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비를 부르는 등불 아래, 민초들의 처절한 몸부림

by 밤톨맘

강철을 먹고사는 사내인지 회복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이태평을 따라 등짐이 휘청거릴 만큼 땔감을 구해 오고, 며칠을 쓰고도 남을 물을 길어 올리며 그는 쉼 없이 자신의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다친 근육을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듯, 끊임없이 움직이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모습이었다.


처음 그가 눈을 떴을 때, 나를 올려다보던 눈에는 섬뜩한 살의가 번뜩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내가 약초를 나르고, 갈고, 달이는 모든 과정을 조용히 바라보며, 마치 그 순간을 음미하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내일까? 이제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사람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조심스레 두리번거렸다.


“무얼 찾으시오?”

“내 가슴팍에 있던 작은 주머니 못 보았소?”

“향 주머니 말인가요?”

“향이 진하지만 향 주머니가 아니오. 찻잎이오.”

“물에 흠뻑 젖어 있어서 햇빛에 널어 두었습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찻잎을 한데 끌어 모았다. 비비추의 맑은 향은 이 찻잎 앞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비추 꽃 몇백 송이와 맞먹는 강렬한 향이었다. 대체 무슨 꽃잎이길래 이토록 향이 진할 수 있을까? 관능적인 향에 끌려,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요 몇 주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덕분에 찻잎 상태는 꽤 괜찮아 보입니다.”

“어머, 자스민이 아니더냐?”

지나가던 어머니가 향을 맡았는지 이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화색이 돈 얼굴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고려 왕실에 방문할 때면 공주마마께서 아주 기분 좋을 때나 꺼내 놓던 귀한 찻잎인데, 어찌 여기에 있는 것이냐? 원나라에서 수입해서 먹는 귀한 찻잎이거늘!"

찻잎을 헝겊 주머니에 넣는 것을 막아서며 그가 물었다.

“찻잔이 있소?”


그가 우린 '자스민'이라는 차를 한 잔씩 받아 들고 우리 가족은 평상에 옹기종기 앉아 함께 홀짝였다. 단 한 모금에도 진한 향이 입안 가득 맴돌더니,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은 듯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산 깊숙한 곳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두 뺨의 열기를 식혔다. 밤에는 칠흑처럼 어두운 곳이지만, 낮에 내려다보는 산주름은 가히 장관이었다. 더욱이 '개안된 눈'으로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일은 꽤나 신선했다. 온 세상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활기 넘치는 여름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삐 움직여야 할 이 시기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여기저기서 흉년이 들 거라는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반도의 여름은 장대 같은 비로 하늘을 요란하게 울려댔으나, 올해만큼은 비조차 내리지 않았다. 마른하늘만 계속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차 한 모금과 시원한 바람에 그런 근심은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을 터였다.


“이 비싼 차를 어찌 가지고 있소?”

어머니는 그에게서 무엇이라도 캐려내려는 듯 번뜩이는 눈으로 카이두를 바라보며 물었다.

“원나라에서는 구하기 쉬운 물건입니다.”


"내 고려 왕실에 있었던 적이 있어 꽤 압니다. 원나라에서도 이 귀한 차는 황실에서만 즐겨 먹었다지요?"

"그랬던 적이 있었지요. 허나 세월이 많이 변했습니다."

어머니의 궁금증 가득한 질문 공세를 예상이라도 한 듯, 곧이어 그가 말했다.

"저는 내일 새벽 일찍 떠날까 합니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 꼭 갚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당신처럼 쓰러져 가는 이를 본다면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시오.”


아버지가 찻잔을 기울이며 나직이 답했다. 아버지는 세상이 이러해야만 비로소 올바르게 돌아간다고 믿는 분이었다. 호랑이 같은 강적과 맞서려면, 우리처럼 힘없는 백성들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 신념 덕분에, 글공부만 하던 문신 관료였지만, 아버지는 어떻게든 의술을 익힌 것이다. 허나 우리 집이 수많은 환자를 받아냄에도 산골짜기 언덕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환자가 치료비를 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아버지에게 결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 순간, 사내가 움찔했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 선명하여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나는 또다시 그의 눈에서 날카로운 살의를 보았다. 어쩌면 그는 장군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다.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죽이는 일에 훨씬 더 능숙할 테니까.


“로운아, 오늘 기우 연등회에 참석할 것이냐?”

아버지가 물었다.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자 왕명으로 각 고을에 기우제를 성대히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특히 국경 지역인 의주는 단순한 제례로 끝나지 않았다. 이국 사신들에게 나라의 부를 과시하는 성대한 잔치이기도 했으니, 다채로운 등불들이 오색찬란하게 밤을 밝히는 연등회까지 함께 열릴 터였다.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이 행사는 잠시나마 시름을 잊게 해 줄 위로가 되리라.


