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구해 주세요!

사키 선배와 품행씨.

by Da테

경주가 이미 경주다운 것이 아닌데도

그 사람 스스로 자신을 바치게 만들려면 무슨 이유를 생각해 내야 할 것인가?

-생택 쥐 페리 <전시 조종사> 중에서-


꼴딱 밤을 새웠다.

갑작스러운 철야가 심장 깊숙이 타격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 6시에 잠들어 1시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있고, 삶이라는 게 지지부진하고 무미건조한 고행처럼 느껴진다.


피로는 삶을 무색무취한 것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나는 오늘 피로 해소를 위해 줄곧 누워 지냈다. 의미 없는 글을 쓰고, 읽고, 까마득히 잠에 들기도 했다.


하루에 두 번 물이 든 컵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난 호들갑을 떨며 물티슈를 가지러 갔다. ‘어쩜! 난 제때 바닥 청소를 하라고 재촉해 주는 최첨단 컵이 있다네. 이 성가신 잔소리꾼 같으니!’


무척이나 선명하고 생생해서 현실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드는 꿈을 꾸었다. 나는 넓은 해안가에 인접한 상점가에 있었다. 눈부신 파랑빛의 파도가 황금빛 모래를 밀어내고 있었다. 점심을 위해 빵을 사려했지만, 한 덩이에 가격이 비싸보여 포기했다(숫자 700이 적혀 있었으니 어림짐작한 것뿐이지만).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해 발코니에 앉아있는 백인 관광객들 (더 나은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사이를 지나다녔다. 곧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쫓겼다. 소매치기 주제에 솜씨는 특출 났는지, 달리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발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무작정 해안가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휘영 찬란한 전통 복식을 입고 -인도나 파키스탄의 흡사한 느낌이었는데, 그것이 어느 나라 국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깃발을 든 채로 정면을 향해 걷는 수 십 명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게 깃발이 아니라 무기였다면, 전쟁의 전면전이 다소 구식인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빨강과 노랑, 검정과 금색이 인상적으로 아로새겨진 일자형의 겉옷과 장신구, 개인을 특정할 수 없는 수준의 검은 타투가 얼굴에 새겨진 남성들이 떼를 지어 돌진했다. 끝을 헤아릴 수 없게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진지하고, 분노에 차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장관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개가 있었으며, 딱 그만큼 불길했다. 그 속에서 여성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 한 명도. 이 웅장한 행렬의 한가운데에 달려들어 신성한 의례를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갓난쟁이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달려들었다. 대열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시 빨리 나의 근거지로 돌아가야 했다.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분향 예식을 할 때 사용하는 것과 닮은 거대한 향로였다. 이것의 경우, 휴대용으로 만들어져 있어 그것을 든 한 명의 지기가 향로를 땅에 내리치면, 그 반동으로 그것이 공중으로 유연하게 튀어 오르며 자욱한 연기를 뿜었다. 검은 옷을 입고 향로를 휘두르는 남성은 시편의 한 구절을 연상시켰다. “저희 기도를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손 들어 올리니 저녁 제물로 여겨 주소서”(141,2)... 얼버무리다간 내가 제물이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나는 향로가 위협적으로 발치에 떨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피한 뒤, 대열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쩌렁쩌렁 거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여자야! 너는 남자와 술과 축제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느냐?" 나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 도달한 곳은?... 친밀하게 나의 어깨를 문지르면서, 예전에는 15분짜리 티켓을 10개 동안 사 두곤 했다고 지껄이는 한 남자가 있는 이국적인 금은방 같은 곳이었다. 그의 콧등과 뜨거운 입김, 이글거리는 눈이 내 볼에 닿았다. '자기야, 2시간으로는 부족하겠지?' 처음 듣는 언어였다. 그러나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곧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토요일 저녁은 사키 선배와 있었다. 그가 학회 발표를 마치고 들르고 싶은 이벤트가 있다고 초대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모교의 학생 자치 위원회 활동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석사 연구생이었다. 학생 자치라는 것은 취업 활동에 ‘리더십을 발휘한 경험란’에 적어 넣을 수 있는 한 줄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지만, 그곳에서도 다양한 불평등의 다이내믹이 존재했다.


그와는 학부생 시절부터 같은 세미나였고, 대외 활동도 함께 했다. 졸업을 한 뒤에도 필드워크 비슷한 것을 몇 번 감행했고, 만날 때마다 대화의 양을 소화시키지 못해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헤매고 있는 전 학생 위원회 회장을 구해줘!' 그것이 이벤트의 타이틀이었다. 하루 한정, '이상적이게 미치는 방법', ’보통의 삶을 살고 싶어 ‘ 따위의 도발적인 논조가 이어지고 있었다. 트위터로 정보가 우연히 흘러 들어왔다고 했다. 선배는 학생 위원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는 곳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난 선배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기에 이벤트 정보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덥석 동행했다.


