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는 오월의 햇볕 아래서조차 살을 에는 삭풍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게 되는 땅이다. 오랫동안 뼛속까지 파고든 매서운 추위에 시달린 이곳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여름'이라 답하리라. 혹독한 겨울의 기억마저 단숨에 녹여내는 뜨겁고 너그러운 계절, 그 여름은 황량했던 대지에 푸른 생명을 불어넣고, 모든 것을 관대하게 감싸 안는다.
칠월, 비비추가 마침내 제 계절을 맞이했다. 산기슭은 온통 보랏빛 물결로 넘실거렸다. 모진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피어난 여린 꽃송이들은 영롱한 빛을 머금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햇살 아래 송이송이 흩뿌려진 듯 피어난 비비추 꽃을 보고 있노라면, 이 너른 들판에 선 순간만큼은 세상 어떤 걱정과 근심도 쉽사리 가까이하지 못했다. 꽃잎 사이를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은 마음속 모든 불안을 속삭이듯 잠재웠다. 고요한 평화가 온몸을 감싸는 시간이었다.
어제, 여리고 연한 비비추 꽃대들을 한 아름 수확했다. 식용이든 약재 기름이든,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 햇빛 아래서 온전히 바짝 말리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평상 가득 가지런히 놓인 비비추 꽃들 위로, 툭하고 검은 그림자가 내리앉았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
“이게 뭐가 좋다고, 매일 같이 따 오냐 말이다.”
난데없이 날아든 비비추 꽃 한 송이가 내 시야를 가로질러 차가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나는 이태평의 얼굴 따위는 올려다볼 가치도없다는 듯, 그저 묵묵히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뒤집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의 입꼬리는 분명 기분 나쁘게 비죽 올라가 있을 터였다.
“오라버니한테 도와달란 말 안 했어. 방해나 하지 마.”
“어머니 따라 방문 판매에 직접 뛰어드는 건 어때? 네가 가야 매출이 확 오른단 말이지! 아버지 곁에서 수발만 들지 말고.”
내 귓가에 맴도는 이태평의 잔소리는 꼭 어머니의 음성 같았다. 어머니는 내가 꼭 자신의 젊은 시절을 빼닮았다며 기특해하면서도, 노골적인 질투를 보냈다. 어머니는 늘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런데 이태평 또한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그 시선을 따라 하며 지겹도록 성가시게 굴었다.
“방문 판매 따라다니잖아.”
“일주일에 한 번 가지고 안 되니 하는 소리지.”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일었다. 오늘따라 그 끈질김이 유난했다. 어머니의 사주라도 받은 것일까. 아니면 여름마다 비비추를 찾아 들판으로 몇 시간씩 사라지는 나를 그저 못살게 굴고 싶은 것일까. 허나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내년 여름까지 버틸 비비추 꽃을 채워두려면, 오늘도 기필코 들판으로 나가야 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없이 짚으로 엮은 가방을 어깨에 질끈 둘러맸다.
“로운아.”
방 안 문이 열리는 순간, 약재 향 사이로 환자의 기침과 아버지의 음성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아버지의 얼굴이 약재 김에 가려 희미하게 보였다. 이내 아버지의 시선이 내 어깨의 가방으로 향했다.
“산세가 험하니 오늘은 태평이와 함께 길을 떠나거라.”
아버지는 아침 일찍부터 준비한 든든한 채비들을 보았던 것일까. 집 근처 들판에 핀 비비추 꽃은 이미 다 수거했음을, 오늘은 기암절벽까지 갈 셈인 것을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까막절벽에 갈 모양이더구나.”
기암절벽.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그곳은, 깊이와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새까맣게 잠겨 있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그 절벽을 까막절벽이라 불렀다.
“아버지! 그런 험한 곳을 왜 제가 동행해야 합니까?”
이태평의 목소리에 날 선 짜증이 묻어났다.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나 또한 그가 함께하는 길이 반갑지 않다는 것을 어찌 그리 모를까.
