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추억
노란 봉고차를 타고 앞산 아랫마을 여기저기를 돌았다. 작은 창밖으로 내다보던 거리가 어찌나 환했던지 아직도 그 광경이 눈앞에 생생하다. 곱게 물든 노란 은행잎이 하늘에도 땅에도 수북했다. 그 노란빛이 어찌나 예쁘던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성질 더러운 원장이,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내 현실인 봉고차 안에서 당장이라도 뛰어내리고 싶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닿을 수 없는 창문 밖 노란 세상이 아프도록 아름다웠다.
호주에서 돌아왔을 때 미술학원에서 5개월가량 일한 적이 있다. 마땅한 직장을 구할 수가 없어 임시방편으로 취업한 곳이었다. 그 시절에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지금처럼 많던 시절이 아니었던지라 미술학원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면접 볼 때는 이런 정황을 몰랐다. 무슨 학원이 오전부터 문을 여나 했는데, 알고 봤더니 미술학원이라기보다는 유아 돌봄 시설에 가까웠던 것이다.
오전 9시에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식사 준비였다. 원생들이 반찬만 싸 오기 때문에 밥과 국을 만들어야 했다. 주임 선생님의 지시대로 국이나 카레, 짜장 등을 요리했다. 밍밍하기 짝이 없는 이 음식을 나도 같이 먹었다. 재료를 아끼고 간이 심심한 음식이 맛있을 리가 없지만, 배가 고프니 그냥 먹게 되었다. 맛을 따질 줄 모르는 아이들도 불평 없이 잘 먹었다.
미술활동 1시간, 식사 시간 30분가량을 제외하면 아이들이 대부분 자유롭게 놀았다. 이른 오후 유아들이 집에 돌아가고 나면 초등학생들이 와서 미술 활동을 했다. 유아들 중 몇몇은 오후 5시까지 미술학원에 머물러야 했는데 거의 방치 수준이었다.
내향적이고 조용한 시간이 필요한 내게는 하루 종일 시끄럽고 정신없는 공간에 노출되어 있는 게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초원에서 뛰어노는 동물과도 같았다. 우르르 정신없이 몰려다니고, 어지르고, 고함지르고, 쉴 새 없이 노는 흥분상태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아이들을 진정시키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다혈질 남자 원장이 주임 선생님께 불같이 화내는 걸 자주 목격해서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이때 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결혼해서 엄마가 되면 절대 내 아이를 사설기관에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종일반 아이들이 하루 종일 소음에 노출되어 정신없이 보내는 게 왜 그렇게 안타까웠을까. 어쩌면 아이들은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낙엽이 다 지고 찬바람에 볼이 시릴 때까지도 미술학원 일을 관두지 않았다. 내가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불쑥 들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묵묵히 일했다. 내가 있는 현실이 진짜인가 헷갈리면서 가끔 멍해졌지만, 퇴근 시간이 있으니 견딜 만했다.
환하고 고운 노란 은행잎이 눈처럼 소복이 내리던 그 가을에, 내가 결심했던 것처럼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내 신념이 옳은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면서, 자라는 아이 곁을 가만히 지켜주는 엄마가 되었다. 혼자서 사부작사부작 놀 수 있는 조용한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 주며 흐뭇해했다. 놀고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내가 모자라는 엄마라는 생각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내 품을 떠날 날도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다. 노란 은행잎이 세 번 지고 나면 아이는 내 손이 닿지 않을 세상으로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원하는 현실에 두 발 단단히 디디고 즐겁게 살기를 바란다,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