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에게.
25년 12월에는 연인과 거진 한 달을 함께 생활했다. 이 주 동안은 한국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남은 이 주는 도쿄의 나의 거처에서.
그와 함께 지낼 때마다 감각하는 것은 뇌에 들어찬 묵직한 침묵, 글자의 부재다. 무언가를 읽을 수는 있어도, 결코 쓸 수는 없다. 쓰거나 읽을 필요가 없는 것. 달리 말하면 그건 만족스러움일까? 행복일까? 궁극적인 안녕일까? 내가 글을 필요로 하지 않고, 글 역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럴 때면 어떤 행복 앞에서는 영영 침묵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러나 부재가 나를 조금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무릎에 올라타 애정을 갈구하는 것뿐인 이 물러터지고 한심한 애완용 돼지 반죽이 나라고? )
12월 31일. 한 달 동안 정겹게 부리를 비벼댔던 그와 헤어지는 순간이 오자 나는 몹시도 고통스러워 이별을 조금이나마 납득 가능하게 해주는 대가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자위? (마음속에 남아있던 위안까지 달아날 것 같은 답변이군.) 고유한 생활 리듬? 분열을 거듭하는 다중적인 페르소나? 아니. 오직 글자를 필요하게 될 것이란 사실만이 위로가 된다. 홀로 됨은 오직 그런 국면에서 각별하다.
연인의 부재로 머릿속을 진공 상태로 만드는 행복감이 사라지면, 그 헐거워진 틈새에 스며들어 뼈를 시리게 하는 것은 죽음의 예감이다. 일찍이 나는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과 같은 제6차 대멸종을 어떻게 대비할지에 대한 나 자신만의 답을 로이 스크랜턴의 저서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운다'에서 찾은 바 있다. 그날, 나는 이른 죽음을 염두에 둔 채로 삶을 성찰적으로(심미적이지는 못한 것 같다)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순수한 기쁨과 두려움이 반신반의하게 섞인 아이러니함을 느끼며 연인과 통화를 했다. 그 감상평이 연인을 한 시간 동안이나 울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구태여 죽음에 대해서 떠들고 싶었다면, 신화의 외피를 덮어쓰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세르게이 파라나조프처럼.
12월 6일. 연인과 함께 심야 상영으로 영화 '석류의 빛깔'을 보았다. 그는 시적 은유와 몽환적 환상을 누비는 세계를 보고 불쾌함을 넘어 공포마저 느낀 듯했지만, 나는 시인의 삶과 미를 그저 바라보는 일이 아늑하고 편안하기만 했다. 꿈이라는 이불을 코 끝까지 덮어쓴 이야기에서 시인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석류의 빛깔처럼 짙고 선명한 고통이 빨랫감들처럼 펄펄 끓으며 삶아지고, 애인이 코를 얽는 운명의 실이 되고, 창백한 상아탑을 품은 수도원을 활보하는 닭의 벼슬이 되어 시인과 동행한다. 책, 교리, 얼음, 석류, 칼, 그리고 사무치는 절망의 고백.
시인에 의하면,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다. 빛은 인간의 헐벗은 몸을 폭로하고 고통스런 하루의 시작을 몰고 온다. 구석구석 환하게 밝히며 모든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당신은 상영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말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당신 생각이 많이 났어요. 당신이 왜 필사적으로 고통을 직시하면서 살아오려고 했는지 늘 궁금했거든요. 당신은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지 간에 마주하는 것, 그것에 대해 소리 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제 말이 맞나요? 누군가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평생을 침묵하기도, 목숨을 끊기까지 하는데. 저 역시 되도록 고통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살아왔단 말이죠."
저는요, 마주치면 죽어버리는 고통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다. 당신의 말이 맞다면, 고통을 감지하고 해독하려는 나의 의지가, 사안이 많고 중대하여 힘에 부쳤을 수도 있다. 혹은 직시하면 죽어버릴 수도 있는 고통에 내가 운 좋게 직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언어도, 글도, 이야기도 아닌 이 증상들, 어떠한 징후인 것일까? 그날 밤, 나는 어둠과 그림자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어스름한 밤에 당신과 함께 누워 있다. 잠에 빠져들 준비를 하는 당신의 고른 숨은 침묵 속에서 마치 고래의 뒤척임만큼이나 크게 들려온다. 나는 속삭인다.
당신의 숨소리를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마치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들판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늘 당신의 숨소리가 바람처럼 불어오는 세계에 살고 싶었어요.
아름답네요. (...) 사실 그런 말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한 말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요.
한 밤중인데도 그의 흰 얼굴은 허무의 그늘에 잠기지 못하고 두둥실 떠오른다. 나는 투명하고 부드러운 볼 위로 세차게 입을 맞추면서, 격식 없이 그의 볼에 침을 문대고 잠을 방해하는 것에 이상야릇한 기쁨과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서양배나무에서 자란 듯한 호리한 몸을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쓰다듬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는 무르지만 섬세하게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새까만 껍질에 쌓여있지만 흰 과육을 언듯 내보이고 있는 과일처럼 변한다. 곧 그의 피부는 너무 많이 만져진 조각상처럼 이질적이게 반짝거리기 시작할 것이다. 둥근언덕처럼 솟아있는 작은 코. 곧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걱정되는, 반짝이는 별의 테두리 같은 눈꺼풀. 나는 뜨겁고 색색거리는 몸을 껴안고 미소 짓는다. 살면서 잠들어 있는 -반쯤 죽었고, 반쯤 살아있는 연약한- 것을 이렇게나 각별하게 여긴 적이 있었던가?
연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아서, 그 순간 몸은 지구의 질서를 잊는다. 지구다운 시간 감각, 언어, 당위를 상실한다. 우리는 이제 서로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다. 오직 감각할 뿐이다. 지구인의 수명과 사랑의 수명은 결코 정비례하지 않고, 전자의 어설픈 질서는 후자 앞에서 먼지처럼 허물어질 뿐이다. 애인의 품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풍부하고 오묘한 행복은 지구의 그 어느 곳을 뒤져본다고 해도 찾을 수 없다. 나는 감각한다. 지구인의 본능으로. 새와 꽃이, 바다와 하늘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 우주를. 시린 코를 베어 물어도 용서받는 이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세계관을. 지구의 거대 담론에서 한 없이 멀어질 수 있는 허구의 삶을.
1월 1일. 연인이 한국으로 귀국하자 시간이 지구답게 흘러가기 시작하며 느닷없이 2026년도가 찾아왔다. 세계 시민이 새해 다운 감상에 젖어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는 동안, 나는 치바의 한 고즈넉한 오두막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었다. 따스한 햇빛 아래 싸라기눈처럼 내려앉은 먼지들 사이로, 낡은 라디오가 Tears for Fear의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을 노래하고 있었다. 바로 다음 날, 미국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했다. 의심할 것도 없이, 거침없이 자멸할 행성으로의 무사 귀환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죽음에 대한 예감과 사랑의 정수로 세례 받았던 시간을 함께 회고하는 것은 이제 나의 인생에서 불가피한 일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우리를 빗맞출 때까지, 우리의 삶은 영원회귀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하다. 이 반복되는 처절한 삶 속에서 사랑할만한 것은 바로 당신이니까. (어쩌면 블랙커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