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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Mar 25. 2022

집시락

단편소설

  사람들이 계속해서 좁은 공간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 뒤에서 춤을 추고 있던 진석은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술만 홀짝거리며 앉아있다고 핀잔을 주더니, 무리와 어울려 한바탕 신이 난 모양이었다. 김 빠진 술은 맛이 없었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무료하게 술잔을 드는데, 바에 빙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둘씩 의자 위로 올라섰다. 혼자 앉아있는 나는 외톨이가 되어 어쩔 줄 몰랐다. 그때 누군가가 내 팔을 힘껏 잡아당겼다. 나는 그 위력에 이끌려 눈 깜작할 사이에 의자 위로 올라섰다. 그때부터였다.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밧줄에 꽁꽁 묶인 것처럼 경직되어있던 몸이 활기차게 요동쳤다. 괴성을 지르고 손수건을 흔들며 사람들과 어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외톨이였던 나는 무리와 한 몸뚱이로 뒤섞였다.

  나를 끌어당겼던 손은 뜻밖에도 외국인이었다. 눈이 유난히 크고, 까맣고, 초롱초롱한 소년이었다. 스무 살은 되었을까. 동양인과 백인은 물론이고 흑인의 피까지 흐르고 있을 법한, 꽤 독특한 얼굴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들어대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소년의 얼굴 위에 송골송골 맷힌 땀방울이 조명 아래에서 반짝였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외국인, 내국인 할 것 없이 서로 뒤섞여, 비좁은 공간과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데, 저 멀리서 다케의 환영이 보였다.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고 있는 다케, 음악에 홀린 다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다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소년이 내가 들고 있던 손수건을 낚아채는 순간 다케의 환영이 사라져 버렸다. 낚아챈 손수건을 높이 치켜들고는 나를 향해 활짝 웃는 소년에게서 나는 다시 손수건을 가로챘다. 소년의 이마에는 여전히 땀방울이 생글생글 맺혀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손수건으로 소년의 이마를 콕콕 누르며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조금 웃었던 것도 같다. 나의 행동에 머쓱해져서 다시 다케가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다케의 얼굴이 희미하게 살아나는 것 같더니, 곧 유령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소년은 여전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신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누구라도 신이 나게 할 그 에너지를 전해 받고 나도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댔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의자에서 내려와 식은 맥주로 목을 축였다. 소년이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소년은 호기심 가득한 커다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눈길을 마주했다. 그때 사라졌던 진석이 불쑥 끼어들어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얘한테 관심 있어?"

  "응. 혹시 네가 남자 친구인 거니?"

  "나? 아니. 얘, 남자 친구 없으니까 잘해봐."

  진석이 실실 웃으며 다시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난 윌이라고 해."

  소년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나도 손을 내밀자,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내 손을 낚아채고 흔들어댔다.

  "난 유나."

  "안녕, 유나. 넌 손이 참 작구나."

  소년은 자신의 손안에 폭 감싸 안긴 나의 손을 신기한 듯 내려다봤다. 나도 두 개의 마주 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참 따뜻했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울컥 올라왔다. 그래서 슬그머니 손을 뺐다.

  "여행 온 거니? 어느 나라에서 왔어?"

  별에서 떨어진 것 같은 이 귀여운 소년의 정체를 알아야 할 때였다.

  "여행은 아니고, 미국 공군 소속이야. 한국에 온 지 일 년 반 정도 되었어."

  소년의 목소리는 외모와는 달리 살짝 허스키한 게 매력적이었다.

  "윌, 우린 지금 베이스로 돌아갈 건데, 넌 어떻게 할 거야?"

  소년의 일행이 다가와서 물었다.

