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옹기라트 가문의 둘째 아들, 카이두

by 밤톨맘

아버지는 오라버니가 업고 온 건장한 사내를 조심스레 부축했다. 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묵직하게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가슴팍을 꽁꽁 동여맨 천 덕분에 어느 정도 지혈은 되었지만, 당장이라도 상처를 꿰매야 했다. 아버지의 손이 사내의 가슴팍에 묶인 천을 움켜쥐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나는 말없이 약방으로 향했다. 차가운 쇠 바늘을 이글거리는 불꽃에 갖다 대자, ‘치이익’ 하는 짧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스르르 사라졌다. 약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명주실 뭉치를 꺼내 아버지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숨소리가 달라지고 있었다. 손에 쥐인 바늘처럼, 아버지의 숨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그의 온 정신이 바늘 끝으로 응축했다. 방을 가득 채운 건 아버지의 뾰족하게 벼려진 숨과, 사내의 희미한 숨뿐이었다.


그는 간헐적으로 의식을 찾았다 잃었다를 몇 날 며칠을 반복했다. 매일 아침마다 나는 상처 부위를 깨끗이 닦아냈고, 아버지가 건네준 약초가루를 상처 위에 꼼꼼히 뿌렸다. 습하고 후덥지근한 여름날에는 상처 부위를 더욱 자주 살폈다. 내일이면 상처를 꿰맨 명주실을 제거해야 했다. 실을 오래 두면 살에 파묻혀 또 다른 염증을 유발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한 고비는 넘겼지만 여전히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마는 여전히 뜨거웠다. 어제 밤새 달인 약을 그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약이 그의 열을 어서 내려줘야 할 텐데.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나는 거친 숨소리를 내쉬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연유로 그 깊은 골짜기를 홀로 찾아들었을까. 참 무모한 사람이었다.


그를 집으로 데리고 온 이후로 나는 아버지로부터 까막절벽은 출입금지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비비추와 함께할 때야 비로소 온전해지는 나를 이태평은 끝끝내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호랑이의 샛노란 눈은 살벌했고, 덩치는 어마어마했다며 어찌나 아버지 곁에서 나불거리던지. 정작 마주치지도 않은 호랑이를 정면에서 본 사람처럼 떠들어대는 바람에, 내 혀가 절로 내둘러질 지경이었다. 분명 호랑이는 절벽 아래가 아니라 위에 있다고 주장해 보았으나 아버지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지금 누워 있는 이 사내처럼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동물이었으니까.


늘 그랬듯 모든 환자들을 최선을 다해 돌보았다. 허나 그날 이 사내에게서 맡은 관능적인 향 때문이었을까? 그 누구보다 마음이 쓰였다. 피로 얼룩진 델을 벗기고 깨끗한 저고리와 바지를 입혀 놓으니 어쩐지 고려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순간 두 눈이 깜빡거리더니 째진 눈매 사이로 늑대 같은 살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찢어지는 고통이 끝없는 심연으로 나를 끌어내렸다. 거대한 몸집과 달리 네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재빠르던 녀석이었다. 순백의 새하얀 나의 야생마, '차나'가 곁에 있었다면 두 무릎을 말 허리에 고정시킨 뒤, 매서운 화살을 호랑이 두 눈에 쏘아붙였을 텐데. 그랬다면 샛노란 눈동자가 꿰뚫려 절규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겠지. 성미가 고약한 '차나'는 이 사냥을 즐겼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호랑이의 공격을 받은 뒤였으니 살 길은 오직 이 길뿐이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시퍼런 폭포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고려 말이 어렴풋이 들려오기는 했으나 여전히 혼미했다. 가슴에 불타는 듯한 찢어지는 고통이 나를 나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누가 감히 나의 몸을 제멋대로 만지고, 옷을 벗기고 입혔다 하는 것인가.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살의가 으르렁거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이마를 문지르고 또 문지르며 불타는 나의 몸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헌데 옅게 퍼지는 이 풀꽃의 향기는 대체 무엇인가? 이 향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타는 듯한 고통을 이토록 가라앉히는가.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앞을 응시했다. 뿌연 안갯속에서 윤곽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를 차갑게 식히던 여인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내 햇살을 등진 채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희고 말간 얼굴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차나'가 떠올랐다. 가지런히 정리된 순백의 털을 뽐내던 차나. 고귀한 혈통임을 아는 듯한 눈빛.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오묘한 눈동자.


"정신이 드시오?"

목구멍을 긁어야지만 낼 수 있는 몽골 말씨를 제대로 구사하는 이 여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당신은 누구오?" 나는 고려말로 그녀에게 답했다.


"고려말을 할 줄 아시오?" 그녀의 깊은 눈동자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가슴의 통증으로 신음 소리가 짧게 흘러나왔다.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까막절벽 아래에서 당신을 발견했어요. 마침 오라버니와 제가 그곳에 있었고, 당신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아버지가 의원이라 바로 치료할 수 있었고요."