“집에서 먹고 놀면서 그 정도도 안 하려고 했더냐?”
아버지의 말에 오라버니의 두 뺨이 벌게졌다. 옹졸한 자존심이 긁힌 자국이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아버지의 뼈 있는 한마디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통쾌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뾰로통한 얼굴을 몇 시간동안 마주하며 산행을 감내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잔뜩 뿔이 난 이태평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골머리가지끈거렸다.
집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숲으로 들어섰을 때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투덜거리는 이태평을 쏘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유시(저녁 5시~7시 사이)까지 여기서 보는 걸로 해. 대신 저번처럼 기다리게 하지 마.”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콧김이 씩씩거렸다. 전에도 종종 그랬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그는 저잣거리를 쏘다녔다. 이번에도 풍물패나 실컷 보다 오라지.
“됐어. 저번처럼 들키면 난 이번에는 죽은 목숨이야. 가만 보면 넌 날 은근히 골탕 먹이는 재주가 있어. 내 오늘 너를 혼쭐을 내주겠어. 오라버니를 어찌 모셔야 하는지 알려줄 테니 잘 듣도록!”
이태평은 이런 식으로 말이 많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이골이 난 나지만 비비추 꽃을 수확하는 일만큼은 내게 노동이 아니라 내 하루의 낙. 아니, 내 삶 전체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에게 더럽혀지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럼에도 그 어떤 분노도 평온한 가면 아래로 감춰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이태평이 바라는 반응이었으니까. 그는 내가 좌절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요즘 새로 들어오는 성리학에서는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 했거늘. 너는 어찌 매사가 계집애 같은 조신함이 없느냐?”
내 눈동자에 짜증이 서렸다.
“이 고려는 불교 사상을 따르지 성리학을 따르지 않아.”
그는 마치 나의 비아냥을 비웃기라도 하듯 턱을 치켜들었다.
“두고 봐라, 불교는 속세에 찌들었어. 땡중들이 시주를 노골적으로 바라는데 이것이 어찌 나라를 어지럽히지 않겠느냐? 고려는 곧 망할 거다.”
그의 확신 찬 목소리에 나는 찬물을 끼얹었다.
“성리학을 제대로 읽은 게 맞아?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이 말을 그렇게 해석하다니! 분명 사내들이 성리학을 들먹이며 여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까 벌써부터 두렵다.”
“뭣이 어째? 성리학은 진귀한 게 흘러넘치는 원나라에서 들어온 학문이야.”
이태평과 대화하면 늘 이렇다. 목을 가다듬는 것을 보니 이제부터 자신의 말이 왜 맞는지 설파가 시작될 참이었다. 나는 그가 말을 시작하기 전에 냉큼 물었다.
“어머니는 오늘도 지순이네 가셨어?”
나의 질문은 그의 흐름을 단박에 끊어놓을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래. 어머니가 방문 판매 가실 때 너도 자주 동행하는 건 어떠냐?”
그는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나도 따라나서잖아.”
“일주일에 두 번은 가줘야지. 더이상 바라지 않을게.”