  "유나, 무척 아쉽지만, 난 이제 돌아가야겠어. 다시 만나고 싶은데,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

  소년은 거절이란 걸 당해본 적이 없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데이트 신청을 했다. 나중에 내 나이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는 당황해할 모습을 상상해보니 웃음이 났다. 그래서 미지의 소년에게 흔쾌히 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호주에서 돌아온 지 어느덧 이 개월이 지났다. 똑같은 머리 모양의 여자들에, 희뿌연 하늘에,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은 차들의 위협에 익숙해져 가는 것과 동시에 두려움이 차츰 커져 갔다. 내가 이국땅에서  묻히고 들어온 자유와 열정, 젊음의 흔적들이 빛의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자신만만했었다. 그것들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점차 내 몸에서 열기가 빠져나가고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내 몸의 자유가 조금씩 지워지면서 자신감도 함께 사그라들고 있었다.

  먼 이국땅에서 사람들은 내게 매력적이라고 칭찬했고, 내 생각들에 공감해주었다. 나이와 외모, 언어와 인종 따위는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런 상냥한 친절과 진심 어린 공감을 얻는 게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마냥 신기했고, 그들 말대로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나 자신이 사랑스럽게 여겨졌었는데, 지금, 여기 이 땅에서, 나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외모와 학벌, 배경과 재력이 중요시되는 이곳에서, 나는, 스물아홉 살의 예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딱한 잉여인간일 뿐이었다. 사람들과 맞추어가야 할 것 같은 위기의식이 들어서 결국 미술 학원 강사라는 일자리를 구했다. 완고했던 자존감이 서서히 무너지고 불행이 엄습해왔다.

  이런 찰나에 '집시락'이라는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는 공간을 발견한 것은 큰 위안이었다. 집시락은 호주의 펍과 닮아 있었다. 다양한 인종이 있고, 음악이 있고, 춤이 있었다. 그런 곳에 존재할 법한 헌팅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집시락이 나를 사로잡았던 건 그런 외양적인 모습들이 아니라, 바로 '자유'라는 이미지였다. 미친 척해도 아무도 개의치 않는 무심함이 집시락이라는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집시락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소년의 눈동자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미친 듯이 날뛰며 맛보았던 육체의 해방감이 낯선 여운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내 몸 어딘 가에도 그런 생생한 에너지가 숨겨져 있었다니 놀랍기만 했다. 대단한 발견이자 충격이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큰 대 자로 뻗은 몸에는 요만큼의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낯설게만 여겨지는 내 몸을 한번 꿈틀거려 보고는 눈을 감았다. 사방이 고요하기만 한데, 지잉, 징, 정수리에서 굉음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소리에 민감한 내 귀는 시끄러운 곳만 다녀오면 이렇게 혹사를 당했다. 눈을 다시 떴다. 지잉, 징,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오고, 암흑 속에서 수많은 동그라미들이 이리저리 떠다녔다. 동그라미들이 천천히 춤을 추다가 하나로 뭉쳐지더니 익숙한 얼굴로 변했다.

  공중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다케의 얼굴. 다케가 고개를 살짝 내린 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를 향해 수줍게 웃었다.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카와이'라고 말했다. 나를 환하게 바라보며 그저 바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기만 했다.

  주위가 환해졌다. 까맣고 탄탄한 다케의 상체가 햇볕에 반짝였다. 진지한 얼굴로 파도를 살피더니 파도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서핑 보드 위에 우뚝 서서 멋지게 파도를 타다가 곧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케는 바다를 등지고 성큼성큼 나를 향해 달려왔다. 물결치는 머리카락에도, 까만 얼굴에도 물방울이 싱싱하게 맺혀 있었다. 그 순간 다케의 왼쪽 팔뚝에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파도 문신과 저 멀리서 굽이치는 파도가 하나로 겹쳐졌다. 다케는 또다시 환하게 웃었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 다케의 반짝이는 얼굴을 만져보았다. 나에게 이런 환한 미소를 지어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다케의 환한 미소가 내 얼굴에 가득 쏟아져 내렸다. 가슴이 벅찼다.

