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비비추 향에 스민 여름의 그림자

1부: 개경에서

by 밤톨맘

아버지가 데워 놓은 물 항아리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욕실 전체를 후끈한 온기로 감쌌다. 욕조에 물을 채우는 손길을 멈추고, 나무 선반 위 아담한 달항아리를 조심스레 기울였다. 투명한 비비추 오일이 진득하게 흘러내리며 몇 방울 떨어진다. 아니, 오늘은 이 지독한 피비린내를 씻어내려면, 달항아리 속 오일 절반 이상을 들이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올여름을 넘길 만큼 양은 여유로웠고, 곧 여름이 오면 다시 비비추 꽃을 꺾어 얼마든지 채울 수 있을 테니까.


따뜻하게 데워진 물 위로 투명한 막이 옅게 드리우고, 비비추 향이 아스라이 피어올랐다. 비 갠 숲 속의 흙냄새를 닮은 그 은은한 향이나의 온몸을 감싸는 순간만큼은, 고요한 정적이 허락되었다. 창밖은 싸락눈이 희끗희끗 날렸지만, 문틈 사이로 넘어오는 겨울 추위도 머지않아 물러날 것이다. 해가 정중앙에 선 정오의 공기 속에서 나는 이미 더운 여름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나는 다시금 들판으로 나설 것이다. 뜨거운 여름 공기가 비비추 향을 한껏 품어 올려 내 모든 후각을 마비시키는, 그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고려의 제일 끝,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원나라와 국경지대를 접하고 있는 이곳, 의주에서는 아버지와 나는 매일같이 피비린내를 맡았다. 처음에는 거란족이 약탈과 수탈을 일삼았다고 했다. 그 뒤를 이어 여진족, 그리고 지금은 몽골족이었다.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혈투. 그 싸움의 한가운데서 아버지는 묵묵히 환자들을 치료했다. 나는 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어 온갖 무기로 짓이겨진 상처를 끊임없이 지혈했다. 썩어가는 고름을 짜내느라 손끝은 무뎌져갔다. 그 끔찍한 피비린내는 이제 집안 곳곳에 스며들어, 단 하루도 진동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일반 농민에게 칼이 어디 있으랴. 호미는 더이상 흙을 고를 때만 사용되지 않았다. 핏물이 채 마르지 않은 호미 자루를 쥔 그들의 눈빛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나라는 힘이 없지만 백성들은 살기 위해 발악했다. 허나 온갖 수탈이 난무하는 난세에, 그 거센 피바람을 맨몸으로 맞선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나는 매일같이 마주했다.


“로운아, 얼른 끝내고 자거라.”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오롯이 어머니의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미용에 좋다는 약초와 꽃잎들을 가마솥에 한껏끓여 수증기로 오일을 추출했고, 남은 찌꺼기엔 황토를 섞어 팩을 만들었다. 낮에는 아낙네들 집을 돌며 시범을 보이고 물건을 팔았다. 밤이면 산 중턱 집으로 돌아와, 욱신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내 모든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는 몸속까지 파고든 피비린내를 채 다 씻어내기도 전에, 서둘러 몸을 일으켜 정리를 시작했다. 어쨌든 이곳은 어머니의 소중한 공간이었으니까. 어머니보다 키가 두 뼘이나 더 큰 나는 길게 늘어진 나무 선반 위, 온갖 약초 항아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매를 벌지 않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마루 밑에 회초리를 항상 가까이 두었으니까.


뜨겁게 데워진 몸 위로 겉옷을 걸쳤다. 비비추 향 가득한 습한 수증기를 뒤로하고 문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홀로 새빨갛게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앞에 웅크린 아버지의 뒷모습에 시선이 닿았다. 오늘은 유난히 태워야 할 천 조각들이 많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피와 고름으로 더럽혀진 헝겊들을 묵묵히 불에 던지고 있었다. 보통 같으면 나의 목욕이 끝날 무렵엔 아버지 역시 이미 방으로 들었을 시간이었다.


밤이면 공허한 짐승 울음소리 외에는 어떤 기척도 닿지 않는 고립된 곳이다. 이따금씩 우레 같은 몽골군의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쿵쿵 울릴 때면, 온몸이 마비될 만큼 저릿했다. 요즘 들어 그 진동의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유배 생활은 어느덧 십 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골짜기 깊숙한 이곳에서, 아버지는 병든 이들을 치료했고 어머니는 화장품을 팔아 겨우 생계를 이어 나갔다. 한때 고려의 명문가인 청주 이 씨 가문의 문신관료로, 부족함 하나 없이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시점은 이 산골짜기에서의 삶만이 모든 기억의 전부였다.


그러나 오빠는 달랐다. 여전히 귀하디 귀한 귀족가문처럼 굴었고 어머니는 그런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개경에서 살고 있었다. 이곳의 삶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을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도 지어 보였다. 나는 오빠가 예전에 누렸던 이야기를 할 때마다 꿈을 꾸는, 정신 이상이 있는 망상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히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헛된 환상에 젖어 현실을 외면하는 대신, 이 혹독한 환경 속에 끈질기게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나는 아버지의 뒤를 그림자처럼 밟으며 의술을 익혔고, 어머니에게는 오일을 추출하는 기술을 배웠다.


“로운아, 네 오라비는 집에 들어왔더냐?

문지방을 넘을 때 치마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는지 아버지는 뒤돌아보지 않고도 내 발걸음을 알아차렸다.

“예. 이제 제가 태울 테니, 아버지는 들어가서 쉬세요.”

아버지 손에 들린 부지깽이를 잡아들었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헝겊 하나라도 놓쳐서는 아니 된다. 오늘만 너에게 부탁하자꾸나.”


아버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둠이 바닥까지 내려앉은 밤에도, 휘몰아치는 산등성이를 꿰뚫어 보듯 한참을 앞만 바라보았다. 아버지도 오늘은 참으로 피곤한 날일 터였다. 부상당한 환자들을 끊임없이 받아낸 하루였다. 더군다나 오늘같이 죽은 자가 많은 날에는 아버지의 가라앉은 기운은 나조차 침잠하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갔음에도 한참이나 나는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아버지는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권문세족의 부패를 눈감아 줄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결국 반역의 모함을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다행인지 모를 유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왕은 아버지의 직언을 감히 높게 사 목숨만은 살려주었던 것이다. 차라리 그때 모든 가족이 죽음으로써 이 고달픈 삶을 끝내는 게 오히려 나았을까? 이 의문은 끝없이 나의 뇌리를 감싸고돌았다.


수탈을 일삼는 외적뿐만이 아니라, 첩첩산중 깊숙이 파묻힌 이곳에서, 우리는 이제 짐승의 위협으로부터도 몸을 지켜야 했다. 피비린내는 단순히 불쾌한 냄새가 아니었다. 굶주린 호랑이를 비롯한 산짐승들은 이 냄새를 맡고 얼마든지 내려올 수 있었다. 조금만 발을 들여도 산세는 험악했고, 한밤중이면 호랑이의 포효 소리가 섬뜩하게 귓가를 할퀴었다.


아버지는 밤마다 피와 고름으로 더럽혀진 헝겊 조각들을 묵묵히 태우고 또 태우셨다. 환자가 적은 날에도 거르지 않았다. 이 일은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의식이 되어갔다. 아궁이 위, 가마솥에서는 나의 목욕물이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아버지는 내가 피비린내를 목욕으로써 씻어내고 있음을 잘 알았다. 표현이 대단하지 않아도 욕조 앞에 가지런히 놓인 물 항아리만 보아도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