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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미 Nov 20. 2024

퇴사

2022년 12월 1일 목요일

 어제 드디어 퇴사를 했다. 디자인팀에게 커피도 사드렸다. 감사했다고. 과장님은 커피 사지 말고 더 다니라고 하셨고 동료분들도 아쉬워하셨다. 실장님께서는 너무 고생했다고 솔직히 지금도 잡고 싶다며 자리 당장 마련해두고 싶다고 하셨다. 진심이니까 다시 오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다들 각자의 아쉬움과 괴롭힘으로 인해 퇴사하는 나에게 힘이 되지 못한 미안함을 내비치며 나의 퇴사는 끝이 났다.


 퇴사를 하고 나니 뭔가 설레면서도 씁쓸하고 외로웠다. 이제 오늘부터는 3개월 동안 하던 걸 안 하니까. 사람들이 완전히 싫고 일도 너무 싫었으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텐데,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그만뒀다 보니 시원섭섭했다. 그리고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느껴졌다. 이제 뭐 하지? 하는 생각.


회사 다닐 땐 그만두면 이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적어야지! 했는데, 막상 그날이 오니 행동하기가 힘들었다. 자리에 앉아 줄 하나 긋는 게 두려워졌다. 언제나 ‘그날’이 오면 해야지 결심해도 ‘그날’이 오면 나는 주춤거렸다. ‘그날’이 올 때까지 계속 일을 미뤘다 보니 미루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상상만 하면 설레고 좋은데 막상 하면 지루해할 것 같아서. 상상만큼 내가 잘하진 못해서. 근데 이 느낌은 무얼 하든 느낄 수밖에 없는 거니까, 이왕 느낄 거 빨리 내 작업물이 허접하다는 걸 느끼고 차근차근 익숙해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달은 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돈도 모았는데 막상 뭘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예전부터 계속해왔던 것들을 찾게 된다. 책 읽기, 카페 가기, 글쓰기, 사유하기, 그림 그리기. 이 중에서 제일 무서운 건 그림 그리기, 글 쓰기. 가장 하고 싶은 것도 그림 그리기, 글쓰기. 가장 완성시키고 싶은 것들도 그렇다. 이렇게 욕심이 있고 무서운 이유는 내가 재능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완성시켰던 경력이 있고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으니까 ‘지금도 그렇겠지?’ 하는 기대감과 ‘지금도 그럴까?’ 하는 걱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 나를 위한 것들이다. 내가 좋아했으면 싶어서 기대하고 내가 상처받지 않길 원해서 걱정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선 하나 긋는 것, 글 하나 적는 것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 하나 긋는 것조차 나의 상상과 다를까 봐 무서워하지만, 사실은 어차피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다. 선 하나가, 글 하나가 나의 상상과 다를까 봐 매번, 매 순간 두려워한다는 건 그런 경험이 많았다는 거고 어차피 그럼 나의 상상과 다르게 나온다는 건데, 어차피 그렇게 나올 거 점점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


 첫 시작은 어차피 나의 상상과 다를 거면 그건 이미 정해져 있는 규칙일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에게서 태어난 것처럼. 나에게 4명의 가족이 있는 것처럼. 한국에 태어난 것처럼. 첫 시작의 울퉁불퉁한 선은 자연스러운 거라며 받아들여야 하는 걸지도. 대신 여러 선을 그으면 되겠지. 나의 의도가 담긴 여러 선을 긋다 보면 점점 나의 상상과 비슷해질 것이다. 다회독을 했을 때 책의 내용이 그제야 습득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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