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개경에서
고려 왕후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어쩌면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원나라에서 공주 대접을 받던 삶은 한순간도 마음 편치 않았다. 그 불편한 마음이 나의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움에 기인한 것인지 물어보면 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내가 하루도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한 이유는 고려를 위해 어떤 주장을 할 수도,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나를 참으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루에 한 번, 아침마다 태의감에 들러 약재들을 구해 상처 입은 공녀들에게 몰래 나누어 주었다. 나 또한 그들과 처지가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으로부터 봉인한 나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일까?
피 비린내가 익숙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생명을 살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피 비린내와 함께 비비추마저 내게서 멀어지자, 마음속 한구석에는 죄책감이라는 씨앗이 피어올랐다. 약을 몰래 전하는 ‘소극적’ 방식이 아닌, 그들을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구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고려의 왕후가 된다면 더 이상 카이두가 다칠까, 정체가 들킬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리라.
나는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려 한다. 숙영지 게르 안에서 두려움에 치를 떨던 내게, 공주가 되기를 망설이던 내게 카이두는 차갑게 말했었다.
"고려인을 구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부다시리 공주가 되십시오. 그리고 최고의 자리로 올라가십시오. 어느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가지란 말입니다. 그것이 방법입니다. 이 좁디좁은 게르 안에서 개탄해 봤자 무엇이 바뀌겠소? 그들을 구하고 싶다면 높이 올라가십시오. 그들을 구할 방법은 오직 이뿐입니다."
공주로 살아온 1년 동안 깨달은 것이 있다. 내게 주어진 권력은 오직 나의 안위를 위한 것일 뿐. 나는 그래서 이 기회를 잡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고려 왕후가 되어야만 했다.
연경에서의 열 번째 겨울이었다. 지독한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이 겨울을 다시는 마주할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고려 땅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서릿발 같은 추위가 1년의 반이나 지속됐다. 다시는 감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추위였다. 이제 내 나라, 고려로 돌아간다.
열 살의 나이에 원나라로 끌려와 십 년을 볼모로 살았다. 이국의 황궁에서 ‘독로화’라는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며, ‘케식’이라는 허울 좋은 황제의 호위병 노릇을 했다. 고려의 왕족이라는 위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선왕들은 즉위되고 폐위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원은 자기 입맛대로 왕을 갈아치웠다. 왕이 그러할진대, 백성들은 어땠으랴. 나라가 무너져가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무기력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번뇌가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눈빛은 곪고 곪아, 더는 빛을 찾지 못하는 깊은 우물이 되었다. 그저 살아가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의무인 듯, 나의 삶은 의미 없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어린 계집이 당당히 선포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에르덴 언니 대신해서 그대의 명분이 되어드리지요.’ 그 한 마디에 나는 무너져 내렸다. 부모를 잃고 고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들, 원나라 사람인 그녀는 어째서 고려 백성을 나보다 더 아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눈빛은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백성을 위하겠다는 나의 작은 염원이 결코 한낱 이상주의가 아님을,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무기력하게 숨만 쉬던 나를 채찍질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볼모 왕자인 동시에 고려의 미래를 짊어진, 미덥지 못한 왕 그 자체였다. 그녀가 명분이 되겠다고 선언한 순간, 나는 그녀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었던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철저히 나는 그녀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언젠가 나는 반드시 나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이 빌어먹을 속국의 굴레를 끊어내, 고려 백성을 평화롭게 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가 필요했다.
덜컹!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들이쳤다. 조일신이 나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감격스럽겠지. 연경에서 온갖 수모를 함께 견뎌낸 그에게도, 고려는 십 년 만의 귀환이었으니.
개경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볼모였던 내가 왕이 되어 돌아왔다. 허나 왕에게 올리는 예를 바라는 것은 나의 과한 욕심이었을까.
화려한 위용도, 열렬한 환영도 없었다. 빛바랜 궁궐 앞, 대문 밖에는 대신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몇몇 무리만 듬성듬성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환영 대신 탐색만이 가득했다. 마치 ‘이번 왕은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를 놓고 내기라도 하는 듯. 허울뿐인 왕, 그 비참함이 뼛속까지 전해져 왔다. 옆자리에 앉은 부다시리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의 고개가 절로 움츠렸다.
"강릉대군, 아니, 전하! 귀환을 축하합니다."
곁에 다가온 대신 중 한 명의 목소리였다. 그의 눈빛에서 진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에게 나는 또 다른 허수아비 왕에 불과할 터였다.
"왕후 마마께서도 무사히 도착하시어 다행이옵니다. 긴 여정에 불편함은 없으셨나이까?"
그들의 시선이 부다시리에게 쏠렸다. 호기심과 날카로운 탐색이 뒤섞인 눈길들. 원나라 공주가 고려 왕후로 오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부다시리는 달랐다. 그녀는 우리말을 구사할 줄 아는 유일한 왕후였다.
"덕성부원군께서 전하를 궁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나는 얼어붙었다. 기철은 나를 맞이하러 나오는 대신, 궁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그것은 분명한 무시였다. 부다시리가 내 옆으로 당당하게 다가왔다. 그 순간, 나는 움츠려든 고개를 들었다.
육중한 궁궐의 문이 삐걱이며 활짝 열렸다. 안에서 기다리던 대신들과 함께 기철이 앞장서 걸어왔다. 짙은 곤룡포를 입은 나를 비웃듯, 그는 가슴에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기철은 형식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을 뿐, 오만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 내렸다. 그의 입가에 조롱인지, 경고인지 모를 희미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의 눈길이 부다시리에게 닿는 순간, 나는 몸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내 나라에서 감히 왕과 왕후를 비웃다니. 그 오만함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는 모든 대신들이 들을 수 있도록 외쳤다. 내 목소리는 떨림 없이 단호했다.
"머리를 땋고 호복을 입는 것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지 않더냐!"
대신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그리고 기철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곁에 선 환관에게 명했다.
"이 자리에서, 나의 변발을 풀어다오!"
기철의 얼굴에서 희미했던 비웃음이 점점 사라졌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선왕들과 다름을, 변발을 풂으로써, 그들 앞에 똑똑히 보였다. 다른 대신들도 이제 변하는 이 기류를 똑똑히 읽어야 할 것이다.
기철이라는 거대한 벽을 부숴야 함을, 내가 굳건히 서야 함을 오늘 이 자리에서 제대로 직시하고야 말았다. 내가 굳건하지 않으면 나의 왕후, 부다시리 공주 또한 결코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그녀를 위해서 친원세력을 기필코 몰아내야 함을 뼈에 새기듯 각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