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젊은 포은에게 내리는 왕과 왕후의 부탁

by 밤톨맘

드디어 개경으로 떠나는 출정일이 정해졌다. 깃발이 하늘을 가리고, 이십만 군사의 발걸음에 땅은 흙먼지로 자욱했다. 끝없이 이어진 행렬 사이로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와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덜그럭거리는 마차의 바퀴 소리는 죽음의 수레바퀴처럼 음산하게 들렸다.


그리고 연경에 계시는 나의 아버지, 위왕으로부터 서신 하나가 도착했다. 기황후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고 적혀 있었다. 공민왕을 폐위하고자 고관대작들을 끌어들여 고려 침공을 위한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그러나 원나라 역시 홍건적의 난과 강남의 반란이 겹쳐, 고려 못지않게 위태로운 처지였다. 카이두 장군이 황제께 원의 실상을 아뢰며, 고려마저 적으로 등을 돌린다면 원은 회복 불능에 빠질 것이라 역설하고 있으나, 그의 애원이 언제까지 통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기황후의 계략에 철저히 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기철 일당을 제거하는 순간, 예상했던 일이었다.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불러들인다. 아무리 명분 좋은 숙청이라 한들,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폭력의 이면에는, 결국 끊이지 않는 복수만이 남는다. 폭력을 폭력으로 제어하는 것은 더 큰 폭력을 낳을 뿐이었다. 그들이 단죄를 받아 마땅할지라도, 이 단죄의 과정에서 또 다른 보복과 분열을 낳고 있음을 왕은 직시해야 했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허황된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이 엄습했다. 이 비극의 사슬을 끊어낼 다른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아버지 글씨체로 적힌 ‘카이두’ 이름을 마주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방울이 크게 맺혔다. 홍건적과의 전쟁이 이제 막 시작하였는데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니. 홀로 전쟁을 막아서고 있을 그의 처연한 어깨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경전을 펼쳐도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말발굽 소리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피 냄새, 재 섞인 연기, 비명 소리가 뒤섞인 전쟁터가 나를 덮쳤다. 새벽녘 문밖에서 들려오는 미미한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설희는 묵묵히 끓여 온 자스민 차를 내 앞에 놓았다. 이제는 위안이라기보다 불면의 시간을 버티는 유일한 약이 되어버렸다.


공민왕 또한 편한 날이라곤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내가 경전을 부여잡듯, 그도 온 힘을 다해 붓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그저 말 타는 장수들의 용맹함을 담는가 싶었으나, 이내 전장의 격렬함, 병사들의 피 흘리는 투혼, 그리고 자신의 고뇌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그의 붓질은 화폭을 뚫어버릴 듯 거칠었다. 그림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었다. 한 획을 긋는 순간마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그 옆에서는 환관 안도치가 묵묵히 앉아 벼루에 먹을 갈아 올렸다. 그가 갈아 올리는 먹소리는, 밤마다 왕의 마음이 닳아가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먹을 가는 행위가 마치 왕의 고통이 닳아 없어지기라도 하듯, 심혈을 쏟아 갈고 또 갈았다. 새벽이 밝아오도록 왕의 처소는 촛불이 꺼질 줄 몰랐다.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파랬다. 살벌한 소문이 난무하던 며칠과 달리,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날이었다. 모두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 있던 그때, 멀리서 흙먼지를 거칠게 일으키며 말을 달리는 한 전령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지친 말은 사정없이 채찍질 당해 허연 거품을 물고 있었다.


앳된 얼굴 위로 피로와 경악, 그리고 희미한 기쁨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는 말에서 힘겹게 미끄러지듯 내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이를 악물고 피 맺힌 목소리로 외쳤다.


“개경이… 개경이 수복되었사옵니다!!! 소인, 직한림 정몽주, 감히 아뢰옵니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굳었던 얼굴들이 순식간에 환희로 일렁였다.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올랐다. 왕의 얼굴에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기쁨 속에서 왕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승리. 그토록 염원하던 승리였다.


허나 나는 그 환호 속에서 감히 웃을 수 없었다. 길 위에 널린 참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스물다섯 정몽주의 얼굴에서 나와 같은 비통함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스러져간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얼굴들로 가득했을 터였다. 피로 물든 승리. 수많은 백성의 피를 깔고 얻은 승리 앞에서, 나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고요히 눈물을 삼킬 뿐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임시 행궁은 또다시 깊은 침묵에 잠겼다. 개경 수복의 기쁨도 잠시, 총병관 정세운이 죽었다는 소식이 청천벽력처럼 임시 행궁을 덮친 것이다. 그것도 삼원수, 안우, 이방실, 김득배 장수에게 살해당했다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참변이었다. 김용은 안우와 이방실, 김득배가 전공에 눈이 멀어 정세운을 참살하였다고 전했다. 허나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충신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눴다니.


김용은 이어서 안우, 이방실, 김득배 삼원수마저 반역자로 몰아 처단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정세운의 한을 풀었다는 것인데, 이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행하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왕은 그 자리에서 정세운에게 첨의정승이라는 엄청난 벼슬을 추증하고, 개경수복의 공을 인정하여 1등 공신으로 추록하며, 그의 화상을 공신각에 걸어 두도록 명했다. 왕은 그를 그렇게 예우하였다.


전하의 처소에는 비통한 한탄만이 길게 울려 퍼졌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자책이었다. 그 무거운 시름에 잠긴 왕을 그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가 없었다. 정세운과 김득배는 이 난세 속에서 왕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신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이리도허무하게 가다니. 왕의 어깨는 더욱더 깊이 내려앉았다.


