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정통성을 겨누는 화살

by 밤톨맘

그녀를 위해 이 모든 일을 강행했으나 그녀의 이해를 바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계획한 대로 이 지독한 개혁을 해 나갈 것이다. 처음이었다. 내게 명분이 되어주겠다고 말한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 여인만큼은 기필코 지켜내야 했기에, 내 나라 고려는 강해져야만 했다. 몽골의 잔재를 뿌리 뽑기 위해 신하들의 변발과 호복을 금지했으며, 신진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려는 정방을 과감히 폐지했다. 고려를 피폐하게 만드는 모든 그림자를 걷어내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오늘 경연은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소집되었다. 기철의 청으로, 원나라와 관련된 현안을 논하기 위해 부다시리 공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아뢰었다. 허나 왕의 권위는 물론, 공주를 모욕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기철의 요청에 불안이 스며들었다.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찜찜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함정이 있을 수 있겠으나, 나는 그를 막아낼 재간이 여전히 없었다. 더욱이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니 기철은 왕인 나 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고 부렸다. 하지만 나 또한 허수아비 왕이 되지 않겠다고, 오래전에 다짐하지 않았는가.


정전 안은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대신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오늘 이 자리에서 벌어질 팽팽한 기싸움을 예감하고 있는 듯했다. 기황후라는 거대한 뒷배를 믿고 기철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원나라는 더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북방을 들쑤시고 다니는 홍건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나는 기철 그 자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때를 기다렸다.


굳게 닫혔던 정전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기철이 걸어 들어왔다. 오늘따라 한층 더 거만한 기색이 역력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들 사이에서도 그는 유일하게 상기된 낯으로,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시선이 불쾌하게도 나의 왕후에게로 향하더니, 가증스럽게 훑어보는 것이 아닌가. 내 안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힘이 없어 나의 왕후마저 이 치욕스러운 수모를 겪게 만든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공주마마.”

기철의 목소리는 기름지고 위선적이었다.

“왕께서는 원을 섬기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하고 있는 이때, 공주마마께서는 어떠한 저지도 하지 않으십니다. 충렬왕의 왕후, 제국대장공주마마께서는 앞장서서 환관과 공녀들을 바치며 원의 황실에 충성하셨거늘, 어찌 그러하십니까?”

그는 눈을 가냘프게 뜨며 차가운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요즘 이런 기괴한 소문이 나라 안팎으로 돌고 있사옵니다. 공주마마께서 원나라 공주가 아니라 고려 왕실에서 쫓겨난 몰락한 가문의 고려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고려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겠냐는 말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런 천한 계집이 어찌 공주마마이겠습니까? 하지만 외적의 침입으로 흉흉한 이때, 공주마마의 정통성마저 문제가 되니 참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기철의 저속하고 뻔뻔한 조롱에 대신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하지만 부다시리 공주는 흔들림 없었다. 그녀의 눈빛은 새벽 공기처럼 서늘했다.


“참으로 기괴한 소문이구려. 헌데 무엇이 문제란 말이오?”

그녀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기철의 오만한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이어 말했다.


“나는 어린 시절 의주에서 엘 테구스에 의해 살해될 뻔했소. 우연히 양부모님이 나를 발견하고 길러주셨고, 고려인 부모 밑에서, 고려의 말을 하며, 고려의 땅에서 자란 내가, 고려를 생각하는 마음을 이해 못 하겠소? 오히려 고려인이면서 고려를 위하지 않는 그대가 더 문제가 많아 보이지 않소? 전하께서 고려를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어째서 제재하지 않는 것이 잘못되었다 보시오?”

과연 부다시리 공주였다. 그녀는 기철의 억압적인 기세에 꺾일 여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무례한 발언을 논리적인 호통으로 정면에서 받아쳤다. 기철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이내 짐짓 침착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고려는 원의 보살핌이 없으면 어떤 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나라입니다. 원나라 황실에 계셨으니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기철은 뜸을 들였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즐기며 보란 듯이 왕후를 위아래로 훑었다.