이벤트는 지하의 바에서 열리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왔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가슴을 불편하게 만드는 불안감을 느꼈다. 공간은 숨 막히게 좁았고, 이미 곳곳에 군집이 형성되어 있어 외부인이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이벤트의 플라이어를 다시 한번 주위 깊게 읽어 보았다. '이벤트 주최자: 품행 씨. 도쿄대학 현대 사상 코스에 입학했으나 우울증으로 휴학 중. 철학 연구자가 되고 싶지만 될 수 없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보통'의 일상을 보내지만 나는 제자리에 있을 뿐, 이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려워. 완벽한 인생을 보낼 수 없다면 죽어버리고 싶어.' 이벤트의 주최자들은 전부 도쿄대학교 출신이었고, 사회가 제시한 '보통'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온한 불안감을 웅성 거리고 있었다.


나는 난처해졌다.


'뭐야. 엘리트들이 정신병 때문에 징징거리는 모임이란 말이야?'


“누구 소개로 오셨나요?”


“지인은 없고요. 트위터를 보고 왔어요.”


우리는 이벤트의 주최자 '품행'씨가 누구인지를 물어물어 겨우 이동했다. 품행씨는 학부생답게 앳되어 보였고, 피부는 햇볕 아래서 탄 소년처럼 붉게 그을려 있었다. 우리는 그가 앉아있는 소파 뒤에 무릎을 꿇고 자기소개를 했다. 공간이 워낙 협소했던 탓에 자리에 제대로 앉아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들이 대학원에 진학했고 -혹은 준비 중이고- 젠더를 전공했다고 자기소개를 하자 반색하며 말했다.


"저기, 제 학부 논문에 대해서 들어주세요."


"그럼요! 어떤 주제인데요?"


"스피노자의 일원론에 입각해서, 타인에 대한 사랑을 자기애로 바꿀 수 없는지가 테마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요...?"


"저는 타인에 대해 공감도 할 수 있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거든요. 자기 긍정감이 아주 낮아요."


철학을 자아 찾기를 위한 수단으로 쓰겠다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친절하게 사교성을 발휘하고 있던 사키 선배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스피노자가 누군데?"


"17세기의 합리주의 철학가요."


품행 씨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 위원회에서 줄곧 회장을 겸임해 온 것. 일본 국내의 운동 대회에도 자주 출전했다는 것. 저글링을 연습하고 있다는 것. 철학을 전공해 연구자가 되고 싶다는 것. 승인 욕구를 얻기 위해 명문대 출신의 도덕적인 데이트 폭력을 일삼는 남성들과 교제하고, 인터넷을 통해 만난 낯선 사람과 섹스를 하기도 한다는 것. 그의 다리에는 과연 손톱으로 긁어낸 듯한 자해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침착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하나 둘 자신의 처참한 자기 긍정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더 난처해졌다. '이 모임, 뭐 하는 곳이더라?'


"저는 성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어요. 퀘스쳐닝인 것 같아요. “


"잘 됐네, 이 사람 젠더를 전공했거든요." 선배가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는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품행씨는 자신이 얼마나 사회의 주변부로 떠밀리며 살아왔는지에 대해, 배제의 감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묵묵히 필기를 이어 나갔다. 그의 언동에는 모순이 있었다. 자아존중감이 낮다는 그의 말과 달리, 그의 관심이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천착해 있다는 사실이 대화를 거듭하면서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


"왜 이벤트 제목에 '학생회장'을 넣었나요?"


"도쿄대 출신 여성으로 이벤트 제목을 할까 했는데, 다른 사람이 소외감을 느낄까 봐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학생 회장에 대해서는... 글쎄요. 저는 늘 1위가 될 수 없었어요. 늘 2위만 하는 자신을 긍정할 수 없어요. 토론 대회에서도 2위, 전국 가라테 대회에서도 2회였고요."


주위에 앉아있던 사람이 쾌활하게 물었다.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구기 종목에 출전하는 건 어떨까요?"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그때 선배가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테,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사교적인 성격인 줄 알았더니 여태껏 한 마디를 안 하는군.'


나는 노트에 필기하던 것을 멈추고, 심란해진 기분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나는 선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보고 공짜 상담을 하라고요? 저희 어쩌다가 이런 곳에 떨어진 거죠?"


"저 사람,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하네." 선배도 덩달아 소곤거렸다. "오만한 사람이야.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 생각하니. “


"선배는 저 사람이 우수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뜻이야?"