“예, 아버지”

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태평은 들고 있던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방문을 활짝 열고 방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오늘도 이태평은 나를 골려 놓을 작정인 것이 분명했다. 그가 동행하지 않는 한, 여자인 내가 이 야밤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아버지는 결코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팔관회 같은 대규모 행사와는 달리, 오늘 같은 기우 연등제에는 나서지 않았다. 때문에 이태평이 저렇게 나온다면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가 안겨주는 패배감을 고스란히 안고 잠을 청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활과 화살을 아버지 앞에 내려두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함께 가더라도, 저는 단도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제 한 몸은 저 스스로도 지킬 수 있어요. 그리고 활도 곧잘 쏘고요.”

“네 적중률은 인정하마. 허나 파괴력이 없지 않느냐? 네 팔뚝을 보거라. 어설프게 맞은 산짐승이 더 사납게 돌진해 온다는 사실을 모르더냐?”


“오라버니에게 파괴력은 있을지 모르나 적중률은 영(0)에 가깝다는 사실을 아버지도 모르지 않지 않습니까?”

주몽이 세운 고구려를 이어받은 이 고려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활쏘기 실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이태평에게는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아니 된다.”

“아버지”

나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호랑이 습격으로 산행이 금지된 나는 휘황찬란한 연등회를 보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앞으로 내가 가는 길마다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게 부처님께 불공이라도 드릴 참이었는데.


“제가 따라나서도 되겠습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 사내는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자네는 아직 회복이 덜 되지 않았나? 여기서 저잣거리까지 길이 꽤 멀고 험하다네. 어디에서 산짐승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니 그 몸으로 활을 쏘기에는 무리가 있네.”


“잠시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카이두는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아버지의 활과 화살을 손에 쥐더니 이내 어깨에 겨누었다. 순식간에 시위는 당겨졌고, 활은 장작을 향했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장작은 맥없이 갈라졌다. 도끼로 패도 낑낑거리던 이태평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복숭아 빛 노을이 하늘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곧 달빛마저 삼키는 어둠이 찾아올 터였다. 연등에 불이 하나둘 밝혀지면, 가뭄으로 메말랐던 백성들은 단비 같을 하루를 기대하며 삼삼오오 모여들 것이다. 살짝 들뜬 나머지 나의 발걸음이 춤을 추듯 나풀거렸다. 오늘만큼은 이태평에게 놀아나지 않았다. 내가 신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화살 실력이 대단하오.”

나란히 걷고 있는 사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칭찬으로 대신했다. 한참 뒤, 그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렵지 않소?”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물었다.

“무엇이 말이오?”

“이 거리를 깜깜한 밤에 홀로 돌아오려고 했다니. 놀랍소”

그는 험난한 산세에 놀란 얼굴이었다.


“제가 산짐승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고려로 쳐들어오는 적군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카이두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듯 하오.”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원나라 군대의 장군이시죠?”

그가 흠칫 놀란 눈으로 내 옆모습을 응시하고 있음을 느꼈다.

“왜 그리 생각하시오?”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손바닥에는 칼이나 활을 오랜 시간 다루어야만 박일 수 있는 굳은살. 그리고 당신의 눈빛.”

살의 가득한 눈빛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그저 '눈빛'이라고만 덧붙였다. 그는 한참을 침묵한 뒤 물었다.

“후회하오?”

“무엇을 말이오?”

“원나라 사람인 나를 살린 것을 말이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그가 이어서 물었다.


“내가 두렵소?”

“나는 당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무고한 생명이 그만 희생되길 바랄 뿐입니다. 저희 가족은 환자라면 고려 사람이든, 원나라 사람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병마를 이겨내고 삶을 함께 살아가길 바랄 뿐이지요.”


정말이지 그가 두렵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이 힘없는 고려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뿐,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물론 여전히 옛 고려가 그리운 이태평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고려에만 특별히 향하는 애국심 또한 없었다. 오히려 그와 나란히 걷는 이 순간, 오라버니와 함께 다닐 때보다 더한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태평과 동행할 때는 산짐승을 만날 것에 대비해 내가 지닌 단도의 위치를 항상 확인했고,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도록 손에 쥐고 있을 때가 허다했다. 헌데 이 사내와 함께하고 있는 지금, 단도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않았다.


