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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Jan 10. 2022

한 숟가락의 진심

선善의 평범성

오랜 시간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가 있다. 

십.시.일.반

나에게 십시일반이란

나 같은 소시민들이 하나둘 모여 소박한 밥상에 한 사람이라도 더 초대하는 것이다. 

(능력 있는 누군가가 거하게 한 턱 쏘는 기부도 물론 좋지만)



십시일반十匙一飯
열 숟가락을 모아 한 그릇의 밥을 만든다


올해로 2회 째를 맞이한 우리 동네 십시일반.

이 모임이 2회 째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들 각자에게 '위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좋은'사람이고 싶은 가슴속 열망을 '소박'하게 발현할 수 있는 '적당'한 계기였기 때문이다.


십시일반의 첫 시작은 정겹고 즉흥적이었다.

여러 사정으로 사과농사를 정리하게 된 우리 집 대문 앞에 이웃들이 '의좋은 형제' 이야기처럼 사과를 한 짝씩 갖다 놓으셨다. 세 식구가 넉넉히 먹고도 남을 양의 사과를 보며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선한 과일을 사 먹기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과 좀 나눠먹으면 어떨까?


'십시일반'이라 이름을 붙이고 사과를 주신 분들과 또는 주실 것 같은(^^;;) 이웃들에게 이에 대한 설명과 프로젝트에 참여를 제안하는 문자를 보냈다. 대부분 호응해 주셨고, 이렇게 모인 사과들을 가공용은 손질하여 즙이나 잼으로 만들어 사과와 그 가공품들로 꾸러미를 만들어 대구와 부산에 있는 기관에 보냈다. 꾸러미를 받을 대상자 선정과 전달은 대구와 부산에 있는 기관에서 진행을 맡아주셨다.  




십시일반은 간헐적 모임이다. 정기적인 만남도 대표도 없다. 필요한 시기에 동참하고 싶은 개인들이 모여 집행을 위임받은 내가 투명하게 과정과 진행을 공유하고, 결정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의논을 거친 후 투표로 최종 결정한다. 이 모든 것은 단톡방을 통해 이루어진다. 단톡방 홍수시대이므로 당해연도 프로젝트를 마치면 단톡방도 문을 닫는다. 모임에 으레 따르는 직함과 과잉(?!) 절차를 요구하는 대면 형태에 익숙한 지역사회에서는 낯설고 새로운 방식이다.  


지방의 중소도시, 그중 농촌 지역에는 여전히 '관(官) 주도'의 사회복지기금 모금활동이 활발하다. 새마을지도자회, 부녀자회, 의용소방대, 농업인 단체 등으로 사회 참여가 주로 이루어지고 보조금 등을 지원받을 때 지역사회 기여로 평가되기도 한다. 공동체의 유지를 제도로 강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나 각종 단체들이 이권화되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고, 새로 유입되는 주민들이 쉽게 결합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측면 등을 살펴 '농촌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낭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지역 분위기에서 십시일반 참여자들에게는 관 주도의 기부가 익숙한 지역사회에서 개인들의 주도로 어떠한 반사이익도 없이 내 것을 나누는 기부 행위를 한 것은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었다. 이 유쾌한 감정에 대한 기억이 자연스럽게 2회 째를 맞이할 수 있게 한 근본적인 동력이었다. 


장학금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2회 째를 맞은 십시일반은 작년보다 활동의 폭을 조금 넓혔다.

1. 대구-부산의 기관에 농산물 기부

2. 우리 면의 초등학교 졸업생에 장학금 기부


농산물 가공비용과 택배 비용을 없애고, 현금을 모아 졸업생에게 장학금을 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쌀과 사과는 부산과 대구 기관에 직접 배달하였고, 모금액은 30만 원을 목표로 하였다. 덕은 외롭지 않다고 했는가! 작년보다 참여자가 늘어 당초 목표한 금액의 거의 2.5배에 달하는 금액이 모였다.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적립하지 않고 올해 모두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많은 금액이 모일 것이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가진 것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나누겠다는 초심으로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올해 모두 나누기로 하였다. 

-어디로 보내야 할까?

두 개의 인접한 면의 초등학교와 지역 내의 보육원의 졸업생 현황을 먼저 파악해 보았다. 졸업생 현황과 장학금 지원 상황을 반영하여 보육원에 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인원을 셀 때 본인을 빼고 세는 것은 언제쯤 고쳐질까;;; 11명의 어른들


오늘이 아이들의 졸업식이다.

"꽃길만 걷길"

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생이 어찌 꽃길만 있으랴...

다만, 

내가 걸어가는 길에 꽃 한 송이를 심을 줄 아는 사람의 인생이 향기롭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짧은 편지에 

"네가 걸어가는 길을 꽃길로 만들어 나가길!"

이라 적었다.


다음 달 7일, 우리 면 초등학교 졸업식에 꿈을 여는 열쇠, 황금열쇠를 전달하면 올해의 십시일반 활동은 종료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작지만 가볍지 않으며, 소박하지만 무례하지 않은 밥상으로의 초대가 내년에도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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