"저 사람의 태도가 우수하다고 할 수 있어요? 제 말은 선배, 사회가 제시한 규범에 적극적으로 순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우수한 철학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양립 가능한 문제였나요? 규범이니 뭐니 글을 번지르르하게 적어놨길래 히피는 못 되어도 '보통' 운운하는 소리를 들을 거란 생각은 안 했죠.... 설마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도쿄대 출신?“


"그런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면 쓰리 피스 정장을 풀 세트로 차려입은 남성도 있다.


"이런, 우울해라." 정말로 그랬다. 이 이벤트의 원 드링크를 포함하면, 우울한 도쿄대생들에게 둘러 쌓이기 위해 약 만 팔천 원가량의 돈을 지불한 셈이었으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야기 듣는 동안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던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공간 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보이네요. 정말로 살고 싶다면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물러나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뜩이나 방도 좁은데 저 사람 자아까지 커다래서 숨이 막힙니다. “


“연구에 대해서는?”


“지극히 현대적인 고민이라 스피노자가 아니라 프랑스 현대 철학의 포스트 구조주의를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갑작스럽게 삶의 책임 주체가 되어버린 원자화된 개인. 미셸 푸코는 어떤가요? 규율과 규범에 대해서, 권력이 어떻게 당신 자아를 만들었는지 먼저 이해하는 거죠. 자아를 찾아달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우리네 자아는 이미 만들어져 있어요. 선배나 나나 모두가 물 밖에선 숨이 끊어지는 물고기 신세죠. 자아가 아니라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고요."


"아주 정석적이네. 지식은 … 상대적이지. 제아무리 일위, 이위를 운운해도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야. 인터넷을 그만두고 구조를 공부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결론은 사회학이군. 있지, 저 사람이 만약 도쿄대 출신 남성이었다면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을 거야. “


“왜요?”


“자신의 가치나 자아가 부정당하거나 의심당할 일이 없었을 테니까.”


“자신이 느끼는 사회적 압력을 해독할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처럼 들리네요. … 그렇지만 마크 피셔도 권총 자살을 하는 세상이에요. 세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해도 죽지 않는 건 아닙니다. 선배는 저 사람이 왜 우울해한다고 생각하세요?“


“거절당하는 게 너무 아픈 것 아닐까. 거절당하는 것으로 정체성이 심하게 깎여 가는 거야. 너도 들었잖아. 승인 욕구 때문에 학대적인 엘리트 남성들만 골라 교제한다고. 그런 현상을 다룬 유명한 저서를 소개해줬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주고 있던 조직에서 하필 휴학 중이니, 대체제를 찾고 싶었던 거겠죠.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면 -사실 그것과 관계없이- 심리학 책은 저 사람 구원 못해요. 겨우겨우 진단할 뿐이죠.“


“자아 찾기에 심리학이 도움이 안 된다는 거야?”


“바로 그 ‘자아’가 문제라서 끙끙 앓고 있는 사람한테 ‘자기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라고 하는 거요? 우리한테 달려 있지도 않는 주체성을 발견하라고 독촉하는 건 사기 행위입니다. 차라리 공부를 시키죠!”


“학문 역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있지 않아. 우리들이야 살아가는데 많은 신세 지고 있지만 말이지. “


“그렇지만 더 위대한 것에 복무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삶이에요.“


우리는 말이 없어졌다. 이 모임이 예상한 목적이었던 학생자치와는 별 상관이 없고, 자신의 특권성에 대한 몰지각한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공간으로 전락했음을 부정하기 어려워졌다. 둘 다 기운을 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문득 품행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바닥에 쭉 피며 스트레칭을 해 보였다.


“전 품행을 가지고 싶어서 이름을 ‘품행씨’라고 지었어요. 옆에 현직 발레리나인 사람이 있어서 자세 교정에 대해 조언받았어요.”


또 누군가가 쾌활하게 말했다. ”하이힐을 신고 걸어보는 연습을 하는 건 어떤가요?“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누가 나 대신 저 사람이게 초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측정 불가능한 자질, 이를테면 품행 또한 개인이 갈고닦기를 요구되는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전해줬으면!


어느새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자, 우리는 어기적어기적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품행씨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한가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를 구해 주세요!


아뇨, 아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선배는 품행씨를 향해 한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같이 생각해 볼 수는 있겠죠.”


우리는 으슥한 시간이 되어서야 이벤트가 열린 바에서 빠져나왔다. 계단을 올라 신선한 공기와 부딪자마자 선배가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테, 넌 버틀러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어? 철학자들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 난 평생을 들여 그의 저작을 읽어도 그의 사상을 다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게 얼마나 근사한 일이니! 근데, 너 정말 끝까지 한 마디도 안 하고 나온 거야?“


“두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은 충실히 메모를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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