거리거리마다 잡귀를 잡는 탈춤이 신명 나고도 뜨겁게 판을 달구고 있었다. 횃불 사이로 매서운 사자탈이 악귀를 집어삼킬 듯 큰 입을 쩍 벌리며 쿵쿵거렸다. 북소리, 장구소리, 피리소리가 요란한 가락으로 밤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악귀가 물러가고, 간절한 염원을 담아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너도나도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니 그 열기를 어찌 막을 수 있으랴. 신명 나는 가락에 맞춰 뛰어놀며 웃음꽃을 잃지 않았으니, 이를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 시름을 잊고자 흥을 돋우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내게는 이 모든 소리가 무릎 꿇지 않으려는 처절한 저항으로 들렸다. 우리 민족의 고통은 끝없이 이어졌다. 수십 년간 이어진 외적의 침입에 사연 없는 가족이 없었다. 전장에서 아버지나 아들을 잃었거나, 원나라에 어리디 어린 딸을 공녀로 바쳐졌다.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눈물을 너무 흘려 실명에 이르기도 했다는 말이 어찌 과장된 소문이겠는가. 그 한 많은 세월을 잠시라도 잊고자, 그 누구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발을 굴리고 또 굴리며 춤을 추는 것이다. 어찌 저 몸짓이 단순히 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살기 위해 발악하는 몸짓이었다.


나는 하루에도 생사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마주한다. 아버지를 따라 사명을 다하고 있지만, 피비린내가 익숙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매일 밤 숨결까지 배어든 피비린내를 비비추로 씻어내야 했다. 그럼에도 때론 그 지독한 잔향이 나의 영혼까지 파고들었다.


절규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죽은 자의 혼을 달래듯 울려 퍼질 때면, 어찌 살아가야 하나 막막해 보여도 산 사람은 또 살아간다. 또다시 웃을 날이 올 것임을 알기에 오늘 하루도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아니, 수십 년 전부터 그러지 못했다. 나라는 백성을 지켜야 함이 마땅하거늘, 풍전등화 같은 고려 왕실에선 어떤 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말, 과연 그럴까? 현실이 고달파도 희망이 있다면 살아갈 지언대, 난세에서는 이 실낱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지독한 고통 끝에 죽음에 이르는 환자들이 차라리 더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살기 위해 발악하는 그 모습들을 찾아 헤맨다. 어쩌면 나 역시 그 처절함을 닮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메마른 논바닥을 따라 개천으로 걸음을 옮겼다. 흙빛 물이 낮게 흐르는 곳에서 아낙네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연신 키를 물속에 담갔다 꺼냈다 했다. 손목을 크게 휘두르자 물결이 왈칵 튀어 올랐다. 키에 닿는 물소리가 '찰찰, 칼칼' 빗소리처럼 정겹게 울렸다. 마치 물속에 풍성한 곡식이라도 담겨 있기라도 한 듯, 그들은 반복해서 물을 까불렀다. 나는 흐르는 물에 손을 가만히 담갔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물줄기. 그 감각 위로 절박한 속삭임을 흘려보냈다.


‘부디 백성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시어 비를 내려주소서.’


거리마다 형형색색의 연등불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오색 빛깔로 빛나는 연등을 단순히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백성들의 염원 그 자체였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글거리는 전 부치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따라붙었다. 개천에서도, 주막에서도, 어디를 가나 귓가에는‘빗소리’가 맴돌았다.


나는 등 뒤에서 그림자처럼 걷고 있는 그를 데리고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왁자지껄한 소란 가운데, 구석진 자리를 잡고 전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달큰한 막걸리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기름진 전의 따스한 온기와 달큰한 막걸리 한 잔이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눈길 닿는 곳마다 뛰노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시야를 채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나의 묵직한 염려가 막 피운 향의 연기처럼 사그라지는 듯했다.


나는 손에 든 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저잣거리에서 잃어버리셨다면서 어찌 산속을 헤매는 것이오?”

“아, 바스비쉬”

그는 누구를 말하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스비쉬?”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르지긴 부다시리, 집에서는 그녀를 ‘바스비쉬’라고 불렀소. 악령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하려고 붙여진 별칭이었는데, 악령을 막고자 했던 그 이름이 무색하게, 그녀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저잣거리에서는 그녀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소. 혹시나 해서 산속을 뒤져본 것이오.”


“잃어버렸을 당시는 몇 살이었습니까?”

“다섯 살”

내가 의주로 오게 된 나이와 똑같았다.

“그러면 본인이 원나라 사람인지 조차 모를 나이입니다. 어느 고려인 양부모님 밑에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위안을 주려는 것이오?”

그의 시선이 한 층 날카로워졌다. 나는 흠칫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 하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녀는 공주요. 그녀의 아버지인 위왕 베이르테무르 어르신은 공주를 찾으실 때까지 이곳, 의주로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증표 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혼란 통에 잃어버린 것이라 증표가 될 만한 어떤 물건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왼쪽 어깨에 빨간 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설령 왼쪽 어깨에 점이 있다 한들 어찌 아녀자의 어깨를 확인하신답니까?"

