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결국 하나의 달을 잃는구나

by 밤톨맘

낙엽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하늘은 더없이 높았고 오색 빛의 단풍잎은 세상을 물들였다. 가을바람이 제법 스산한 기운을 실어왔지만 온 나라가 그 어느 때보다 들썩였다. 나의 왕후가 회임했다는 소식이 저잣거리까지 퍼져 나갔다. 백성들은 피폐한 삶 속에서도 왕실에 찾아온 경사에 깊은 안도와 희망을 내비쳤고, 사찰마다 왕자 생산을 기원하는 예불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이 얼마나 오래도록 염원하던 후사인가. 모든 것이 마치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았다.


그녀가 내게 오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지켜내기로 마음먹었건만, 번번이 그녀에게서 등을 보였다. 원나라로 끌려가 볼모로 살아내며 평생을 비참함 속에서 버텼다. 망해가는 고려의 왕족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원 황실 출신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조차 없는 것을. 허나 그 황실의 여인들은 기세가 등등하여 나 같은 사람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나선 것이다. 다른 사내에게 마음을 내어준 여인일지라도, 나는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러니 애초에 그녀가 나를 봐주기를 바란 적 없었다. 그러나 자꾸만 욕심이 났다. 나의 여인이 내 곁에서 더 행복하기를 바랐다.


지나온 날들의 후회가 그녀를 향한 나의 다짐을 더욱 확고히 만들었다. 그녀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원망했던 나날들이 스쳐갔다. 그녀와 의견이 충돌될 때마다 애써 거리를 두던 날들이 후회스러웠다. 피로 물든 흥왕사에서 목숨걸고 나를 지켜내던 그녀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녀의 연약한 어깨는 매 순간 나의 무게를 지탱하고자 했다. 어리석었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기필코 내 모든 것을 걸고 나의 왕후와 우리의 아이를 지켜내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어느새 왕후궁에는 정갈한 산실청이 차려지고, 숨 죽인 이들의 기도가 켜켜이 쌓여갔다. 하루하루 공주의 배는 남산만 해졌고, 나의 초조함은 한없이 커져만 갔다. 마침내 해산일이 다가왔다. 어제부터 시작된 진통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만삭의 배를 부여잡은 공주는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사정없이 물어뜯어 입술 새로 피가 배어 나왔다. 얼굴은 땀과 눈물 범벅이었다. 피 말리는 사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곁에서 그녀의 뜨거운 이마를 애타는 손으로 연신 쓸었고, 산파는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기력을 쉼 없이 북돋웠다. 공주의 신음소리는 이내 절규에 가까운 비명으로 바뀌며, 내 심장을 거세게 죄어왔다. 그리고 죽을 듯한 비명 소리 뒤, 짧은 침묵을 깨고 희미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이내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응애! 응애! 응애! 응애!”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비로소 길고 긴 고통의 막을 내리게 했다. 산실청 안팎을 채웠던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안도의 한숨과 벅찬 기쁨이 함께 피어났다. 산파는 상기된 얼굴로 침상 앞 무릎을 꿇었다.

“왕실에 경사가 났사옵니다! 왕후마마께서 원자를 순산하셨사옵니다!”




그 순간, 온몸을 꿰뚫는 듯한 진통은 여운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나의 시선이 전하의 품에 안긴 작은 핏덩이에 닿는 순간, 세상의 모든 고통은 한 점 희망으로 응축되었다. 전하는 붉어진 눈으로 나와 아기를 번갈아 보며, 감격스러운 미소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조심스레 내 품에 안아 올린 아기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작고 여렸다. 방금 그 요란한 울음소리의 주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미약했다. 나는 이 작은 존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 나의 아가. 나의 세상, 나의 전부.


