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영혼의 파멸을 대가로 이루어 낸 지독한 대의

by 밤톨맘

나는 몸과 마음이 산산조각 난 채 의주, 국경의 최전방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피비린내를 덮으려 내 몸에 배게 했던 비비추 향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순간, 그 향 끝에 역겨운 피비린내가 엉겨 붙더니, 속이 뒤집혔다. 나는 창문 너머로 설희에게 손짓했다. 마차가 덜컥거리며 멈춰 섰다. 비틀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세우고 내려서자, 얼음처럼 찬 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마, 가마 안으로 드시지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고뿔이라도 걸리면 큰일 납니다.”

설희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내 어깨를 지탱했다. 아기가 나의 곁을 떠난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숨을 쉬는 일조차 고통이었다. 걸핏하면 시린 눈물을 속절없이 흘려내야 했다.나의 자제력은 더이상 작동되지 않는 것처럼 몸이 먼저 반응했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말없이 뒤따르는 설희의 기척이 등을 떠밀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나는 무너질 수 없었다. 아이를 낳아보니 나의 신념은 더 확고해졌다. 이들에게 모든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거칠게 달려오던 전령이 전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급보이옵니다! 의주가 이미 점령되었사옵니다. 적들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정주에 진을 쳤사옵니다!”


“의주를 내주다니…”

왕의 입술 새로 고통스러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왕은 얼굴에 일렁이는 불안감을 숨기며 곧바로 좌정승 유탁에게 지시했다.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에게 명하라. 당장 정주에서 적들을 대치하라 일러라!”

홍건적 전쟁에서 맹활약하며 전공을 세웠던 최영과 이성계였기에 왕은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명했다.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선 이유는 오직 하나, 의주에서 카이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왕은 전면전이 아닌, 원나라 수장의 퇴각을 이끌어내 평화적으로 이 전투를 끝내고자 했다. 나는 흔쾌히 전장으로 향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왕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나라를 위해 작은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던 그가, 이제는 평화를 원했다. 품에 안았다 놓아준 아이가 일러준 것이다. 작은 희생이란 없다.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돌아갈 소중한 가족이 있다. 우리는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을 더이상 원치 않았다.


정주에 도착한 군막 안은 소름 돋을 만큼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재빨리 밀서를 작성하여 전령에게 전달했다. 분명 나의 글씨체를 그가 알아볼 터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두 장군을 호위하던 낯익은 병사가 우리가 있는 군막 안으로 조심스럽게 찾아 들어왔다. 그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그가 이끄는 쪽으로 달려 나가고 싶었다. 허나 왕은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새하얗게 쥐며 여전히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강한 경계가 카이두 진영에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염려되었다.


“전하,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자칫 자객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왕후를 지켜드릴 것입니다.”

왕의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 단호했다.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는 무사할 것입니다.”

그가 안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제가 따라나설 것입니다.”


그는 고집스레 앞장서 걸었다. 결국 왕과 함께 카이두가 있을 군막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내 그가 시야에 들어왔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를 마주하는 순간, 그와 함께했던 지난날의 눈부시도록 황홀했던 추억들이 물 밀듯이 밀려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기억 탓에 눈물이 쏟아지더니 세상이 뿌옇게 흐려졌다. 나의 눈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피폐해진 나의 몰골 때문이었을까. 그의 눈동자는 하염없이 흔들렸다. 늘 날카롭던 눈매는 슬픔으로 일렁였고, 굳게 다문 턱은 감정을 억누르는 듯 떨렸다. 그는 나의 모습에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만 같았다. 단단했던 그가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애써 미소 지어 보였지만, 내 목소리는 한없이 흔들렸다. 그는 밀려오는 회한을 애써 삼키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참 뒤, 그는 나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이미 나의 얼굴에서 내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고려 백성을 지키겠다는 나의 대의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읽은 얼굴이었다.


“그대가 연경에서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처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

연경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 카이두의 눈에 비통함과 체념이 번졌다. 이내 그의 시선은 다시 나의 얼굴 위에서 굳어졌다.


“전쟁을 멈추고… 부디, 물러나 주십시오.”

피로 점철된 전장 한가운데서, 나는 그에게 가장 잔인하고 나약한 간청을 하고 있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굵은 턱을 단단히 굳혔다.


