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도덕적이고 인간다운 사회

by 밤톨맘

고려 왕실도 피의 물결로 흘러넘쳤다. 이쯤 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피를 불러들이는 사람일까. 의주에서는 전쟁, 연경에서는 황궁의 음모, 그리고 이제 막 발을 디딘 개경에서는 대신들의 난까지. 내가 가는 곳마다 죽음과 절규, 그리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요즘따라 아버지가 더 사무치게 그리웠다. 온갖 난세의 풍파 속에서 홀로 버텼을 아버지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허나 아버지는 유배되어 개경을 떠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이 고려 왕에게는 홀로 맞서 싸우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힘겹게 서 있는 왕을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허나 주변에는 그와 뜻을 진정으로 함께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어 보였다. 그의 눈빛은 끝없이 고독했다.


나의 이름을 ‘이로운’이라고 지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에게 끝없이 질문한다.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환자의 국적이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셨다. 숨이 붙어 있는 한, 환자들의 생명을 쉬이 놓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내 머릿속에 자꾸 그려냈다.


조일신은 왕이 원나라 연경에서 볼모로 지내던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왕을 보필했던 최측근이었다. 왕을 따라 귀국한 후, 그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왕에게 기 씨 일족의 토벌을 끊임없이 청했다. 기황후의 권력이 커질수록, 기 씨 집안사람들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기철, 기원, 기륜 삼 형제는 기황후의 오라비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조정 안팎으로 그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조일신은 기 씨 일족의 몰락이야말로 자신이 우뚝 솟을 절호의 기회라 여겼던 것이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더욱이 조일신은 나라의 인사권을 쥐락펴락하는 정방을 장악하고,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만 벼슬을 주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인재라 할지라도, 그에게 돈을 쥐어주며 굽실거리지 않으면 결코 관리가 될 수 없었다. 조정은 점점 더 자신의 잇속만을 주장하는 부패한 관리들로 채워져 갔다. 어느 누구도 위태로운 백성을 진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왕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자, 결국 조일신은 기 씨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따르던 최화상과 독단적으로 일을 꾸몄다. 그의 계획이 치밀하지 못했던 탓일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목숨을 잃은 것은 기원 단 한 사람뿐이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조일신은 기황후의 후환이 두려웠던 것인지 비정하게도 자신의 심복이었던 최화상마저 죽여 자신의 죄를 덮으려 했다.


나라가 무너지면서 개인의 도덕적 양심마저 무너진 것일까? 본인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따랐던 제 사람마저 서슴없이 쳐냈다. 헌데 과연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 치부할 수 있겠는가? 최소한 인간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정된 국가였다면 이들은 일말의 양심은 남겨두었을까? 그저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었다면?


절대적으로 인간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한, 오늘의 호의호식이 내일에도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었다.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 이런 죽임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었다. 하늘이 내린 존귀한 생명이 고작 한 인간의 권력과 선택에 따라 좌우되었다. 시대를 탓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개인을 탓해야 하는 것인가? 이 혼란 속에서 나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비난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공민왕은 조일신도 끝끝내 처형하고 말았다. 한번 시작된 반란은 이내 진압되었지만, 또 다른 반란이 다시금 피어났다. 이 비극이 되풀이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무고한 병사들이 죽어갔다. 내 눈앞에 힘없이 쓰러져 간 그들을 보며, 이제 나는 더이상 그들을 위해 지혈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마마, 아니되옵니다. 마마의 손이 피로 더럽혀집니다.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사옵니다.”

내 발치에 쓰러진 병사를 보며 망설임 없이 팔을 걷어붙이자, 나의 시중을 드는 어린 설희가 작은 몸으로 나를 막아섰다. 개경에 도착하자마자 내 곁으로 온 아이였다. 나는 다급하게 설희에게 되물었다.


“그래도 숨을 쉬고 있지 않느냐?”

