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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Jun 14. 2023

글쓰기는 미루고 책으로 도망가다

1984, 불안의 책, 해녀들의 섬

오전에 아침을 먹으며 조지오웰의 <1984>를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배우 이태란 님의 목소리가 책의 분위기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윈스턴이 드디어 오브라이언을 만나면서 책이 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책의 중반부에 다다르기까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독재 세상의 처참한 분위기만 묘사되고 있던 터라 슬슬 실망감이 몰려오기 시작했었는데, 다시 기대감이 귀가 쫑긋해졌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어제 전자책으로 구매한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펼쳤다. 이태란 님의 낭독이 너무 좋아서, 나도 내 목소리를 녹음해 보기로 했다. 한 문장씩 읽어나갔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발음이 어눌하게 새어나갔다. 나의 구강구조에 문제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영어도 바보처럼 어눌하지만, 한국말조차 부정확하기 짝이 없다니, 이러다가 정말로 바보가 되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목소리는 더 가라앉혀서 다시 낭독을 해봤다. 수년간 아주 낭랑한 목소리를 맛깔스럽게 그림책을 읽어 주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낭독을 때려치우고, 그냥 책읽기에 집중했다.


<불안의 책>은 블로그에서 다른 책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나도 모르게 바로 구매 버튼을 눌려버렸다. 첫 몇 장을 읽은 느낌은, 정크 더미에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강렬했다. 여러 자아가 쓴 에세이 모음집, 첫 번째로 등장한 자아는 글 쓰는 회계사. 그의 사색과 감상, 두서없는 넋두리가 이어지는데, 표현이 참신하고 아름다웠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거기에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위로받는 느낌도 들었다. 지적이면서 창의적이고, 냉철하면서 감성적인 문장들이 미치도록 좋았다. 계속 읽고 싶었지만, 오늘의 할 일을 위해 책을 덮었다.


리사 수의 원서 <The Island of Sea Women>을 꺼내 들고 오늘의 인증 숙제를 하기로 했다. 1947년~1948년으로 분류되는 챕터를 시작했다. 제주 4.3 사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아서, 검색을 해보기로 했다. 잔인한 역사, 그 피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 같은데, 한국인인 나는 그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는 점이 부끄러웠다. 미국인이 쓴 소설을 통해 제주의 아픔에 다가갈 수 있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소설 <1984>에서 자행되었던 통제, 감시와 고발이, 시민들이 겪은 공포가 제주도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니, 무척 가슴이 아팠다.


100일 글쓰기 6회 차인 오늘,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침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글쓰기였는데, 이런 식으로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슬쩍 미루고 말았다. 만약, 100일 글쓰기 공표가 없었다면, 글쓰기는 이렇게 또 안녕이었을 것이다. '시나 문학은 내 머리에 앉은 나비와 같아서, 그것이 아름다울수록 나를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처럼, 의미 있는 문학을 읽은 오늘, 나는 아주 우스꽝스럽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주절거림이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글쓰기는 죽지 않은 채 초록 잎사귀 한 장 달고 있는 귀한 생명. 밉다가도 사랑스러운, 나만 바라보는, 나에게만 기쁨을 주는 생명. 시들지 않게, 물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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