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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Jan 22. 2022

모와 도 사이

계획대로 안 될 순 있지만, 뜻대로 가볼 일

장날에만 인산인해를 이루는 외진 골목길 모퉁이에 식당 문을 열었다. 돌아보면 1년 또는 6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신기루 같은 꿈을 꾼 것 같다. 이제 겨우 영업을 시작한 지 8개월 정도이지만, 이야기는 한아름이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이면 팀원들의 식당 운영이 자리를 잡고 남편이 나의 후임으로 그 역할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나는 입학 후, 바로 휴학해버린 대학원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복학해야 한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인생이 꼭 내 생각 같지 않았다.




농사를 지으며 농업 관련 기술교육이나 해당 단체들의 강연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용하는 농약과 화학자재들이 농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고자 시작한 '친환경'농업은 이제는 고소득 작물로써의 의미가 더 크다.

조금 더 값을 지불하고, 내 몸에 이로운 상품을 사는 소비행위는 오랫동안 친환경 생협으로 자리매김한 업체(?)에서 '몸에 좋은 물'을 판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품과 트렌드로써의 친환경은 무분별한 취수가 생태계 파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필 겨를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루시드폴의 노랫말처럼,  '살아가는 게 마치 죄인'까지는 아니어도 인간도 뭇 생명들이 생명 본연의 과제인 '살아남아 종족을 번식하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재미와 과시를 목적으로 한 소비를 최소화하려 노력하고, 소비한 물품은 그 쓰임을 다 할 때까지 사용하려 노력한다. 생명의 무게는 모두 같으며, 자연 만물이 그러하듯 나도 나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나를 살리는 일체의 생명들에 책임을 가지려 노력한다.


친환경 운동은 '생명의 무게가 모두 같다'는 자각에서 비롯한 움직임이라 생각한다. 먹을거리를 일구는 농민의 목숨, 천차만별 월급봉투를 가진 소비자의 생존과 건강이 동일한 크기로 귀중하다는 자각이 있었다.


친환경 운동이 최초로 제기된 당시의 농업환경과 지금은 많은 기술, 환경의 변화가 생겨났지만 친환경 농업이 그만큼의 기술발전과 농업행정의 진화, 철학의 성숙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다.


보조금과 농가대출 없이는 영농이 불가능한 농업 현실, 저소득층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친환경 농산물 가격 등은 기술교육과 짧은 강연들로는 답을 찾기 어려웠다.


기왕이면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마흔을 앞두고 '농업경제학과'에 진학하였다. 2년 간 휴학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만.




복학을 앞두고, 식당 운영을 어떻게 할까 한참 고민했다. 시작이야 어찌 됐건 이제 내 몫의 책임으로 남은 식당은 잘 나간다면 미련 없이 문을 닫았겠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식당에 아직 책임의 기한이 남은 것 같았다.


시즌3을 열자!

수업일정과 공부시간 등을 반영하여 영업일을 줄이고, 영업시간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제 멋대로 자주 바뀌고, 메뉴는 한 가지인 어이없는 식당이지만 찾아주시는 손님과 이 공간에 깃든 여러 수고에 화답하고 싶다. 무엇보다 그럴싸한 핑계로 도망치고 싶지는 않다.


모 아니면 도 말고, 모와 도 사이의 틈새로 살아남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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