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밤톨동화

부모님 번호가 흐릿해진 이유

by 밤톨맘

어릴 적 내가 기억하려고 애쓴 전화번호는 단연 부모님 번호였다. 혹시 학교에서 사고가 나서 크게 다치거나 난처한 상황이 닥친다면, 선생님께 꼭 전해야 할 비상 연락망이었기에 무조건 반사처럼 외우고 다녔다. 그 번호는 어린 나에게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든든한 울타리 같은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 가득 찼던 부모님 전화번호는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번호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다 누군가 부모님 전화번호를 갑자기 물어본다면 입 밖으로 바로 뱉어내지 못하고 망설일 만큼 희미해져 갔다. 아플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기대고 싶은 사람이 남편이 되어갔다. 그렇게 '보호자'라는 임무가 남편에게로 조금씩 옮겨 갔다.


엄마 아빠가 내게 결혼을 바라는 이유가 다른 데 이유를 둔다기보다는, 본인들은 나의 보호자로 평생을 지켜줄 수 없으니 좋은 배필을 심어두고서는, 나이가 들어 점점 쇠약해져감에도 내 딸만큼은 평생을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 쓸쓸히 삶을 보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내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그저 짐작할 뿐이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면 부모님들은 "이제 하나 해치웠다"고 우스갯소리로 표현하신다. 보호자라는 막중한 임무를 넘겨주고서는, 그 홀가분한 마음에 그렇게 표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은 결혼 전에 나의 메모장에 남겨두었던 글이다. 그때는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보호자'라는 단어가,

결혼도 하고 딸을 낳아 기르다 보니 다시 머리에 맴돌기 시작했다. 딸 아이가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내가 강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남편과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쯤 혼자 남겨질 딸 아이를 생각하면 주체 못 할 감정들이 피어오른다. 극F와 극N인 엄마는 벌써 딸 아이 시집갈 즈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은 딸을 두고서는….


'보호자'라는 단어는 단순히 누군가를 보호해주는 것을 넘어 사랑과 책임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깊은 염려를 담고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시작되어 남편에게로, 그리고 이제는 나의 딸에게로 이어지는 이 보호의 사슬 속에서 나의 딸에게도 언젠가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보호자가 나타나기를, 그리고 그 보호자라는 이름의 무게만큼 깊은 사랑을 주고받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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