  파도가 사라지지 밥 말리의 노래가 들려왔다. 시드니 센트럴 역 근처의 어느 후미진 골목에 있던 레게 클럽에 내가 앉아 있었다. 어둑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에 다케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디제잉을 하고 있는 다케의 모습이 진지해 보였다. 밥 말리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노래에 홀린 것처럼 무대 위로 하나둘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두 손을 높이 들고 물결을 만들었다. 꽃잎처럼 하늘거리던 손들 중 하나가 라이터에 불을 켜고 리듬을 타기 시작하자, 어느새 무대는 불꽃으로 가득했다. 파도처럼 일렁이던 불꽃 속에서 나의 얼굴은 환했다. 멀리서 나를 바라보던 다케의 얼굴은 더 환했다.

  지잉, 징. 지잉, 징. 다시 시작된 굉음에 밥 말리의 노래가 사라지자, 다케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이 같은 마음을 품고 살 거야. 즐거우면 마냥 웃고, 화가 나면 마구 신경질 부리고, 그렇게 아이처럼 말이야. 이게 바로 나의 인생관이야.' 나를 타이르는 다케의 목소리도 들렸다. '넌 생각을 너무 많이 해. 뭐가 그렇게 복잡하니? 그냥 넌 지금 잘하고 있어.' 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다케는 말했었다. '널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유나, 계획은 언제나 바뀌는 거야. 그냥, 너의 계획에 나를 추가하면 되는 거야. 대답해봐. 내가 싫은 거니?'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다케의 다정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오자 스르르 잠이 왔다.


  소년을 만나기로 했다. 그날 집시락에서 본 후 일주일 만이었다. 그 사이 소년은 매일 전화를 해댔다. 짧은 통화라, 딱히 부담되지 않았다. 겨우 단어 몇 개 나열하여 문장 같지도 않은 문장을 만드는 나의 서툰 영어 실력도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 소년의 나이가 어려서였을까. 연애나 하자고 찔러보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받아 주었다. 한 고지식하는 내가 자유연애에 발이라도 담그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 통화를 할 때 소년은 타일랜드계의 미국 국적을 가진 스물세 살 성실한 공군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복무와 더불어 온라인으로 학사 과정을 공부하는 중이라며, 군인이지만 엘리트라고 우쭐대며 말했다.

  소년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맥도널드 앞이었다. 번잡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년의 얼굴은 금세 눈에 띄었다. 그 큰 눈이 과연 나를 알아볼까 싶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가버릴까 고민하며 발걸음을 주저하고 있을 때, 소년이 나를 알아보고 손짓했다. 단정한 베이지색 재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일주일 전과는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소년과의 데이트는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그냥 그런 데이트였다. 상대방이 싫어서 부담스러운 것도, 상대방이 좋아서 긴장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편안한 것도 아닌, 그냥 그런 데이트였다.

  지하철역에서 헤어질 때 소년은 사진 몇 장을 건네주었다. 지난번 집시락에서 찍었던 사진들이었다.

  "유나, 너 참 예뻐. 사진 좀 봐봐."

  사진 속에서 앙증맞은 표정의 진석과 내가 나란히 웃고 있었다. 의자에 올라선 소년 옆에 서서 내가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고 있었다. 소년과 다정하게 어깨동무까지 하고 있었다.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내가 낯설어 보였다.

  "정말? 고마워. 행복해 보여, 내가."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유나."

  이 느끼한 멘트 한 마디에, 순진한 얼굴을 한 이 소년이 플레이보이일 것 같다는 심증이 싹트기 시작했다.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때마침 지하철이 도착했다.

  "오늘 즐거웠어. 고마워. 잘 가, 윌."

  "잘 가, 베이비."

  베이비라는 생뚱맞은 호칭에 어리둥절해졌다. '잘 가, 별에서 온 수상한 보이!' 나를 태운 지하철이 출발하자 소년은 제멋대로 자기 별로 사라졌다.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고 나서 소년은 내게 친한 척을 해왔다. 밤마다 전화가 걸려왔고, 좀처럼 전화를 끊으려고 하지 않았다. '예쁘다'를 연발하며 계속해서 '베이비'라고 제 멋대로 불러댔다. 며칠 동안 무반응의 태도로 나아가다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좀 진지하게 대꾸했다.