그녀는 나를 도로 눕히며 상처 부위를 확인하며 답했다.


"그런데 어찌 몽골 말을 하실 줄 아시오?"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도, 제가 몽골 말을 할 줄 아는 게 제일 궁금하신 모양입니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스로 비껴간 사람에게서 기대한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고심 끝에 고른 말이 진심 어린 감사가 아니라, 내 뜻밖의 물음 때문에 번진 웃음이었다.


"이곳은 의주입니다. 어릴 적부터 원나라 사신들의 화려한 행렬을 수도 없이 보았고, 몽골 말을 유창하게 하는 고려인 상인들 또한 꽤나 많지요. 몽골 말을 배워두면 요긴하게 쓰일 데가 많습니다. 그러는 당신은 어찌 고려 말을 하시오?"


“저는 옹기라트 가문의 둘째 아들, 카이두라 합니다. 위왕 베이르테무르 집안의 첫째 딸과 정략결혼이 예정되어 있지요. 베이르테무르 어르신은 고려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분이라 그 가족이 고려를 자주 오갔습니다. 덕분에 저 또한 어릴 적부터 그들과 함께하며 고려 말을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지요.”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지난 세월의 무게가 혀끝에 잠시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의주에서 베이르테무르 어르신의 막내딸, 보르지긴 부다시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일이 십 년이 다 되었지만 저는 의주에 방문할 때마다 그녀의 행방을 찾아다니곤 합니다."


혼인은 가문의 명예에 따른 것이었다. 감정이 아닌, 의무이자 책임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의주에 발을 디딜 때마다,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었다. 허나 나의 신분을 노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에게 나의 상황을 그대로 고하고 있는 것인가. 나를 치료해 주었다는 마음의 빚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오늘 그녀에게 진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오?"

여인은 그 질문이 뜻밖이라는 듯 살짝 눈을 깜빡였지만, 이내 차분히 답했다.

"이로운이라 합니다."

"이롭다에서 따온 이름입니까?"

"맞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가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길 바라시는 마음에서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녀는 약초가루가 든 작은 항아리 뚜껑을 닫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좋은 이름입니다."


그녀는 내 말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나의 왼쪽 손 약지에 끼어진 정략결혼 반지를 그녀에게 주며 이어 말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값나가는 물건은 이 반지뿐이니 받아 주시오."

"이 반지는 과분합니다. 그저 다음에 이 쪽으로 들르시거든, 이에 상응하는 치료비를 주시면 됩니다. 보아하니 결혼반지 같아 보이는데 챙겨두십시오."


내가 다시 올지 아닐지,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그녀는 나의 반지를 거절했다.

"그러면 내가 다시 이곳에 돌아와 그 돈을 치를 때, 이 반지를 돌려주시오. 그러니 지금은 당신께 잠깐 맡겨두겠소."

이리 제안하지 않으면 그녀는 반지를 끝내 받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자신의 소매 사이 깊숙한 곳으로 넣어두었다.


며칠을 아니 몇 주를 이곳에 머물렀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쯤 부대는 난리통일 것이다. 내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으니 내 휘하의 황실 직속 부대는 아수라장이 되었겠지. 황실에서 맡긴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이 지연될 수밖에. 아직 고려를 범하기에는 시기상조이거늘. 이번으로써 개경을 몇 번이나 방문하는지 모를 일이다. 테곤 테무르는 늘 답을 정해두었다. '지금이 전쟁할 때입니다.'라는 말을 가져올 때까지 나를 고려로 보내고 또 보낼 것이다.


내 머릿속은 오직 적을 단 한칼에 쓰러뜨릴 방법만을 생각한다. 무자비한 전장에서는 확인사살을 위한 두 번의 공격은 용납되지 않으니까. 피 흘리는 전장에서, 각종 무기로 쇠 냄새가 가득한 군막에서, 피는 그저 불쾌한 냄새라고 치부하기에는, 이 냄새와 평생을 함께 걸었다. 그것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죽음을 부르는 냄새였다. 한순간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날선 긴장만이, 나를 생존케 했다.


자스민 찻잎이 든 천 주머니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언제든지 마실 수 있도록 했다. 전장에 나서기 전, 차 한 모금은 내게 목숨과도 직결된 것이니까. 한 모금에도 감겼던 눈이 매섭게 떠지고, 심장 박동이 거세지며 피가 발끝까지 고루 퍼지는 순간, 나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게 돌아갔다. 내 일생, 한 순간도 조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 나는 나른한 향기에 난생처음 깊고도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풀꽃 향은 나의 근육을 이완시키더니 이제 나의 정신마저 마비시키는구나. 내 후각은 풀꽃 향을 좇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자스민을 들이켜야 할 때라고 끊임없이 아우성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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