“곰곰이 생각을 하다 보니 저 또한 처음에는 그 소문이 헛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허나 원나라 사람이 어찌 계속 자신의 나라를 배반하는 일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제가 진상 파악을 위해 조사를 좀 하였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으니 말입니다. 공주마마를 길러주신 양부모님의 성함은 어찌 되는지요? 집은 어디쯤에 위치해 있었는지요?”


부다시리 공주의 안색을 살필 겨를도 없이, 나는 더이상 참을 수 없어 기철의 말을 거칠게 가로챘다.

“덕성부원군, 자중하시게!”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주체할 수 없었으나 참아야 했다. 이를 악물어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철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치밀하게 준비된 연극인 양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입가에는 경멸에 찬 조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사람 하나 불러도 되겠습니까? 여봐라, 그 자를 들라하라!”

그는 처음부터 나의 허락 같은 것은 구할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막아서기도 전에, 호위 병사들에 둘러싸인 어떤 한 남자가 위협적인 기세로 경연장 안으로 발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의 음흉한 미소가 정전 안을 유린하는 듯했다. 그 순간, 공주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말해보거라, 공주마마께서 너의 누이가 맞더냐?”

기철은 승리에 도취된 표정으로 그 사내에게 물었다.


“예, 제 동생이 맞습니다. 이로운, 제 동생이 확실합니다.”

사내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녀에게 흘긋 시선을 던지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는, 그 역겨운 미소. 그 비열한 웃음에 나의 온몸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느냐?”

나는 단호하게 물었다. 그러나 사내는 나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저 음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기철이 옆에서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


“이태평, 어서 답하거라! 네 동생인 걸 증명할 확실한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왼쪽 어깨에 빨간 점이 있습니다.”


왕후에게서 작게, 그러나 비통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을 응축한 듯한 한숨이었다. 이 순간, 기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철 또한 이리도 허술한 답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겨우 이런 방식으로 나와 나의 왕후를 내칠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는 나를 대체 얼마나 하찮게 본 것인가? 나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지금 내게, 이 자리에서, 어깨를 내보이란 말이더냐?”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또박또박 말에 힘을 주어 하문했다. 궁중 법도에서 왕실 여인의 신체 언급은 지엄한 금기에 속하였기에, 맨살은 고사하고 어깨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능멸죄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나의 왕후를 철저히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보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 비상식적인 질문에, 대신들 사이에서 당혹과 경악이 뒤섞인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기철에게 향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이런 기철을 죽일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감히 왕실을 능멸한 죄를 어떻게 다스리면 좋겠느냐?”

“그게, 저 자가 확실하게 증명할 방법이 있다는 말만 믿고….”

기철은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이태평을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찰나, 공주의 입술이 단호하게 열렸다.


“덕성부원군, 조금 전 원나라를 잘 섬기지 않아 내게 불만이 많은 모양이던데, 원나라의 공주인 나를 능멸한 것은 대원나라 황실을 능멸하는 것과 같을 터, 내 이를 절대 가벼이 넘기지 않을 것이다.”

덕성부원군은 주먹을 부르르 쥐며 손을 떨었다. 왕후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내 이 자리에서 당장 그대의 관직과 재산을 모두 빼앗고 옥에 가두는 것이야 말로 원나라 황실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을 터, 허나 기황후 마마와 옛정을 고려하여 묻어두고 싶으나, 또 그리하면 전하께서 설파하는 이념가 상충되니 내 이를 주장할 수가 없겠소. 전하께서는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는 것을 심히 걱정하여 정방을 폐지하였는데, 내 어찌 자네의 죄를 묻지 않을 수 있겠소?”