내가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일. 어머니와 함께하는 방문 판매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쳐졌다. 어머니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목 좋은 지순이네 집에서 내 얼굴에 황토 팩을 얹어 두고자신이 만든 화장품을 홍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이 팩이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효능을 가졌다며 ‘군계일학’, ‘경국지색’ 같은 민망한 말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쏟아냈다. 황토팩이 얼굴을 온통 가려 주어 망정이지, 그 자리에서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민망하니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매번 졸라봐도, 어머니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네 미모를 왜 썩혀두려고 하는 것이냐. 어미가 수익 좀 올린다는데 불만인 게야? 네 미모는 이 어미로부터 물려받았으니 그 정도의 지분은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어머니는 개경에 살 적부터 소문이 자자한 미인이었다. 지금도 얼굴에 주름 몇 줄 깃든 것 외에는 젊은 날의 고운 자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왕실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공주와 옹주들에게 미용 비법을 전수하며, 그들 사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마당발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유배로 개경의 화려한 인맥과 미모 가꾸는 일을 더이상 공유할 수 없게 되자 한동안 무기력이 그녀를 감쌌다. 하지만 지순이네 아주머니를 만난 이후로 삶에 활력을 되찾아 갔다. 더군다나 원나라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오가는 의주는 어머니의 새로운 활로가 되어 주었다. 드넓은 초원에서 거칠고 건조한 바람에 단련된 몽골 여인들의 피부는 윤기 없이 푸석하기 일쑤였고, 강렬한 햇볕 아래 검게 그을려 있었다. 돈 꽤나 있는 원나라 여인들이 어머니의 주된 고객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몽골어를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고, 작게는 그들의 의식주에서 크게는 민족성과 문화까지 배워 나갔다. 무엇이든 터득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야 했으니까.
내 외모는 어머니를 빼닮았을지언정, 융통성 없는 나의 속은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탓에 어머니가 외모에 집착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마치 인생의 가장 큰 과업처럼 여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조차도 어떻게 하면 더 예뻐질지 궁리했다. 그러니 어머니와의 대화는 좀처럼 이어질 리 없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외모 집착 덕분에 가계 수입에 보탬이 될 때도 있었으나, 문제는 그 수익 대부분을 재료 구입에 고스란히 투자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우리 집의 진정한 수입 원천은 오로지 아버지로부터 기인된 것이었고, 그 누구도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까막절벽 근처 들판의 비비추는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아, 여느 들판의 것보다 그 향이 더욱 짙었다. 코끝을 찌르는 맑고도 청아한 향기는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의식마저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폭포수 물안개가 내려앉는 자리의 비비추가 단연 으뜸이었다. 물방울을 머금은 보랏빛 꽃잎은 영롱한 보석처럼 반짝였다. 몽환적인 물안개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하늘에는 희미한 무지개가 번졌고, 보랏빛 꽃송이와 어우러져 세상은 신비한 색으로 잠겨 들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야생화의 여린 감촉에 내 모든 신경이 온전히 사로잡혔다. 향기에 깊이 취한 나는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야생화들을 하나, 둘 소중히 거두어 갔다.
이태평은 호미를 들고 까막절벽 아래 폭포수로 향했다. 저녁 식탁에 오를 석이버섯을 생각하는지 그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제철을 맞은 석이버섯은 소금을 살짝 뿌려 불에 구우면, 능히 고기 맛에 견줄 만큼 귀한 식재료였다. 고기는 꿈같은 사치였으니, 그 허기진 마음을 석이버섯으로 달래는 것이 백성들의 현실이었다.
절벽 바위에 매달려 자란 버섯이야말로 으뜸이었으나, 그는 언제나 손쉬운 폭포수 주변만 훑으며 버섯을 찾았다. 비비추처럼 그곳에도 석이버섯이 지천으로 돋아났을 것이다.
한참 비비추 꽃을 부지런히 채취하던 중, 등 뒤에서 쩌렁쩌렁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태평의 목소리였다. 나는 들고 있던 삽을 내팽개치고 그가 있는 쪽으로 매섭게 달려갔다.
맹수라도 마주친 것일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달리는 와중에도 가방을 더듬어 단도를 움켜쥐었다. 가방 속은 단도, 헝겊 조각, 비비추 우린 물통이 한데 뒤섞여 요란한 소리를 냈다. 거센 폭포수 소리를 뚫고 터져 나온 이태평의 절규에 내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단도를 더욱 꽉 움켜쥔 채 폭포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니, 그곳엔 이태평 혼자 거대한 검은 그림자 앞에 넋을 잃은 채 서 있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여 안심이 되었다.
