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매서운 바람은 여전했지만, 베이르테무르 위왕의 저택은 연일 훈훈한 온기로 가득했다. 에르덴 언니와 강릉대군의 결혼 준비가 한창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혼례복이 조금씩 완성될 때마다 언니는 거울 앞에서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고, 나는 그런 언니를 보며 진심으로 축복했다. 황궁에서 힘겨운 시간을 견디던 내게, 그녀는 유일하게 숨 쉴 틈을 내어준 사람이었다. 냉혹하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연경에서 그녀의 따스한 미소는 한 줄기 희망이자 위로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행복이 너무나도 완벽했던 탓일까. 하늘은 우리에게 한순간의 평화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혼례를 불과 열흘 앞둔 어느 날이었다. 에르덴 언니가 갑작스럽게 쓰러졌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병상에 누운 언니는 평소의 화사함은 온데간데없고,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저 혼인 준비에 지쳤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밤낮을 사경을 헤매던 언니는, 끝내 나지막이 나의 이름을 부르며 따뜻한 미소를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언니….”
나는 믿을 수가 없어 언니의 손을 부여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고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차마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서글픈 울음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이 차가운 연경에서 나의 유일한 빛이었던 언니였다. 나는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 슬픔 속에서도 언니의 따스한 미소가 미친 듯이 그리워 몸부림치게 했다.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기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언니의 관을 지켰다. 혼례는 국상으로 변했다. 에르덴 언니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다음 왕후 후보를 선정해야 한다는 소식이 황실로부터 내려져왔다. 이미 한 차례 국혼이 약속된 터라 서둘러 새 왕후를 맞아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연경의 황실 귀족 영애들 중, 망해가는 고려 왕족에게 시집가려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공적으로는 망국이나 다름없는 고려를 비천하다며 꺼렸고, 사적으로는 지독한 흉사가 겹친 혼사라 기피했다. 더이상 혼담이 오고 갈 여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모두가 기피하는 그 혼인에, 바야르가 왕기의 다음 혼인 상대자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버지, 저는 고려에 시집가고 싶지 않습니다. 망국의 왕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강릉대군은 기황후에게 놀아나는 허수아비일 뿐이지 않습니까?”
바야르는 왕기가 앞에 있는 자리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매섭게 쏘아붙였다.
“언니, 강릉대군에게 허수아비라니요. 말이 심하지 않습니까?”
내 물음에 바야르는 차갑게 비웃으며 눈을 번들거렸다.
“그러면 네가 고려로 가겠느냐?”
바야르는 냉소적으로 말을 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 이 참에 고려를 아예 제후국으로 만들어버리면 재밌겠구나. 너처럼 하찮은 고려 백성들을 이 황실의 발아래 완벽히 짓밟아 주마! 네 년 때문에 에르덴 언니가 그렇게 가버린 거야! 내가 네 고향 백성들에게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할 것이다!”
바야르는 나를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바야르의 광기 어린 섬뜩한 웃음이 나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럴 순 없었다. 바야르가 고려 왕후가 되는 순간, 그녀의 증오심과 냉혹한 성격으로 고려 백성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빠질 터였다. 고려를 바야르의 손에 놀아나게 할 수 없었다. 더이상 고통받는 고려 백성들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누군가는 막아서야 했다.
바로 그 찰나, 까맣게 잊고 있던 도사의 말이 벼락처럼 머릿속을 때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뿌리가 내린 듯 얼어붙었다.
‘겨울의 한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축월에 태어났구려.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동짓날이 떠오르는구려. 꽁꽁 언 땅 같아 보여도 그 속에는 물을 잔뜩 머금고 있지. 대지를 흠뻑 적실 자비의 샘물이 샘솟아 백성을 살릴 것이오. 허나 그 물은 스스로를 태우는 고통 없이는 솟아나지 않으리라.’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자비의 샘물. 고려의 백성에게 솟아날 '자비의 샘물'은 내게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나는 어쩌면 은병을 받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대가로 나의 꽁꽁 언 대지가 녹아내리고, 부서지고, 갈라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함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모든 일이 나의 숙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탓이었을까? 언니가 운명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곁에서 있었겠지. 나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일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거친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제가 고려로 가겠습니다.”
나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결연했다. 사랑하는 카이두를 저버리고, 내가 고려로 가야만 했다. 나만이 고려를 살릴 수 있으리라.
차마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를 마주한 채로는 결코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곁에 선 카이두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음을.
내가 고려로 가겠다고 선언하니, 저택에 딸린 작은 정원 앞으로 나를 불러 세웠다. 싸늘하게 시린 초승달이 어둠 속 나뭇가지 사이로 겨우 빛을 드리우는 시간이었다.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내뱉는 입김은 짙은 하얀 연기가 되어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고통이 지나가고 있었다.
“고려로 간다니요? 저를 두고 고려에 가시겠다는 말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게 깔렸다. 카이두는 애써 분노를 삭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고려 백성을 살리는 길은 이 길 뿐이지 않습니까? 고려 백성이 짓밟히는 꼴을 더이상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지킬 기회입니다. 혹여나 이 기회를 놓친다면 저는 평생 동안 후회할 듯싶습니다. 그때 장군님이 말씀하셨죠. 저는 장군님을, 장군님은 저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요. 아마 저희는 서로에게 짐이 되어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담담히 말했다.
“그 자는 그대와 생각과 뜻이 같더이까?”