"아가, 엄마가 정말 많이 사랑해."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며 온 마음을 다해 아기의 작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기의 심장이 내 품에 안겨 가늘게 뛰고 있었다. 모든 생명은 귀하디 귀한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리 모두가 이토록 작은 생명체에서 시작했을 테니까. 기쁨도 잠시, 아기의 얕은 숨소리가 잦았던 탓일까, 산파의 표정에는 희미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마마, 아기씨의 숨결이 온전히 고르지 못하나, 마마의 옥체가 먼저 상하실까 두렵사옵니다. 부디 몸조리에 전념하시옵소서. 마마께서 강녕해지셔야 아기씨를 온전히 보듬으실 수 있사옵니다."


나는 그 속에 담긴 우려를 애써 외면했다. 그 모든 조언과 당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아기만이 보일 뿐이었다. 아기는 우렁찬 울음소리 대신 얕은 기침을 자주 토해냈다. 그러니 더욱더 나의 품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을 수 없었다. 설희의 만류에도 나는 밤낮없이 아기를 품에 안았다.


밤이 찾아오면, 희미한 등불 아래 아기의 작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기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가늘고 힘없는 기침 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품 안의 아기는 마치 희미한 바람에도 꺼질 듯한 등불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작은 몸을 떨며 깊이 잠든 아기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애달프게 했다. 문풍지 사이로 스며드는 한 줄기 찬바람에도 가슴을 졸였다.


밤하늘의 달마저 시꺼먼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리는 잔인한 밤이 찾아올 때면, 나를 감싸는 불안은 한층 더 깊어졌다. 그럼에도 아침이 밝아오면, 아기의 숨결에서 다시금 힘을 얻었다. 낙엽 지는 스산한 가을 속, 왕후궁의 온기는 오직 이 작은 아기의 존재로 유지되었다.


내게는 매일이 경이로운 시간이었다. 열 달을 품어 낳은 내 아기의 앙증맞은 손가락, 가느다란 발가락 하나하나를 찬찬히 어루만졌다. 젖을 물릴 때는 온몸의 기가 빨려 나가는 듯 고단했지만, 곤히 잠든 아기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면 그 모든 피로가 봄눈 녹듯 사라졌다. 보드라운 아이의 살결을 쓰다듬으며 왕후궁을 거닐 때면, 나의 삶에는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기의 뽀얀 숨결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냄새는 나에게 살아갈 이유이자 희망 그 자체였다. 나의 세상은 온갖 풍파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품에 안긴 이 아이의 세상만큼은 그저 평화롭고 따스하기만을 바랐다.


밤늦도록 아기의 귓가에 조용히 자장가를 불러주며 아기의 등을 살포시 토닥이자, 어느새 신기하게도 내 손끝은 오래전부터 기억하던 리듬을 타고 있었다. 어머니가 절구통에 곡식을 빻을 때마다 들려오던, 그 낡고도 익숙한 '덩더쿵' 리듬이었다. '덩'에 힘을 실었다가 '더쿵'에서 힘을 부드럽게 빼는 방법, 바로 힘을 덜 들이는 어머니의 방법이었다.