나는 내심 놀랐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참, 운명의 장난입니다. 저도 왼쪽 어깨에 빨간 점이 있습니다. 이곳 의주로 온 것도 제 나이 다섯 살이 되던 해였지요.”

그가 찾는 부다시리라는 공주는 나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묘한 기시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면 당신이 부다시리가 아닌지요?”

그의 눈동자에 장난기 어린 빛이 떠올랐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알지 않습니까? 저는 제 어머니를 빼다 박지 않았습니까?”

“알지요. 그저 농으로 던져 본 말입니다.”

그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더니, 눈길은 여전히 나를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

“농도 하실 줄 아십니까?”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번지더니, 그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저 딱딱하고 무뚝뚝한 남자도, 농담도 던지고 장난도 칠 줄 아는, 그저 평범한 사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기우제의 열기와 연등의 환한 물결로 넘실대던 의주성은 이내 등 뒤로 아련하게 멀어져 갔다. 왁자한 소음 대신 고요가 내려앉은 밤길을 묵묵히 거슬러 올라갔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이 우리의 발걸음을 나직이 감쌌다.


“간절히 기도드리면 비가 올 것이라고 믿소?”

그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소.”

카이두가 걸음을 멈췄다. 이내 냉철한 음성이 이어졌다.


“지금 세상은 힘의 논리로 흘러가는데,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린다 해서 이 나라에 침범하는 군사들을 막아낼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소이까?”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무력감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피를 흘리는 환자를 지혈하고 또 지혈해도 변하는 건 없더군요. 내일이면 또 피 흘리는 다른 환자를 마주해야겠지요. 허나 죽이려는 자들을 상대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정복하고 굴복시키고,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힘의 논리, 그런 권력 같은 건 전 모르겠습니다. 그 싸움에 왜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 나가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숨을 잠시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저 사람보다 위대하고 거대해서 감히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신이라는 존재 앞에 잠시 기대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위로를 받는 겁니다. 그 대단한 존재 앞에서 말입니다."


이 모든 고통과 전쟁이 마치 그의 잘못인 양, 몰아붙이듯 말한 까닭일까? 그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이든, 병사든 그저 힘의 논리로 움직일 뿐일 텐데.


마침 노란빛의 반딧불이 하나가 밤공기를 가르며 유유히 우리 앞을 지나갔다. 뒤이어 '퐁퐁' 셀 수 없이 많은 빛들이 어둠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수를 놓는 은하계 별들 같았다. 온 산이 반딧불이로 뒤덮여 반짝이는 풍경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웠다. 이렇게 눈부신 밤에,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더이상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참 예쁘지 않습니까?”

나의 물음에 고개를 들더니 그의 시선이 반딧불이에 머물렀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나지막이 읊조린 그의 음성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당신에게서 나는 향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마주했다. 품속에 품고 있던 헝겊 주머니를 꺼내 들어 그의 앞으로 조심스레 내밀었다.

"비비추 꽃입니다."

그가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주머니 끝을 살짝 풀자, 말린 비비추 꽃잎 향이 밤공기 위로 희미하게 퍼져갔다. 그가 코끝을 대고 들이쉬었다. 잠시 눈을 감는가 싶더니, 어딘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이 향을 맡으면 긴장된 몸도 이완되더군요."

그의 한마디에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 낮에 마신 자스민 차와는 다르지요. 지금까지도 각성되어 있는 걸 보니 과하면 잠을 방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릴 수도 있지만 한 번 맛을 보면 끊을 수가 없지요."

"가실 때 비비추 꽃잎을 챙겨드리겠습니다. 잠이 오지 않거든 드시면 좋을 겁니다."

"저는 당신을 데려다 드린 뒤 바로 떠날 것입니다."

순간 그가 당장 떠난다는 말에 나의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어진 그의 말에 내 안의 모든 온기마저 사라졌다.


“제가 드린 반지는 장에 팔아다 쓰셔도 됩니다. 사람 일이라는 것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제 다시는 볼 일이 없겠군요.”

그가 반지를 찾으러 오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소매 사이를 뒤져 반지를 돌려주려는데, 그가 나의 손을 막아섰다.


“제 생명을 살려 주신 값으로 친다면 반지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반지를 이곳에 두고 가야 제가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간청하는 그의 눈빛에 나는 반지를 다시 품 안에 넣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내가 챙겨주는 비비추 주머니 하나만을 품에 넣고 길을 떠났다. 뒤돌아보는 일조차 없었다. 멀어져 가는 그의 등 뒤로, 희미한 비비추 향이 밤공기 위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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