설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저희가 하겠사옵니다. 마마께서 지혈하는 법을 일러 주시면, 나머지는 저희가 하겠사옵니다.”

완곡하게 청하는 그 아이를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고려 왕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처절하게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이것을 기대하고 고려에 온 것이 아닌데. 내 생각과 냉혹한 현실 사이가 너무나도 멀었다.


마음이 버거울 때마다 에르덴 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언니를 잃은 뒤, 그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개경으로 떠났다. 참으로 마음이 허했다. 언니가 자주 끼던 팔찌 하나를 품었다. 그녀가 그리울 때마다 나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톡톡 건드리며 마음을 달랬다. 언니의 그리움이 나날이 커질 때쯤, 설희라는 아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이름마저 ‘설희’, 눈 오는 겨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이름. 그 아이를 처음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너도 나와 같이 추운 겨울에 태어났겠구나. 꽁꽁 얼어 있던 나의 마음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주는 존재였다.


꽤 오래전부터 자스민 차를 가까이했다. 카이두 덕분에 처음으로 마셔보게 된 자스민 차는 시야가 밝아지면서 참으로 신선하고 좋았는데, 이제는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릴 만큼 의존하게 되었다. 밤마다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잔을 놓지 못했다. 자스민 차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음에도, 아직도 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자책 때문이었을까?

“마마, 전하께서 안으로 드시나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창밖을 멍하니 보던 나를 설희의 차분한 목소리가 현실로 불러들였다. 조용한 방 안은 은은한 차 향기로 가득했다. 나는 황급히 자세를 고쳐 앉아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리했다. 묵직한 어둠을 가르고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렸다. 촛불조차 잠들어 버린 고요한 복도를 가르며, 공민왕의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발은 굳건하게 바닥을 내딛었으나, 방 안으로 들어선 그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둠이 짙어서였을까.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욱 깊고 공허해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춰 그를 맞이했다.

“이 늦은 시각에 어쩐 일로 걸음 하셨습니까?”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내가 앉아있던 탁상 앞에 마주 앉았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숨을 고르는 그에게서 끝없는 피로와 깊은 회의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이내 내 앞에 놓인 찻잔으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공민왕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공주께서 근심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이리 찾아왔습니다. 연경이 그리워 자스민 차를 늘 곁에 두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염려가 깃들어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찻잔 속에서 피어오르는 자스민 향이 유독 시리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으나, 이 향기가 연경의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가 아니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숙청의 피비린내를 잠시나마 덮어주기 때문이었다. 시리고 아픈 현실이 나의 밤을 자꾸만 앗아갔으니까.


“그저 생각이 많아 쉬이 잠들지가 않습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시는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단조로움이 섞여 있었다. 아마 그는 내 고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나는 주저했다. 그의 심정을 알기에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그러나 결국 내 속 깊이 곪아 터진 물음을 던지고야 말았다.


“전하께서는 연이어 숙청을 거듭하고 계십니다. 그들도 신하이기 전에, 한 명의 고려 백성이 아닙니까?”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옅은 김마저 잠시 숨을 멈춘 듯했다. 공민왕은 길게 침묵했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떨리는 눈빛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는 것이 보였다. 한참 후,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과 함께 비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주가 생명 하나하나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 모르지 않소. 허나 원의 세력에 빌붙어 나라를 좀먹이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저 일당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고려는 결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원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악입니다. 나의 백성들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오.”

그의 말은 논리적이고, 절박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피로 물들여 있었다. 자스민의 강렬한 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피 냄새였다.