“얼굴이 어째서 그러합니까? 이런 상태에서 어찌 무모하게 전장을 넘나든단 말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낮게 깔렸다.


“저는 여전히 과녁 뒤 너머까지 보지 못하는 듯합니다.”

애써 웃어 보였지만, 나의 쓰디쓴 자조가 오히려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나는 절대, 기필코 그대를 고려로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고, 내 뒤에 말없이 서 있는 공민왕을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전쟁을… 멈추어 주십시오.”

나는 다시 한번 더 힘을 주어 간곡히 부탁했다.


“대체 백성이 무엇이길래… 이리도 무모하단 말입니까!”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나라의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나, 백성 없이는 왕도 없는 것이니, 어찌 백성이 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박혔을 것이다. 그의 짙은 눈썹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시선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 아주 먼 과거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했다. 마치 영혼이 잠시 몸을 떠난 것처럼 아득한 눈빛이었다. 나와 함께한 추억의 파편들이 그의 심장에 박혀 성가시게 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을 내가 뿌리째 뒤흔들고 있음을 나 또한 모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나의 뜻을 따라주었다. 나는 이 생에서 절대 다 갚지 못할 빚을 그에게 진 것이다. 기황후의 복수심이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하게 만들었다. 카이두는 황제의 명으로 출정했으나, 연경 또한 주원장이 이끄는 반란군의 위협으로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역시 원나라 병사의 피가 불필요하게 고려 땅에 뿌려지길 원치 않았다. 망설임 끝에 그는 내일 아침 전열을 정비해 고려를 떠나겠다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덕흥군에게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날이 어둠 속으로 서서히 잠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우리는 최영과 이성계가 작전 논의를 벌이는 군막 안으로 들어섰다. 왕은 굳게 입을 다문 채 두 장수를 마주했다.


"카이두 장군은 물러날 것이니, 내일 아침까지만 기다리거라.”

왕은 희미한 눈으로 탁자 위 지도를 쓸어 내리며, 지친 숨을 삼켰다.


"밤의 전장은 눈 뜨고도 코를 베이는 곳이옵니다. 어찌 적의 말만을 믿고, 한 치 앞도 모를 어둠 속에서 기다리라 하십니까?"

최영의 목소리는 흔들림도 없는 확신과 긴박감이 실려 있었다. 그는 날 선 눈빛으로 칼자루를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덕흥군을 염탐하던 정탐꾼이 급히 전했사옵니다! 원군은 단순한 철수 준비가 아니라, 전열을 은밀히 정비하고 있다하옵니다. 이는 필시, 밤을 틈탄 기습 공격을 위한 것이옵니다!"


“야습이라도 강행한다는 말인가?”

왕의 미간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신과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나는 최영이 답하기도 전에, 참지 못하고 말을 잘랐다.

“야습이라니! 얼토당토않습니다. 방금 저와 함께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희미한 등불 아래 흔들리는 왕의 눈을 붙잡듯 간곡히 말했다. 하지만 이성계의 싸늘한 목소리가 내 호소를 갈라놓았다.


“왕후마마, 그들의 말을 쉬이 믿을 수 있습니까? 설령 카이두 장군이 그리 결정했다 한들, 덕흥군이 공격을 지시한다면 막을 길이없습니다! 선제공격이야 말로 유일한 살 길이옵니다. 전하!”

핏발 선 그의 눈동자는 불타오르는 전의로 가득했다.


“카이두 장군과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전쟁은 기필코 일어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나는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외쳤다.


“마마, 원은 고려 백성을 짓밟는 적군이옵니다. 죄 없이 죽어나간 백성들의 원한을 갚을 마지막 기회이옵니다!”

최영은 굳은 표정으로 이성계 뜻에 동조했다.


왕은 고통스러운 탄식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멸시 받던 고려의 한이 여전히 떠돌고 있소. 나는 왕후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소. 카이두 장군이 물러난다 해도, 덕흥군이 물러난다는 뜻은 아니지 않소? 덕흥군은 믿을 자가 못 되오.”


왕은 끝내 내 시선을 받아내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긴 침묵이 군막을 짓누르는 동안,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왕의 얼굴만을 필사적으로 좇았다.