  "윌, 난 너의 베이비가 아니니까, 더 이상 베이비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 그래, 유나?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무 일도 없어. 전화도 매일 받는 게 부담스러워. 내가 너의 여자 친구도 아니고."

  "그래, 알아. 그렇지만 난 네가 좋아. 사랑스러워."

  "겨우 두 번 봤는데, 나의 어디가 그렇게 좋다는 거니? 너, 플레이보이야? 한국 여자애들 꼬시고 싶으면 나이 어린애들로 골라. 나 말고."

  "유나, 나 플레이보이 아니야. 나는 그냥 네가 좋아. 두 번, 아니,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어. 네 눈빛이 좋아. 네 미소가 좋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그렇지만, 난 너랑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어.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그러니?"

  "나이가 뭐가 중요해? 나랑 비슷한 거 아냐?"

  "아니야. 나 스물아홉. 한국어로 '누나' 알지? 내가 너한테 한참 누나라고!"

  "와, 누나였어? 누나! 나한테도 그 누나가 생겼네. 하하하!"

  소년은 실망하기는커녕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누나!"

  "누나!"

  소년이 천연덕스럽게 부르며 장난을 쳤다.

  "나는 네 누나도 아니거든. 이제 좀 그만 하지?"

  "알았어. 어쨌든, 난 네가 정말 좋아, 유나."

  "나 지금 바쁘니까 전화 끊자."

  "좋아. 잘 자, 베이비."

  "안녕."

  어처구니없이 활발한 이 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처했다. 그래도 거침없는 소년의 애정 공세가 내심 싫지는 않았다. 학원 일에 적응하느라 하루하루가 고단한데, 소년의 긍정 에너지가 피로를 날려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역시 철없는 플레이보이일 거라는 의심은 버릴 수 없었다.

  다음 날 밤도 소년은 태연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유나, 오늘 하루 어땠어?"

  "뭐, 그냥 그랬어."

  "유나, 내가 어젯밤에 전화를 끊고 나서 널 위해 한 게 있지."

  그 밤에 도대체 날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을까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우리 베이비를 위해서 랩을 썼다는 거 아니야!"

  "뭐? 랩?"

  "응. 궁금하지? 들려줄까?"

  요즘 아이들은 연애편지 대신 랩을 쓰는 모양이었다.

  "그래. 궁금해."

  소년이 비트도 없이 랩을 읊기 시작했다.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달달하고 상냥하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대충 너에게 빠져들고 있어, 뭐 이런 사랑 노래였다.

  "어때, 베이비? 감동 좀 했어?"

  "너, 랩 좀 하는구나? 목소리가 참 좋아."

  "하하, 내가 랩 좀 하지. 다음에도 멋진 랩 하나 자작해서 들려줄 테니, 기대해."

  나를 찬양하며 나를 위해 손수 랩을 지어주는데, 살짝 감동적이긴 했다. 여섯 살이나 많은 나이를 상기시켜주어도 변함없이 애정공세를 펴는 소년이 참 귀여웠다. 제멋대로인 소년 앞에서 나도 좀 제멋대로 굴고 싶어졌다.


  집사락에 이 주 만에 다시 갔다. 저녁 무렵의 꽤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찬찬히 집시락 내부를 둘러봤다. 나무로 만들어진 바, 테이블과 의자들은 키가 컸고, 온몸에 문신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겨 놓았을 글자들은 서로 뒤엉켜 정체성을 잃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내부에는 조명도 별로 없었다. 벽에는 밥 말리의 사진과  맥주 광고 포스터 몇 장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게 전부였다. 집시락은 한마디로 짓다가 버려져서 아무도 모르는 지하 공간 같았다. 대충 멋을 내고,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히 편안한 이곳에서는 오늘도 듣기 좋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문득 '가쵸 딜로'가 떠올랐다. 집시를 소재로 한 프랑스 영화였는데, 신선하고 강렬했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유를 찾아 유랑하는 집시들은 배타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영화 속 집시들의 삶은 참으로 따뜻했다. 무엇보다 나의 뇌리에 꽂힌 것은 집시 여인의 얼굴이었다. 도발적이고 강렬한 검은 눈동자, 도톰하고 붉은 입술, 육감적인 몸매, 금방이라도 화면에서 튀어나올 것 같던 그 여인의 생명력을 잊을 수가 없다. 눈물을 흘리며 구슬프게 노래를 부르던 여인의 모습에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팠던지 지금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나도 그 여자처럼 살고 싶었던 걸까. 내 안의 생명력을 과감하게 분출하며, 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삶. 그런 삶은 정말 어떤 것일까.

