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무너진 왕좌를 피로 세우다

by 밤톨맘

조용하던 궁궐이 갑자기 들썩였다. 원 황제가 기황후의 아버지인 기자오를 경왕으로 봉한다는 조서가 도착한 것이다. 이는 명분상 고려왕실의 경사였으나, 기철을 비롯한 기 씨 일족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만큼 기고만장하여, 왕실의 권위를 위협함에도 왕인 나조차 어쩔도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저들의 오만함이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음을 저들은 알지 못했다.


조정을 비롯한 권문세족들은 황제의 뜻을 기리며 성대한 축하 연회를 열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나는 이를 응당 받아들였다. 기원의 아들이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고려에 왔으니, 이제 수개월, 아니 수년간 벼려온 나의 칼날이 기 씨 일당을 한꺼번에 없앨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최측근들과 밤샘 회의를 거듭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획을 세웠다. 정전 안뜰의 지형을 익히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발걸음을옮겼고,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려댔다.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 밤은 고려의 역사서에 피로 기록되리라. 이것이 과연 옳은 길인가 수없이 자문했지만, 이미 활은 시위를 떠났다. 백성을 위하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선 기꺼이 피 묻은 왕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궁궐 호위 무사들의 숨죽인 기척과 자객들의 서늘한 기운이 궁궐 곳곳에 감돌았다. 기철은 술에 취해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들뜬 얼굴을 보니 나의 피가 차게 식어갔다.


화려한 음식과 흥겨운 음악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짐짓 화기애애한 얼굴로 잔을 드는 기철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안의 분노는 더 깊어졌다. 기철은 거나하게 취했는지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전하께서도 이제야 대원황실의 위엄을 아셨을 줄로 믿습니다. 소신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경사가 있었겠습니까?”

뻔뻔하고 역겨운 그의 말에, 나는 숨을 죽이고 간신히 미소 지어 보였다. 그래, 마음껏 떠들어라. 너의 그 오만함이 오늘로써 마지막이될 터이니.


연회는 무르익었고, 기철을 비롯한 기 씨 일족은 치솟는 위세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 확신하며, 방자하게 웃고 떠들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하늘에 닿을 때쯤, 마침내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순간이 찾아왔다.


"기철!!"

내 목소리가 매섭게 연회장을 갈랐다. 모든 소리가 멎더니, 잔치의 흥에 취했던 모든 자들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황금 잔을 바닥에 내리쳤고,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너는 왕실을 능멸하고 국정을 농단한 죄가 크다! 이 모든 죄는 오직 죽음만으로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부르짖음이 끝남과 동시에, 미리 잠복해 있던 병사들이 마치 저승사자들처럼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기철은 술이 덜 깬 듯 멍한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뒤늦은 경악과 공포가 서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감히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줄은.


나의 명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철퇴를 휘둘렀다. 철퇴가 피와 살점을 터뜨릴 때마다 끔찍한 비명이 터졌고, 역한 피비린내가 연회장을 뒤덮었다. 음식들은 붉은 피가 섞여 진흙처럼 변했고, 술병과 술잔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눈앞의 광경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나는 차마 눈을 돌리지 못했다. 이 피로써 다져질 새로운 고려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왕으로서 내가 택한 길이었다. 기철과 그의 형제들은 물론, 기 씨 일족의 주요 인물들이 그 자리에서 처단되었다.


처절한 피의 잔치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 나의 왕후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으리라. 나의 잔혹함에 그녀가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까, 경멸의 눈으로 나를 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허나 후회하지 않았다. 고려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이 피가 반드시 필요했다. 저들은 개화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었다. 왕후와 내가 꿈꾸는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저런 파렴치한들이 설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의 개혁정책들이 기 씨 일족들 때문에 한 치도 진전하지 못했으나, 나라를 어지럽혀 놓은 그 모든 일당들을 제거하니, 고려는 비로소 기나긴 악몽에서 깨어나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나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동북면병마사 유인우와 군사령관 이자춘의 활약으로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고 옛 고려의 영토를 회복했다. 원나라의 기관인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여 고려의 자주권을 선포했다.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한 뒤, 개혁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키도록 했다.


정치토론장인 서연을 재개함으로써 원로와 사대부들이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하도록 했다. 첨의사와 감찰사에 힘을 실어 백성들을 위한 기탄없는 보고를 할 것을 명했으며, 정치의 옳고 그름을 바로 잡는 데 주력했다. 관제를 문종 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하였으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원의 연호마저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명실공히 개혁정권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비로소 내 손으로 쓰러져 가는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새로운 나라를 향한 희망이 백성의 얼굴에 드리우고, 마침내 나에게도 밝은 미래가 펼쳐지는 듯했다.

하지만 세상은 나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원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던 홍건적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 땅으로 물밀 듯 밀려오고 있었다. 약탈과 살육을 거듭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한다는 보고가 연이었다. 내 오랜 숙적을 겨우 물리쳤거늘, 이제 하늘은 더이상 나의 편이아닌 것인가.


“개경이 곧 함락될 것 같습니다. 서둘러 피난을 떠나셔야 합니다. 전하!"

“나라가 위험에 빠졌는데 임금이 어찌 도망을 갈 수 있겠느냐?”