마침내 왕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시선은 나를 지나, 두 장수에게로 박혔다.

“기황후의 뒷배를 믿고 왕좌에 앉으려는 무뢰한 덕흥군을 쳐라.”


“복수는 복수를 부를 뿐, 무의미하오! 무고한 백성의 피를 더는 흘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나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호소했다. 그러나 나의 목소리는 살기등등한 두 장수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을, 승리를 갈망하고 있었다. 평화를 향한 나의 소망은 그들의 욕망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지경임에도 왕은 어떠한 것도 사고할 수 없다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나의 간청은 그의 깊은 무력감 속에서 빛을 잃어갈 뿐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선제공격의 북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예고도 없이 쏟아진 수많은 화살들이 밤하늘을 갈랐다. 저 불화살은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곧이어 피의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안 돼!" 나의 절규는 병사들의 격렬한 함성에 처참하게 묻혔다.


밤은 길고도 잔인했다. 새벽이 되자 모든 것은 끝이 나 있었다. 원나라 군은 참패했다. 혼란에 빠진 적의 장군들은 전멸했다. 나는 시체가 산처럼 쌓인 언덕 위에서, 역겹도록 익숙한 피비린내 속에서, 마침내 그의 형체를 찾아냈다. 공민왕의 시선도, 승리에 도취된 장수와 병사들의 수군거림도 내게 닿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만 나의 영혼을 지배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사실만을 확인해야 했다.


카이두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의 찢어진 갑옷 틈으로, 뜨거운 피가 흘러나왔다. 숨통을 틀어막는 듯한 지독한 피비린내가 온몸을 휘감으며 진동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빛바랜 비비추 향낭이 떨어져 나왔다. 다 휘발되어 사라질 대로 사라진 이 향낭을 그러쥐며 나는 절규했다. 그는 내가 주었던 하루하루로 남은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자스민 향에 그 이름을 눌러 담으며, 얼마나 그의 안녕을 빌었던가. 그 모든 것이 부질 없었다. 그에게 가닿지도 않을 기도였다. 그가 견뎌왔을 무수한 밤들이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 어젯밤 날아오른 화살보다 더 잔인하게 나를 찌르기를, 내 심장마저 모조리 도려내기를 바랐다.


의주로 향하던 길 위에서, 나를 구역질 나게 했던 그 정체 모를 냄새는 이것이었다. 비비추 향 끝에 들러붙어 나를 괴롭히던 그 역겨운 피비린내는, 바로 그의 죽음이었구나. 어리석은 나는, 제 손으로 그의 피를 묻히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나를 원망했을까. 그를 기만한 줄 알았겠지. 그가 나를 배신자라 여겼으리라는 생각에,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솟구쳤다. 그가 있는 저 세상으로 가지 않는 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그 사실이 나를 부서지게 만들었다. 이 영원한 굴레가 나를 끝없이 짓누를 터였다.


그가 내 모습에 동요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지휘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내가 물러나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끝끝내 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 난국에서 군대를 지켜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의 수장인 카이두를 혼란에 빠뜨린 것. 그것이 원나라 군이 패하고, 그가 죽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미친 듯이 새어 나왔다. 카이두는 끊임없이 나를 살렸다. 죽어가던 내게 공주의 신분을 주었고, 기댈 곳 없던 내게 평생의 보호를 약조했다. 마지막에는 내 잔인한 부탁을 들어주려 전사로서의 마지막 명예마저 버렸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죽음으로 갚았다. 이 모든 것을 저버린 것은 나였다.


닥쳐올 결과를 헤아리지 못한 나의 무모한 부탁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구나. 까막절벽에서 그를 살리기 위해 애탔던 그날, 나의 모든 것이 거기서 멈추어 섰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도, 지금도, 그저 으르렁거릴 뿐. 이 무력감에 치가 떨렸다. 어쩌면 그가 스러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


십수 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그가 빌었던 소원은 내게로 향했다. 그를 저버린 죄를 이렇게 돌려 받는 것이다. 유성은 그의 말처럼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저 유성처럼 당신이 내 눈앞에서 스러지지 않기를 빌겠습니다.’