“무슨 일이야? 산짐승이라도 잡은 거야?”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떨리는 손가락으로 검은 그림자를 가리켰다.
“절벽에서 사람이 떨어진 모양이야…”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거대한 그림자는 사람의 몸뚱이였다. 나는 지체 없이 달려가 그의 앞으로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폈다. 차가운 살갗 위로 손을 얹으니, 희미하게나마 맥박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왼쪽 가슴팍 아래에서 터져 나온 피는 멈출 줄 몰랐다. 푸르스름한 핏줄이 드러난 하얀 살갗 위로, 검붉은 솟구치고 있었다. 이 정도 출혈이라면, 이미 폐를 넘어 심장까지 치명상을 입었을 터였다.
나는 황급히 가방에서 헝겊을 꺼내 상처 부위를 사력을 다해 압박했다. 하얀 헝겊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이 사람을 당장 아버지께데려가야 했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하고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이 사람, 당장 업어!”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 목소리는 의도했던 것보다 더 단호하고 크게 튀어나갔다. 쩌렁쩌렁한 내 외침에 이태평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당장 업어?!”
긴박한 상황에서도, 나의 명령조 어투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괘념치 않았다.
“이대로 두면 죽을 거야.”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이 덩치 큰 사내를 어떻게 업고 내려가라는 말이야? 이 가파른 산길에서!”
그는 자기 몸집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사내를 업고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이 불만인 것이다.
“당장 아버지께 보여드려야 해!”
내가 할 수 있는 응급처치는 오직 지혈뿐이었다. 손톱 밑이 사내의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상처를 보니 호랑이 발톱에 짓이겨진 것 같다. 이 말인즉슨 우리도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지. 근처에 호랑이가 있을 거야. 서둘러 내려가야 해.”
“호랑이는 절벽 위에 있어! 이 아래에는 없어! 아마 호랑이 공격을 피하려고 절벽으로 몸을 던진 모양이야.”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이태평은 말끝을 물고 늘어질 기세였다. 속이 타들어 갔다. 헝겊을 덧대도, 피는 끊임없이 솟구쳤다. 이제는 나의 손바닥까지 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나는 이태평을 응시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그를 설득해야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내줘야 했다.
“일주일에 두 번! 방문판매 따라다닐게!”
그가 눈을 반짝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일주일에 세 번!”
“아까는 두 번이라며!”
나는 소리치며 가방에서 비비추를 우린 물통을 꺼내 들었다. 피로 흥건한 그의 가슴 위에, 조심스레 부어냈다. 비비추는 소염 효과가 있다. 여름철 상처는 쉽게 감염되므로 빨리 조치해야 한다. 집에 가서 비비추 가루를 듬뿍 뿌리는 것이 더 좋겠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원나라 병사인 것 같다. 괜히 살려줬다가 고려인인 우리에게 득 될 게 하나도 없을 거야.”
이태평은 시간을 축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태평은 사내가 입은 어깨부터 발목까지 이어진 ‘델’과 무릎까지 오는 장화, ‘고탈’을 가리켰다. 한복과 전혀 다른 옷차림이었다.
“알았어! 세 번! 더이상 말하지 마! 당장 업어!”
내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이태평의 말대로 언젠가 이 원나라 사람이 고려인의 고혈을 빼앗아 갈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내는 갑옷을 입지 않았다. 원나라 상인이거나 그저 평범한 백성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생명에는 사사로운 감정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또한 아무리 중상을 입은 환자일지라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늘 입이 마르고 닳도록 말씀하셨다.
이태평이 마지못해 사내를 들어올린 순간, 그의 옆구리에 달린 작은 향 주머니가 긴장으로 혼미했던 나의 정신을 깨웠다. 코끝으로 낯설고도 이국적인 향이 훅 들어왔다. 지독한 피 냄새 사이로 달콤하면서도 꽤나 쌉싸름한, 관능적인 향이었다. 그 향이, 내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