  내가 집시 여인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에도 옆자리에 앉은 진석의 뉴욕 타령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진석은 내가 호주에 가 있는 동안 뉴욕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호주를 그리워하며 끙끙거리고 있는 나에 비하자면 진석의 증상은 중증이었다. 진석은 누구를 만나건 어느 자리에서건 뉴욕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댔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고는 입을 닫았다. 아무도 내가 있었던 장소, 내가 겪은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왜 진석은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제발 좀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오늘 진석의 뉴욕 예찬은 극에 달했다.

  음악에만 집중하려고 애를 쓰며 집시락의 창조자에게 눈을 돌렸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허름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 별로 특별할 게 없지만 제법 멋져 보였다. 귀걸이가 조명에 반짝였다. 발에는 발씨를 하고 있었다. 발찌를 보다 다시 가슴이 싸해졌다. 발찌를 하고 다니던 수많은 배낭족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발들이 딛고 다녔을 후끈한 땅이 떠올랐다. 그 후끈한 땅이 내뿜는 지열이 잠깐 내 발을 달구는 것 같았다. 창조자의 얼굴은 얼핏 동안으로 보였지만, 연륜이 느껴졌다. 집시락이라는 이 공간과 잘 맞아떨어지는 얼굴이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집시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궁금했다. 가쵸딜로에 대해 아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옆에 앉은 진석의 말을 끊기가 곤란해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진석이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방감에 기지개를 쭉 켜다가 창조자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나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가쵸 딜로에 대해서 아는지, 왜 집시락이라고 가게 이름을 지었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었지만 관뒀다. 올라오는 호기심을 꿀꺽 삼켜버렸다.

  갑자기 밥 말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레게 음악이 넘쳐나는 이곳을 다케는 분명 좋아했겠지. 다케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울적해진 기분을 털어내려고 다시 한번 집시락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한 외국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향해 싱긋 웃음을 날리더니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타국의 여행길에서 마주칠 법한 외양을 하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제프였다. 제프는 귀에 한 피어싱과 종아리를 뒤덮은 문신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냥 한번 웃어주고 말았다. 그런데 제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흠칫 놀랐다. 요란한 겉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선한 얼굴이었다. 제프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진석이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진석의 넋두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취하고 떠들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좁은 공간이 예전처럼 사람들로 가득 찼다. 메케한 담배 연기가 어지러울 만큼 가득했다. 그에 질세라 음악 소리도 커지고, 조금 전까지 누렸던 아늑함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다시 한번 찬찬히 사람들을 둘러봤다. 짧은 머리, 헐렁한 티셔츠 차림의 미군들과 그들보다 좀 더 자유롭고 수다스러워 보이는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즐거워 보였다. 옷차림이나 행동이 제법 자유분방한, 국적이 의심스러운 한국인들도 많았다. 공기는 점점 달구어지고, 사람들은 점점 흥분하고, 모든 것이 절정을 향해 미쳐갔다. 그때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데낄라를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돌아봤는데,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지난번 나에게 '하이'라고 인사를 건넨 적이 있던 남자였다.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번에도 '하이'라고 인사를 했다. 나도 따라서 '하이'라고 대답하는 순간, 남자가 데낄라를 내 바지 위로 쏟고 말았다.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경쾌한 남자의 얼굴에서 미안한 기색을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다시 데낄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 한번 만나고 싶은데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어?"