“전하가 살아 계셔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부디…!”

나를 빼다 박은 듯 똑같이 생긴 환관 안도치가 몸을 낮게 엎드리며 절박한 목소리로 청했다.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수백 년 동안 고려의 심장이었던 개경도 결국 함락되는구나. 수도를 빼앗긴 왕, 이 치욕을 어찌 감당해야 하는가. 이제야 개혁에 힘을 싣는 듯하였는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바로 세우려 했던 고려는 또다시 수렁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가마는 거친 흙길을 미친 듯이 달렸다. 덜컹거리는 흔들림 속에서 나의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 창밖은 아비규환이었다. 찢어지는 비명. 피 냄새. 사방에서 피어 나오는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홍건적의 발굽 아래 짓밟힌 들판에는 초가지붕이 불길에 붉게 번져갔고, 미처 피하지 못한 백성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가마를 따라 허겁지겁 내달리는 피난민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쓴얼굴로 왕의 가마를 노려보는 듯했다. 피난길에 마주치는 백성들 앞에선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부덕한 나 때문인 듯싶었다.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환관 안도치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내 안의 깊은 절망이 밖으로 터져 나온 나의 얼굴 같았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니라”


충렬왕 이후로 고려는 제대로 된 상비군 하나 없었다. 군왕을 경호하는 순군부와 치안을 담당하는 병사가 다였다. 그마저도 원나라의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왜구와 홍건적의 잦은 침입, 그리고 왕실 내 권력다툼으로 수많은 병사들은 이미 무수히 죽어 나갔다. 이런 빈약한 병력으로 어떻게 개경을 수복한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했다.


“애통교서를 내리시옵소서, 전하!”

그때, 절박한 음성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총병관 정세운이 나섰다. 기철 일당을 주살할 당시 김용과 함께 나의 계획에 동참한, 충성심깊은 장수였다. 김용과 정세운은 원나라에서 숙위 하던 시절부터 나를 보필했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덕택인지, 나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일에 늘 앞장서 주는 고마운 신하들이었다.


“전하께서 스스로 반성하시는 애통교서를 내리시어,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10만의 홍건적을 물리칠 병사들을 모병하셔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들에게 간절하게 호소하는 교서인 애통교서는 나라에 큰 위기나 재난이 있을 때 왕이 백성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며,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자고 내리는 특별한 교서였다.


"하지만 백성들이 군영에 모여든다 한들, 홍건적의 철기병을 무슨 수로 당해낼 수 있습니까? 훈련도 받지 못한 고려 백성은 전장에서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싸늘하게 비웃는 듯한 김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언제나 정세운을 견제하려 들었다. 총병관 자리를 김용에서 정세운으로 교체하자, 김용은 그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었다. 김용은 궁녀를 강간하고 대신들의 부인과 간통을 일삼는 등 처신이 올바르지 못하여 부다시리 공주는 늘 내게 그를 멀리하라고 당부했다. 불법적 행위를 거듭하기는 했지만 내 편에 선 몇 안 되는 대신들 중 하나였기에, 나는 그를 차마 내치지 못했다.


“애통교서는 곧 내릴 것이다! 총병관 정세운은 당장 장수들과 개경을 수복할 방책을 논의하라!”

“예, 전하!”

정세운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기운차게 대답했다. 그 기운찬 목소리에, 비록 어설픈 희망일지라도 붙들 수 있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가별초도 전쟁에 참여하라고 전하라.”

“이성계라 하시면… 그저 일개 시골 무장에 불과한 자가 아닙니까?”

김용은 의아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굳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쌍성총관부를 되찾은 것이 동북면병마사 이자춘의 활약이 아니더냐. 그의 아들, 이성계 또한 능히 아버지를 능가하는 용맹한 장수라들었다. 분명 이번 전쟁에서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급하게 떠난 피난의 종착지는 경상도 복주(안동)였다. 밤낮으로 복주의 임시 행궁에서 총병관 정세운 주도로 개경 수복 작전 회의가한창이었다. 안우, 이방실, 김득배와 같은 최고의 장수들이 모여 지도를 펼쳐놓고 격렬하게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다. 그들은 잃어버린도성을 되찾기 위한 필사의 작전을 짜냈다.


더불어 애통교서 덕분에 백성들이 군영으로 물밀 듯이 쏟아졌다. 삽시간에 고려군의 병력도 20만이나 되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으나,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연함이 그보다 더 단단했다. 눈빛만큼은 어느 장수 못지 않았다.


“전하! 이성계 장군의 가별초가 도착하였습니다!”

하늘을 가를 듯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문이 활짝 열리고 한 젊은 장수가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북방의 거친 바람을 닮은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기세. 그와 함께 도착한 가별초는 피난과 고된 행군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는 군율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고려군의 사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최영 장수의 기합 소리에 맞춰, 군영에 모인 백성들이 창과 칼을 휘두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훈련은 어두운 밤까지 계속되었다. 횃불 아래 비장한 표정의 그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했다. 이 모든 백성들이 나라를 위한 마음 하나로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왕인나는 백성의 어버이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나라를 되찾고 백성을 굽어 살펴야 할 것이다. 이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도록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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