차라리 내가 그의 품에서 부서지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허나 지옥보다 더한 이 고통을 그에게 안겨 줄 수 없다. 내 삶의 이유였던 그에게 절대 내어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울부짖었다. 그를 부둥켜안고 울고 또 울었다.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절규가 끓어올라, 내 심장을 끝끝내 갈라버렸다. 나의 온몸이 비틀리는 듯했다. 내 울음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이 추운 겨울 하늘에서 시린 빗방울이 소리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평화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원나라를 상대로 싸운 고려의 첫 승리. 기적과도 같은 전공이었다. 병사들의 환호와 장수들의 상기된 얼굴을 보며, 나의 심장은 뜨겁게 타올랐다. 나의 백성을 위협하던 적군은 전멸했다. 1만 명 중 오직 17명만이 살아 돌아간 큰 승리였다. 승리에 도취되어야 마땅했다.


허나, 그 승리 속에서 나의 눈은 오직 그녀만을 쫓고 있었다. 나의 왕후, 부다시리 공주. 그녀는 싸늘한 시체들 사이에서 단 한 사람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차마 직시할 수 없을 만큼 처절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강단과 지혜로움을 잃지 않은 여인이었다. 허나 지금, 그녀는 무너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한 시신 앞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 시신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카이두. 원나라의 맹장. 허나 그는 전장에서 전사했다.


그녀가 그를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순간, 나의 심장은 멈추었다. 아이를 잃었을 때 궁궐을 뒤흔들던 그 절규가 다시금 전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의 포효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죄책감과, 절망, 그리고 지독한 자기혐오가 뒤섞인 영혼의 비명이었다.


내가 그녀를 보내지 않았던가. 쳐들어오는 원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평화적으로 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나의 왕후. 그녀와 함께 카이두를 찾아 나섰다. 카이두는 무너져 내린 그녀 앞에서, 도저히 청을 물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차마 퇴각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나의 혈기왕성한 장수들은 밤을 틈타 습격했고, 원나라 군대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의 능력과 상관없이, 믿었던 그녀 때문에, 카이두는 전장에서 무너졌으리라.


그날 밤, 카이두 장군의 눈빛이 내 가슴에 못 박혔다. 그의 눈빛은 내게 알려주는 듯했다. 나로 인해 나의 왕후가 얼마나 불행한지, 나의 여인이 내 곁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말이다. 그 깨달음 앞에서 나는 어떠한 사고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나는 차마 나의 장수들을 말리지 못했다.


허나 역사는 오늘 이 승리를 나, 공민왕의 현명함과 최영, 이성계 장수의 용맹함으로 기록될 것이다. 고려 백성은 환호할 것이고, 모두가 오늘을 기억하며 태평성대를 꿈꿀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그녀의 영혼이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위해, 백성들을 위해 이 지독한 대의를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존재마저 대의를 위해 희생당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책하며, 영혼을 갈가리 찢어 놓고 있었다.


나는 질투해야 하는가. 나의 숙적을 향한 그녀의 저 비명에 분노해야 하는가. 허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피에 젖은 전장 한복판에서, 나의 왕후가 그 모든 짐에 짓눌려 부서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녀의 절규는 단순한 비명이 아니었다. 나와 백성들이 짊어진 모든 고통을, 그녀의 작은 어깨 위에 얹고 내지르는 소리였다. 나는 멀리서, 말없이 그녀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그 순간 그녀의 고통을 섣불리 침범하는 일이라 여겨졌다.


통곡하는 왕후의 가녀린 등 너머로 쏟아지는 차가운 겨울비가, 마치 앞으로 이 나라가 짊어져야 할 거대한 슬픔이 되어 내 어깨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공주마마는 전하께 카이두 장군의 시신을 수습할 것을 청하며, 흐느끼는 몸을 이끌고 가마에 올라탔다. 아이를 잃을 때에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 불행한 일이 연이어 벌어지니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에 휩싸인 것일까? 그녀의 눈빛은 비어 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던 눈동자는 그저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텅 빈 시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개경에 도착할 때까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나를 살렸는데 나는 그를 죽음으로 갚았구나.

내 이 빚을 어찌 갚을 수 있단 말이냐.

죽는 순간,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고, 배신감에 얼마나 치를 떨었을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내 구차한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구나.

설희야, 이 말을 나는 누구에게 전해야 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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