  "나를 만나고 싶다면, 여기서 다시 만나. 나 여기 가끔 오니까. 다음번에 마주칠 때 내 얼굴을 기억한다면, 그때 전화번호를 말해줄게."

  "좋아. 그럼 재미있게 놀아."

  그렇게 말하고 가버린 뒤 얼마 안 있어 남자가 다시 나에게로 다가왔다. 잠깐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신선한 공기도 마실 겸 남자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집시락 주변에는 열기를 식히려고 나온 사람들이 듬성듬성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남자가 자기소개를 했다.

  "난 아일랜드에서 왔어. 여기까지 육로를 통해 왔지. 북유럽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몽고와 중국을 지나 여기까지 온 거야. 몽고의 고비 사막도 끝내줬고, 베이징도 정말 근사하더라. 사실 한국에 잠시 여행하려고 온 건데 여기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어. 지금 울산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내일 여기에 있는 학원에서 면접을 보기로 되어 있어. 울산은 정말 따분하거든."

  남자의 말에 솔깃했다. 육로를 통해 이곳까지 왔다니!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육로를 통해서 유럽으로 갈 수 있단 말이지? 몽골에서 사막도 볼 수 있다고? 모래사막 보는 게 내 소원이야."

  "물론이지. 너도 여행을 좋아하는구나? 내 웹페이지 한번 구경해봐.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까."

  남자가 웹페이지 주소를 적어 주었다. 보물이라도 되는 냥 종이를 손에 꼭 쥐었다.

  "너 내 여자 친구가 되어 주지 않을래?"

  "뭐라고?"

  "왜? 싫어? 난 네가 좋아."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아무것도 모르잖아."

  내 얼굴이 외국인한테만 먹히는 얼굴인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지금부터 알아 가면 되는 거 아냐?"

  "난 잘 알기 전에는 아무나 하고 사귀지 않아."

  "좋아. 그럼 뭐가 알고 싶은데?"

  "음. 글쎄......."

  무엇이 알고 싶은 것일까? 건장한 체격, 호감 가는 얼굴, 밝은 미소, 친절과 유머. 이 정도면 남자 친구로 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데, 도대체 무엇이 더 알고 싶은 것일까. 무엇을 담보로 잡고 싶은 것일까.

  살짝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남자의 갈색 곱슬머리를 간질이더니, 내 긴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이 바람은 바다를 거너 중국 대륙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몽골 사막에 다다라서는 거대한 모래바람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남자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사막을 보았을 그 눈을, 붉은 태양을 담았을 그 눈을. 그러나 어디에도 사막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단정하고 그윽하기만 했다.

  다시 집시락으로 내려갔다. 진석과 제프가 함박웃음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 집시락이 좋았다. 함박꽃이 좋았다. 술은 사람들을 함박꽃으로 만들었다. 함박꽃 밭에서는 나 역시 한 송이 함박꽃이었다. 많은 함박꽃들이 음악에 맞춰 한들거리고 있었다. 많은 함박꽃들이 알코올을 꿀꺽꿀꺽 들이키고 있었다. 많은 함박꽃들이 담배 연기를 후 내뿜고 있었다. 산소가 모자라도 시들 기미가 전혀 없는 수많은 함박꽃들 사이에서 캑캑 숨이 막혔다. 나는 진석에게 집에 가자고 말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바깥에서 진석을 기다리며 숨을 깊이 들이켰다. 내 몸 구석구석 파고든 담배 연기를 한방에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섬유 한 올 한 올에 미세하게 달라붙어 있는 담배 연기를 코로 확인하자니, 조금 전의 감흥들이 싹 사라졌다. 곧 진석과 제프 일행이 보였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 다음에 또 봐, 제프."

  제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떠나려는데, 그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벌써 가려는 거야? 파티는 이제 시작인 걸?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모두 함께 가. 음악 들으면서 한 잔 더 해."

  진석은 기분이 좋아 보였고, 함께 가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좀 피곤하니까 빠질게. 다음에 또 봐, 제프."