그가 체념한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슬프게 들렸다.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에르덴 언니에게서 강릉대군이 사냥을 하지 않는 이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냥대회를 하게 되면 무고한 백성들이 강제 노역에 시달려서 싫다고 하더이다.”
그는 가슴 아프게 나를 응시했다.
“제가 활을 쏠 때는 앞에 과녁만 보지 말고 그 너머까지 봐야 한다는 말, 기억하십니까?
그 너머의 결과까지 예상하고 이리 결정하신 겁니까?”
그는 재차 물었으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무너진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저는 그 결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허나 저는 어쩌면 그런 운명을 타고난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모든 끝을 미리 헤아렸다면, 저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눈에서 점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당신은 저와 약조한 혼사가 장난이었습니까?”
그의 슬픈 물음에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를 마주한다면 나는 기필코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나의 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만은 그가 꼭 알아주길 바랐다. 그를 안 이후부터, 오로지 그에게만 향했던 나의 마음에 작은 오해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알지 않습니까? 장난이 아님을, 그대가 잘 알지 않습니까?”
나는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나의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가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의 음성이 너무나도 처연하여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나는 마지막 말을 뱉어내기 위해 모든 힘을 쥐어짜 내야만 했다.
“장군님은 고려를 짓밟으려고 또 오시겠지요? 황명이니까요. 저는 장군님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허나 고려 땅에서는 제가 당신을 막아서기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그대의 길을 가십시오. 저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 가치가 달랐다. 그는 생명을 거두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고, 나는 생명을 살려야만 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함께할 수가 없다. 한 길을 걷는 순간,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꼴이었으니까. 그가 전쟁에 임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내가 전쟁을 만류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가 고려 땅을 침범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말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고려로 간다면, 그를 막아설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러면 그는 나를 부정하지도, 나 또한 그를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니까.
카이두와 비극적인 이별을 뒤로하고, 나는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응접실로 향했다. 불빛조차 희미한 방 안에는 짙은 고독과 절망만이 가득했다. 왕기는 어깨를 푹 숙인 채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슬픔 덩어리가 파묻혀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힘없이 늘어진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제가 에르덴 언니 대신해서 그대의 명분이 되어드리지요.”
나의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작은 빛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사무친 고독을 털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음을 그 역시 모르지 않는 눈치였다.
“본인을 더 이상 낮추지 마십시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본인을 낮추는 것은 저와 저희 집안을 모욕하는 일과 같습니다. 허니 부디 강해지십시오.”
그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어렵게 입술을 뗐다.
“허나 당신은 카이두 장군을 연모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너무나도 염치가 없습니다.”
그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강릉대군, 지금 염치 챙길 때입니까? 제가 아니면 고려왕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나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미련이 섞여 있지 않았다.
“이 황실에 제가 잠깐 살아보니 알겠더이다. 결혼이란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사냥을 하지 않는 이유를 언니에게서 들었습니다.”
내 말에 그의 눈동자는 비로소 희망으로 찬란하게 일렁였다.
“저는 당신이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나의 선언은 명확하고도 굳건했다. 이 혼인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응답처럼 들렸다. 나의 눈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고려의 미래를 향해 있었다.
“평생 곁에서 그대를 지키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감격에 젖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짓눌린 어깨에는 지고 온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얼마나 지난한 세월을 버텨 왔을지 고통스럽게 와닿았다. 그의 어깨를 잡고 있던 나의 손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전율이 흘렀다.
연경의 황궁은 다시금 혼례 준비로 들썩였다. 고려의 강릉대군과 원나라의 부다시리 공주의 혼례는 형식적으로는 황실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경사였지만, 모든 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정치적 계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들 사이에 사랑은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단정한 관복 차림으로 혼례가 열리는 황궁 대전 앞에 섰다. 수많은 축객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들은 저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나의 심장은 꽁꽁 얼어붙은 얼음덩이 같았다. 그녀의 선택을 이해해야 했다. 이로운은 언제나 그런 여인이었으니까. 자신보다 타인이 우선인 그녀였으니까.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흘렀다. 마침내 대전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그녀가 걸어 나왔다.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형언조차 하기 어려웠다. 감히 그녀의 아름다움을 어떤 말로도 담아낼 수 없을 터였다. 붉은색과 금색 실로 수 놓인 화려한 혼례복은 그녀의 하얀 피부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고고관 아래로 살짝 드러난 이마, 그리고 오목한 이목구비는 시리도록 차갑게 보였다. 허나 그 속에는 불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의 두 눈은 이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멀고도 먼 항해를 앞둔 배처럼, 비장함과 결연함만이 가득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감히 그 누구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겠다던 다짐이 이젠 아득하기만 하다. 결국 나의 손을 떠난 그녀는 다른 사내의 손을 잡고 나아갔다. 그 다짐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졌다. 더는 그녀 없는 세상을 꿈꿀 수도 없는데...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의 세상에 그녀를 가두기에는 이로운은 너무나도 고결했다. 그녀를 붙잡는 것은 오로지 나의 욕심일 테지.
‘거기서는 어떤 의심도 받지 말고, 온전히 평온하기만을 바라겠습니다.’
내뱉지 못한 말들이 목에서 하염없이 올라왔다. 지독히도 웃을 일 없는 삶이었는데, 그녀 덕분에 참 많이 웃었다. 고마웠다는 이 말마저 안으로 삼켜내야 했다.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무의미했던 세상에 색깔을 입혀준 사람. 내 세상의 모든 빛이었던 나의 여인아. 잘 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