기철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호위 무사들이 기철과 이태평의 양옆에 바싹 붙어 섰다. 기철은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었으나, 감히 그녀 앞에서 토를 달지도 못할 만큼 그녀의 기세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공주는 나를 돌아보며 나직하나 위엄 있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전하, 덕성부원군은 감히 왕실을 능멸하고 공주인 저를 모독하였습니다. 이는 원나라 황실에 대한 도전입니다. 청하옵건대, 전하께서 엄정하게 심판하시어 마땅히 그 죄를 물어주시옵소서."

모든 상황이 이제 나의 손안에 있었다. 허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그를 벌한다면 기 씨 일당 전체를 한꺼번에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때를 기다려야 했다. 기철이 방심하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철저하게 때를 기다려야 했다.


“공주, 허나 기황후 마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소. 고려의 왕실과 원나라의 황실을 능멸한 죄, 죽음으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나, 오늘 그 은혜를 갚도록 도와주시겠소?”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은 내게 모든 결정권을 넘겨준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원망했던 내가 너무나도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수치스러운 나머지 차마 그녀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기철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깊이 숙여졌다. 그 비굴한 자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열한 안도감. 이내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살기와 자신의 안위를 챙기려는 간악함만이 자리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감히 공주마마를 능멸한 저 이태평의 죄, 마땅히 죽음으로 다스리겠나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 서 있던 이태평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제야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잠깐만!!!”

그의 눈꺼풀이 파르를 떨렸으나, 이내 다음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너에게 남긴 유언이 있다! 이대로 나를 죽이면 너는 평생 그 말을 듣지 못할 게야! 마지막으로 우리 남매에게 남긴 말을 들어야지!"

그의 시선이 공주를 집요하게 붙잡았다. 허나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혹시 그대는 자네 부모의 임종을 지켰는가? 나를 더이상 능욕하지 말라. ”


그 비열한 눈빛과 비루한 행색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유언은커녕, 임종조차 지킬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공주에게 매달리듯 뻗어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공주는 자신의 눈을 천천히, 그러나 무겁게 감았다. 하얗게 질린 주먹이 뼈마디를 드러낼 만큼 꽉 쥐어져 있었다. 마치 모든 힘을 다해 이 고통스러운 순간을 버텨내려는 듯했다. 그녀의 한숨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아득하게 담겨 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조용히 왕후궁으로 향했다. 정전의 육중한 기운과 달리, 그녀의 처소는 마치 달빛 한 조각만을 머금은 듯 고요하고 깊었다. 스르륵 문이 열리자, 익숙한 자스민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녀는 창밖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어스름한 달빛이 그녀의 옆선 위로 얇게 번지며 아름답게 조응되었다. 그 모습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같았다. 손을 뻗으면 스러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신비로웠다.


그녀에게 다가서는 발걸음 소리조차 침묵 속에 잠기는 듯했다. 그녀는 고요히 앉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돌연 고요한 적막을 깨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제 짐을 같이 짊어지시겠습니까? 원치 않으시다면 저는 이대로도 좋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거운 질문은 나의 심장까지 짓눌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 그녀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공주, 저는 공주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그 짐을 제게도 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그녀의 두 눈에서 아주 가는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가는 물줄기가 메마른 그녀의 영혼을 비로소 적시는 듯했다. 그녀의 깊은 눈빛 안에, 지난날의 애환이 아득하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로운이라는 여인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완전히 자신을 내게 내려놓았다.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외로움을 홀로 견뎌왔는지를 짐작하니 내 마음이 사무치게 아려왔다.


“그러면 공주의 원래 생일이 어찌 되오?”

“축월, 그것도 해가 가장 짧은 날에 태어났다고 합디다. 그래서 제 삶이 이리도 차고, 시린가 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슬펐다. 그녀의 서글픈 고백에 나의 가슴은 더욱 저릿했다.


“그것 아시오? 동짓날은 밤이 가장 긴 때이나, 이 시각을 기점으로 해는 길어질 일만 남았지 않소? 이제 밝을 날만이 가득할 것이오.”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가요?”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내 심장까지 따스하게 파고들었다.


“그렇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당신에게도 머지않아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오. 그리고 내가 반드시 이 고려를 그리 만들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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