“죽이고 죽이는 일은 결코 끝나지 않는 무한 굴레가 될 뿐입니다. 힘이 없어도 모든 생명을 절대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나라라면,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권력을 탐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러하면 생명을 앗아가야 할 이유 또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민왕은 탁상을 쾅 내려치며 애써 눌러왔던 울분과 답답함을 토해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참아온 분노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공주! 공주는 마치 허황된 꿈을 꾸는 것 같소. 저들을 응징하여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악행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야 합니다. 지금 고려는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더이상 어떤 것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소.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죽어가고 있단 말이오. 나는 이 고려를 강건하게 재건할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라를 좀먹는 썩은 부분부터 모조리 도려내야 하지 않겠소?백성을 위한 유일한 길은 저 친원 세력을 처단하는 방법밖에 없단 말입니다.”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내게 재차 확인했다.

“공주는 정녕 나와 뜻이 같지 않았소?”

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같은 뜻. 백성을 구하자는 뜻. 그 목적은 같았으나, 수단이 달랐다. 나는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 그들을 먼저 말로 설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입에서 짧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 웃음소리는 참으로 서늘했다.

“공주는 정말이지... 꿈속에 사는 구려. 저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왕이 직접 나서서 설교한다 한들, 정녕 저들이 깨우칠 것이라 생각한단 말이오? 아니요. 그들이 스스로 깨우치지 않는 한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깨우칠 만한 어떤 장치도, 이 망가진 고려에서는 더이상 찾을 수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그의 말에 나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나는 정녕 꿈속에서 사는 것인가? 나는 선뜻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카이두를 떠난 이유는 그와 나는 본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명을 앗아가야 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생명을 살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선택한 공민왕 또한 생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단지 다른 점은, 왕권을 강화하여 백성을 구한다는 것. 백성을 위한다는 '목적'이 나와 같을지 몰라도, 피 흘리는 '수단'은 놀랍도록 카이두와 동일했다. 나는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목적이 정당하다면, 설령 그 수단이 옳지 못한, 피의 길일지라도 과연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더 큰 다수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피 흘리는 소수의 희생은 과연 허용해도 마땅한 것인가? 허나, 만일 허용되지 않는다면, 나라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 이 고려에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저 악인들을 대체 무엇으로 처벌하고 응징할 수 있단 말인가?


처참하게 짓밟힌 채 죽어간 수많은 백성들의 시신이 떠올랐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고도 나는 저 악인들의 생명마저 존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말로는 죽어 마땅한 자라고 골백번 외칠 수 있겠으나, 과연 한 인간이 생명을 거두는 일을 정녕 정의로운 행위라 볼 수 있단 말인가? 폭력은 폭력으로 갚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 나의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 아려왔다.


나 또한 그저 악의 근원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는가? 허나 나라가 망가졌기 때문에, 국가에 어떤 기대도 걸 수 없기에, 저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큰 권력과 부를 원했던 것이라면? 환경이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라면? 그러하면 그들 또한 시대의 피해자일 수 있지 않은가? 세상은 여전히 힘의 논리로 흘러갈 뿐, 도덕이 온전히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단순히 악인이라고 치부하기 힘든 것이다.


공민왕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 삶을 지향하는 성리학을 들여왔다. 그 학문을 배운 신진사대부를 기꺼이 등용하며, 스스로 깨우칠 장치를 고려에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육성하고자, 김득배, 이색과 함께 성리학을 고려에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혼신을 바치고 있었다. 내게 화를 내며 몰아붙이던 그가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고려의 무너진 기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한시도 편히 쉰 적이 없음을,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음을 따스하게 안아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허나 그가 진정한 성군이 되려면 모든 백성을 굽어 살펴야 함을 이렇게라도 일러둘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 같은 날은 그런 내가 몹시도 싫었다.


그가 자신의 뜻과 같지 않았냐고 구슬피도 물을 때 나는 어떤 답도 해주지 못했다. 더이상 내가 그와 뜻이 같지 않다는 듯한 확신의 눈빛이 나를 참 서글프게 만들었다. 애써 삼켰던 말을, 입에서 맴돌고 맴돌던 말을 아무도 없는 빈 궁에서 홀로 뱉어낼 뿐이다.


“도덕적이고 인간다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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