설명한 것처럼 밤색에 엄청 크고 귀엽고 폭신했다. 도대체 6개월 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이제야 도착한 것일까. ‘어떠한 시련이 있더라도 기필코 그녀에게 도착해 W의 사랑을 전하리라!’ 이런 사명감이라도 품은 것처럼, 그리고 그 임무를 드디어 해냈다는 표정으로 곰 인형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W가 보지 못한 내 삶을 곰 인형이 지켜봤다. 내가 고민할 때 옆에 있었다. 내가 이사할 때 같이 가 주었다. 내가 결혼하고 엄마가 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자신에게 무심해진 내 눈길, 거칠어진 내 손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내 옆을 지켰다. W는 그 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좋아하던 연인에서 낯선 타인이 된 우리 사이를 넘지 못할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힘없이 축 늘어진 곰 인형을 보며 ‘만약에’라고 가정해 본다. 만약에 말이야, 네가 6개월이 아니라 2개월 만에 내 앞에 나타났다면, 나는 W와 결혼하게 됐을까? 아니겠지, 물론. 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W와 나의 관계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해 본다.


곰 인형을 다시 선물 상자에 담는다. ‘너를 정말 좋아해’ W의 환한 얼굴과 목소리가 들린다. 안녕, 나의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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