  술기운이 싹 사라지고 나니 정말로 피로가 몰려왔다.

  "모두들 나를 싫어해.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제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천진난만하던 웃음을 거둔 얼굴이 너무나 슬퍼 보여서, 단호했던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아니야. 네가 싫어서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음, 그럼 같이 가. 대신 오래 머물지는 못할 거야."

  제프는 부유한 주택가의 한 이층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이층 난간에서 한 여인이 팔짱을 끼고 서서 우리를 내려다봤다.

  "신경 쓰지 마. 우리 엄마야."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안으로 사라졌다.

  집 이층 전체가 제프가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모두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데 다들 편안해 보였다. 이미 술이 깬 상태라 나에게는 맥주가 쓰기만 했다. 제프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미국 군인, 어머니는 한국인. 미국에서 자랐고, 뜸하게 한국을 다녀간다고 했다.

  "몇 년 전에는 여자 친구랑 일 년 정도 가출을 해서 함께 산 적이 있었어. 약을 팔면서 생활했었지. 그땐 정말 재미있었는데 말이야......."

  제프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내뱉을 때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여인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제프의 귀가를 확인하고는 조용히 사라졌는지 조금 짐작이 갔다. 제프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위험해 보이는 과거사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해맑게 웃을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한계가 느껴지면서 기분이 조금 울적해졌다.

잠시 자리를 비우는가 싶더니, 제프가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제프의 친구들은 기다리던 것이 왔다는 듯 입맛 다시는 표정이었고, 진석은 조금 경계하는 눈으로 그 물건을 바라봤다. 나는 잠깐 놀랐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프가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대마초를 조금 꺼내서 불을 붙였다.

  진석이 제프에게 물었다.

  "너 이거 여기에선 불법인 거 알고 있지?"

  "물론이야."

  "도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하는 거야?"

  "미군 친구 녀석이 있어. 그 녀석에게서 매주 정기적으로 구입해."

  제프를 시작으로 해서 한 모금씩 대마초를 나누어 피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물끄러미 구경만 했다. 도대체 호주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한국에서 어떠한 경로로 대마초가 유통될 수 있는지 신기했다. 대마초가 호들갑을 떨 만큼 위험한 게 아니란 걸 알지만, 대마초를 피면 큰 뉴스거리가 되는 한국에서 대마초를 피는 일행들과 함께 하게 된 우연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대마초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안개 같은 연기가 고요한 새벽을 잠식하고, 시간은 죽은 듯이 흘러갔다. 나는 느린 비트의 음악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미국 어느 뒷골목에서 마약 딜러를 하던 아이와 나란히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내가 있는 이 공간이 도대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한 시간 가량 그렇게 죽은 시간 안에 머문 후 나는 먼저 자리를 빠져나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긴 여행을 다녀온 듯한 하루였다.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대륙을 가로질러 왔다는 호탕한 유럽인의 얼굴이, 집시락 창조자의 발찌가, 제프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차례로 떠오르더니, 어김없이 다케의 얼굴이 나타났다. 다케의 어깨에 새겨진 파도 문신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들 모두, 내가 한 번도 발 디뎌 본 적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 세상은 단순 명료하고 즐거워만 보인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 어디인 줄도 모르는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떨어진 이곳에는 유혹도 없고, 생소한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잉, 징. 지잉, 징. 귓속이 서서히 울려대기 시작한다. 저 멀리서 밥 말리의 노래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노랫소리를 따라 주문을 외워본다.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다. 괜. 찮. 아. 질. 거. 야. 소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소년을 만나기로 하자. 내게 손톱만큼 남아 있는 자유와 열정이 모조리 사라지기 전에 소년을 만나자. 소년이 가지고 있는 젊음과 열정을 조금씩 갉아먹자. 내 심장을 채우자. 그럼, 나만 사는 이 세상에서 조금은 덜 외롭겠지. 심장이 뜨거워지면 다시 길을 나서는 거야.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세상이 저 멀리서 손짓한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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