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폭력의 굴레, 피로 얼룩진 흥왕사의 밤

by 밤톨맘

왕은 충신들의 죽음을 아로새길 새도 없이, 나는 또 다른 비극을 전해야 했다. 개경으로 돌아가는 환궁 길에서 아버지에게서 받은 서신의 내용을 전달했다. 다가올 전쟁을 대비해야 했다. 허나 왕은 피로 얼룩진 도성에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폐허가 된 거리, 불타버린 집터, 그리고 널브러진 시신들. 승리했으나 상처뿐인 귀환이었다. 백성들은 무너진 집과 가족을 잃은 슬픔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무거운 책임감이 드리워졌다. 이 승리가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인지 깨달을수밖에 없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 사이로, 처참하게 파괴된 개경을 내려다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으로 참혹했다.


비단 도성만 폐허가 된 것이 아니었다. 궁궐 또한 다르지 않았다. 대궐 곳곳은 전쟁의 상흔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무너진 처마와 불탄 전각들은 더이상 왕의 거처로 쓰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고심하던 왕은 이내 임시 거처를 흥왕사로 결정하였다. 흥왕사는 문종때 창건하여 고려 최대 규모의 왕실 사찰이었다. 폐허가 된 도성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였다.


고요하던 새벽, 행렬은 다시 움직였다. 허망함을 끌어안고 흥왕사에 도착하자, 장대한 사찰의 위용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문득 수많은 백성의 피를 깔고 앉은 우리가 성스러운 부처의 공간에 기대 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삶은 끝나지 않았으니, 폐허 위에 또다시 서야만 했다. 살기 위해 또다시 칼날을 벼려야 한다니. 이미 고통으로 얼룩진 이 땅 위로 북방의 서늘한 전운이 다시금 드리웠다. 희망 없는 폐허에서 전열을 가다듬어야 하는 절망감에,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흥왕사에 들어온 지 한 달이나 흘렀다. 낮에는 불탄 도성을 복구하기 위한 논의와 밀려든 국사로 한시도 쉴 틈 없이 전하를 몰아세웠다. 밤마다 잠 못 이루는 그의 긴 탄식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저 침묵으로 그의 고통을 함께할 뿐이었다.


그 사이 김용은 찬성사에 오르고, 전하의 경호를 책임지는 순군제조로서 치안을 담당하며 과도하게 의기양양했다. 김용은 자신의 권력이 커지는 것에 도취되어 자만심에 차 있었다. 문득 정세운을 몰아내기 위해 그가 판을 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복주로 피난을 떠날 만큼 위급했던 당시, 전하는 총병관 자리를 김용에서 정세운으로 교체했다. 김용은 이 일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했다. 그렇다면 정세운을 제거하고, 그와 연루된 3원수마저 심문도 받지 못하도록 김용이 손을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품게 되었다. 김득배는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전공에 눈이 멀어 총병관인 정세운을 살해하다니. 가당치도 않는 말이었다.


김용의 측근들은 밤마다 흥왕사 구석에서 알 수 없는 인물들과 밀담을 나누었다. 몇몇 내관과 호위 무사들의 얼굴에는 짙은 불길함이어려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 숨기려는 듯 나의 시선을 피했고, 그들의 발걸음은 몹시 불안정했다.


이 모든 것을 전하께 알렸으나, 전쟁 때문에 과민한 나의 탓으로 돌렸다. 노골적인 피로 속에서 나의 말들은 그의 어지러운 마음을 가중하는 듣기 싫은 소리일 뿐이었다. 애초에 김용에게 순군제조를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나 다름없어 보였지만 왕은 김용을 과도하게 의지하였다.


그날 밤, 흥왕사는 달빛마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낮에 들려오던 미약한 목탁마저 멎고, 낮게 우는 밤벌레 소리만이 정적을 더 짙게 했다. 성스러운 부처의 공간에서만큼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잠시라도 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꿈이었던 것이다.


쾅!!! 콰앙-!!!


“황제의 명으로 공민왕을 처단할 것이다! 왕을 찾아라!”

고요하던 사찰에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어 날카로운 비명과 칼이 부딪치는 쨍한 금속음이 사찰의 적막을 찢었다. 헐레벌떡뛰쳐나간 설희의 비명이 곧이어 들려왔다. 몸이 굳어버린 내 손을 왕이 다급히 잡았다. 그의 얼굴은 차게 식어 있었으나, 눈빛만은 이글거리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어느 누가 탐욕에 눈이 멀어 성스러운 사찰에까지 피비린내를 몰고 온단 말인가!”

사찰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침입자들은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마저 무참히 짓밟으며 맹목적으로 전하를 찾았다. 바로 그때였다. 전하와 닮은 환관 안도치가 왕을 미닫이문 밖으로 밀쳐내며 말했다.


"전하, 소신이 전하의 옷을 입고 침전에 누워 있겠사오니 명덕 태후마마의 침소로 어서 몸을 피하시옵소서”

“그럴 수 없다. 그대의 목숨 또한 중하다. 내가 저들을 막아설 것이다.”

나는 설희 등에 꼽힌 활과 화살을 챙겨 들며 말했다.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왕후마마, 이대로는 모두가 죽은 목숨입니다. 서둘러 가십시오. 전하와 왕후마마께서 살아 계셔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왕은 깊은 시름에 잠긴 얼굴이었다. 개경이 함락되어 복주로 떠났던 피난길에서, 안도치가 자신에게 아뢰었던 말이었다. 치욕스러웠던 피난도, 감격스러웠던 환궁도, 그 모든 여정을 안도치가 함께했다. 그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왕의 눈앞을 스쳐가고 있었다. 그 복잡한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왕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서 있던 안도치는 급기야 미닫이문을 걸어 잠갔다.