“전하, 직한림 정몽주이옵니다. 전하를 뵈옵기를 청하옵니다!”

어둠 속에서 짧은 외침이 들려왔다.

“들라하라.”

정몽주는 짧게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왕후마마께서 계신 줄 몰랐사옵니다. 다시 청하는 것이 예인 줄 아오나, 신은 내일 새벽이면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전하께서 윤허하신다면 지금 청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어인 일로 이 깊은 밤, 나를 찾았는지 어서 그 연유를 고하라.”

정몽주는 깊게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반역으로 비칠 줄 아오나, 전하께 부디 청하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부자 관계와 매한가지라 배웠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사옵니까? 제 스승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서서.”

정몽주는 김득배가 지공거(과거 시험관)를 맡아 장원급제시킨 문생으로, 그 둘은 사제지간이었다. 왕은 깊은 고뇌에 잠긴 얼굴이었으나, 일절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리하라.”

왕의 호통은커녕 너무나도 쉽게 수락을 내린 왕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정몽주의 표정은 놀란 토끼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관리로서 첫발을 예문관 검열로 내디딘 정몽주는 주자학에 밝아 신진 사대부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은 이번 피난에서 정몽주를 시종신으로 수행토록 했다.


“과연 김득배의 제자로구나. 대대로 벼슬한 세신대족들은 서로가 뿌리처럼 얽혀 제 허물을 가려주고, 초야신진들은 초연한 듯 명예를 구하다가 출세하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러이 여겨 명문 거족과 혼인하여 사위가 되더니, 급기야는 처음의 뜻을 모두 다 버렸다. 유생들은 강직하지 못하고 유약한 데다 지연과 학연을 내세워 사사로운 정으로 당파를 이루니, 이 썩은 고려의 폐단을 개혁할 때마다 나는 참으로 힘에 부쳤다.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이들이 고려의 기득권을 쥐고 있으니, 하늘은 악인에게 벌을 주고 선인에게 상을 준다 하였는데, 하늘의 이치가 하나도 맞지가 않는구나. 그대가 공부하는 성리학은 어떤 학문인가?”

왕의 갑작스러운 하문에 정몽주는 고개를 숙여 생각을 가다듬는지 잠깐의 침묵 후 답했다.


“성리학이란 인간의 구원을 인간의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완성하려는 학문이옵니다. <대학>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실천하는 학문이옵니다.”

왕은 잠시 정몽주가 아뢰었던 '성리학'이란 단어를 곱씹는 듯했다. 깊은 침묵이 흐른 뒤, 왕의 시선이 다시 정몽주에게 닿았다.


“이 모든 것은 나의 불찰이다. 이 고려가 아직 정의를 세우지 못한 나의 책임이니라.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로를 생각하여 처자에게는 죄가 미치지 않도록 하라. 이 나라는 그들에게 잊힐 수 없는 큰 공을 입었느니라. 좌정승 유탁에게도 그리 전할 것이다.”

왕은 결의에 찬 얼굴로 이어 말했다.


“수신이라? 이것이 성리학에서 말하는 ‘수신’이라 볼 수 있겠는가? 그대가 이 쓰러져 가는 고려에 성리학의 이념이 깊이 뿌리내리도록 힘써달라. 수신이 이 나라의 기본 질서가 되어야 하네. 자네는 우리보다 젊으니 이 나라 고려가 유교 질서가 바로 잡힌 모습을 꼭 지켜봐 주게. 과인과 왕후는 도덕적이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 고려에 펼쳐보고자 하노라.”

정몽주는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깊이 고개를 숙여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깊은 밤, 정몽주와 나는 왕의 처소를 벗어 나왔다. 동쪽 하늘에서 새벽 여명이 이미 밝아오고 있었다. 곧 그는 도성의 복구를 위해 이곳을 떠날 터였다.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개경은 어떠한가?”

“왕후마마, 아뢰기 송구하오나, 그 처참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사옵니다.”

나는 긴 침묵 끝에 나지막이 운을 뗐고, 정몽주는 귀 기울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잠시 뜸을 들인 뒤 이어 말했다.

“인간의 구원을 인간의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완성하는 것이라.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네. 오로지 수신만으로는 평천하를 이룰 수 없단 말일세. 세상은 어떤 논리로 흘러가는 것으로 보이는가?”


“예? 세상은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물의 이치가 수신에 기인한다면, 전하와 왕후마마께서 원하시는 도덕적이고 인간다운 사회에 가까이 다가서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정몽주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흐트러짐 없이 소신껏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수신이 우선되지 않네.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우선일세. 평천하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세. 이런 상황에서도 수신에 기인한 의로운 자들이 세상에 가득할 것이라고 보는가? 수신하지 않는 자들을 탓하기에는 시대가 참으로 암울한 것이야. 이런 시대에 태어난 우리 모두가 애달프고 가엾지 않은가?”

나는 젊고 곧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암울한 시대 속에서 내가 품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오롯이 그에게 닿기를 바랐다.


“인간이 스스로 완성되려면 최소한 인간의 밖에서 이 사회가, 이 시대가, 이 세상이 인간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하네. 그러하다면 그대의 스승과 같은 의로운 자들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야. 부디 자네는 그날이 올 때까지 이 고려를 지켜달라.”

정몽주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그대의 스승, 김 원수가 전공을 시기해 총병관 정세운을 살해했을 리가 없네. 자네처럼 억울한 죽음이라고 나 또한 그리 생각하네. 순군제조 김용이 독단적으로 효수하였으니 전하의 뜻이 아님을 알아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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