그 오랜 기억의 조각이 지금 내게 기댄 아기의 여린 온기와 맞닿는 순간, 나는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에 사무쳤다. 나에게는 평생을 무심했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한 아이를 품에 안고 어미가 되어보니, 알 것도 같았다. 어머니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이 귀한 아이도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나는 이 자리에 서 있기까지, 어머니의 삶이 통째로 바쳐졌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전하 또한 곁에 있을 때면, 아이의 고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작은 옹알이에 온 세상의 근심을 잊은 듯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하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그림자조차 이 아기 앞에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이는 이 혼돈의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이유이자 희망이었다. 전쟁과 죽음, 끊임없는 폭력의 굴레 속에서 간신히 피어난, 이 작은 몸짓이 우리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전란 속에서 사방은 칼바람이 불었고, 백성들의 신음 소리는 잦아들 줄 몰랐다. 설상가상으로, 카이두에게서 다급한 밀서가 당도했다.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이 원나라 황실에 의해 고려왕으로 책봉되었고, 공민왕을 내쫓고자 1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 출병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나의 마음은 시퍼렇게 얼어붙었다. 이토록 여린 나의 아이가, 전쟁의 한가운데서 무사할 수 있을까. 혹여나 덕흥군의 군대가 들이닥쳐 지난 홍건적 침입 때처럼 개경이 함락된다면, 또다시 저 멀리 복주로 몽진해야 하는 것인가. 이제는 이 갓난아이와 함께 할 터인데 전란의 그림자가 이 작고 소중한 생명을 덮칠까 두려웠다.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나의 숨통이 죄어오는 듯했다. 불안에 지친 가슴을 진정시키려, 숨을 고르는 일이 부쩍 잦았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어지럼증과 몸살은 나를 침상에 묶어두려 했지만, 아이를 향한 나의 맹목적인 사랑은 모든 고통을 망각시켰다. 오직 나의 아기를 지켜내는 것만이 내 삶의 유일한 이유라는 듯이 산후조리는 뒷전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거친 폭풍 속에서 이 작은 생명을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나를 지배할 뿐이었다.




나는 왕후궁 문밖에 기대어 선 채,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방 안을 바라보았다. 마마는 아이를 한시도 품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저러다가 무슨 사달이 날 것만 같았다. 마마의 건강 상태는 해산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날따라 마마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씨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었다. 마마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어의를… 어의를 당장 불러오너라!!!”

황급히 어의를 데리고 뛰어들자마자, 마마의 비명이 왕후궁을 길게 갈라놓았다. 어의의 손이 아기 가슴 위에서 굳어지더니, 이내 방 안의 숨소리마저 멎었다. 어의는 마마를 마주하지 못한 채 시선만 바닥에 박았다. 그 짧은 침묵이 이미 대답이었다. 그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켰다 내쉬고, 마침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마 송구하오나… 아기씨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방금까지 젖을 물렸는데… 방금까지…”

마마는 아기의 작은 몸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궁궐을 뒤흔드는 짐승의 포효 같은 울음이 그녀의 축 늘어진 몸에서 터져 나왔다. 곧이어 전하께서도 검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전하는 방금 피어난 희망이 이리도 한순간에 꺾이는 참혹한 광경에, 아연실색한 채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어떤 비명도 탄식도 나오지 않았다.


“내 아가의 고운 숨결을…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공주마마는 핏기 잃은 아기의 싸늘한 몸을 애써 보듬으며 울부짖었다. 전하는 공주마마께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메마른 눈물과 함께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힘껏 안아 줄 뿐이었다. 그의 손은 아이를 차마 들지도,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그저 허공을 헤맬 뿐이었다. 그 둘의 모습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내 사지가 찢겨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천지신명님, 제 영혼이라도 팔라면… 기꺼이 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내 아가의 고운 숨결을… 다시 돌려 주세요.”

마마는 아기의 가냘픈 몸을 가슴팍에 더 깊이 묻었다. 마치 아기의 영혼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그 몸짓은 처절했다. 이윽고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피 울음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그토록 가냘픈 몸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는 그녀를 마주하기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나의 마음이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대체 왜 이 고결한 공주마마께 이런 시련이 끝없이 닥쳐오는가. 하늘은 어찌 이리도 무심하단 말인가.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우리 같은 나인들에게도 신분의 차이 없이 똑같은 인간으로 대해주시던 분이었다. 참 예쁜 이름이라며 ‘설희’라고 항상 따스하게 불러 주시는 유일한 분이었다. 우리 공주마마께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결코 아니 되었다.


불과 한 달 전, 아기를 낳아보니 세상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고 하시던 마마.

“모든 생명은 귀하디 귀한 것임을 이 아이를 안아보니, 내 완벽히 알 것 같구나.”

매일 아침 웃으시며 내게 말씀하시던 그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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