“전하, 마지막 충성을 바치옵니다. 부디 강건하시어 고려를 다시 세우소서!”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설희야, 전하를 부탁하마.”


“공주마마께서는요?”

설희가 애원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이곳에서 시간을 벌 것이다. 너는 전하를 태후마마의 처소로 모신 뒤, 좌정승 유탁과 최영 장군에게 이 사실을 신속히 알리거라.”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미닫이 문 앞을 지켜 서며, 활과 화살을 온 힘을 다해 움켜쥐었다. 나의 마지막 외침이 끝나자마자 왕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의 심장이 뜨겁게 두드려댔다.

“무모한 짓은 하지 마시오. 나와 함께 태후마마 처소로 갈 것입니다.”

왕은 발걸음을 서둘러 옮기며 이어 말했다.

“설희야, 너는 어서 이곳의 상황을 최 장군에게 전하라”


나의 눈은 이미 모든 희망을 잃은 듯 텅 비어 있었다. 이 모든 폭력과 비극의 굴레에서 우리는 진정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나의 모든이상이, 그리고 그 모든 믿음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듯했다. 나는 무참히 희생될 안도치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눌렀다. 사찰 내에서도 아주 깊은 곳에 위치한 태후마마 처소마저도 안전하지 못했다. 그들의 발걸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비명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문이 거세게 열어젖혔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번뜩이는 칼날을 든 역도들이었다. 그들의 살기 가득한 눈빛이 나를 지나 전하를 향하고있었다. 칼날이 전하를 향해 내리 꽂히려는 찰나, 내 몸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전하의 절박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게문 앞으로 달려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팔을 활짝 펼쳐 나의 심장을 내보였다. 그리고 이 폭력의 굴레를, 나의 죽음으로 끝낼 수 있다면 기꺼이그럴 것이다. 이 굴레를 이제는 멈춰 세워야 했다.


“나오시오! 황제의 명으로 공민왕을 처단할 것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황제의 명이라 운운한단 말이더냐?”

나의 목소리는 뇌성이 울려퍼지듯 그 공간을 압도했다. 역도들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움찔거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혼란과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순간 아버지의 서신 내용이 떠올랐다. ‘기황후의 계략에 철저히 대비할 것.’ 그들의 배후에는 기황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하다면 황제의 명으로 원나라의 공주인 나를 먼저 베거라”

내 말에 역도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감히 원나라 공주인 나를 함부로 벨 수 없다는 듯,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어물거렸다.


그 찰나, 사찰 전체를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 멀리서 좌정승 유탁과 최영 장군이 횃불을 들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역적들을 모두 섬멸하라!"

최영 장군의 우렁찬 호령과 함께 병사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역적들을 제압해 나갔다. 역도들은 미처 반항할 틈도 없이 쓰러져갔다. 피로 물든 흥왕사의 밤은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난이 진압된 후, 우리는 피로 얼룩진 사찰 한편에 마주 앉았다. 전하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과 함께 다시금 깊은 수심이 드리웠다.

“역적들이 황제의 명을 들먹이며 공공연히 짐의 목을 노렸다. 그 배후를 철저히 밝혀내라.”

전하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지만, 그 속에는 체념에 가까운 고통이 스며 있었다.


“예, 전하! 역적들이 황제의 명이라고 들먹인 것을 보아하니 역도들의 배후를 캐지 않으면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좌정승 유탁은 비장한 얼굴로 읊조렸다.


“하오나 전하! 순군제조 김용이 저 역적들 모두를 심문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하였사옵니다!”

최영 장군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잠시 스치고는 곧장 전하에게로 향했다.


“이는 필시 김용이 이번 난에 연루되었음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총병관 정세운이 살해될 당시, 안우·이방실·김득배를 제멋대로 처분하여 그 누구도 심문 받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사옵니까. 역도들의 배후를 끝까지 파헤치려면, 먼저 김용부터 잡아들여야 하옵니다!”

좌정승 유탁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정세운과 삼원수의 죽음이 어찌하여 일어났는지 그 연유가 분명해질 것이옵니다. 김용은 더이상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옵니다.”

전하는 두 사람의 말을 말없이 들었다. 믿었던 자에게 거듭된 배신을 당한 왕의 어깨는 한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김용을 밀성군으로 유배 보내라.”

전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믿었던 그의 최후를 차마 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김용은 왕의 총애를 받는 정세운을 시기해 왕의 교지를 위조하여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처단하도록 사주했다. 나아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삼원수마저 죽인 것이다.


김용은 불만 보면 뛰어드는 나방이나 다름없었다. 김용에게 순군제조를 맡기는 것은 나방에게 등불을 건네주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탐욕에 눈이 멀어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구나. 준비되지 않은 그에게 권한을 주는 것은 파멸을 돕는 격임을. 왕은 또 다시 자신이 아끼는 신하를 잃고야 말았다.


김용이 공민왕을 시해하려 한 연유에 대한 물증이 없었다. 다만 배후에 기황후가 있을 것이라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 원나라 황제의명령을 들먹인 역적들과 김용의 연결고리는 누가 봐도 명백한 것이었다. 그의 배후가 기황후가 맞다면, 앞으로 고려에 닥쳐올 후환은 지금껏 겪은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폭풍일 터였다. 나는 지는 달을 보며 차게 식어가는 팔을 주물렀다. 폭풍은 이제 막 시작될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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