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유치원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을 견학 갔었나 보다. 다시 가보고 싶다는 아이의 손을 잡고 몇십 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나이가 들어서 인가. 박물관이 진화해서인가.
어릴 땐 그리도 감흥 없던 유물들이 이제는 말을 걸어 오는 듯했다. 왜 이것들이 대단한 것인지 느껴지는 듯했다.
구석기시대의 돌도끼. 만약 내가 구석시 시대에 어둡고 습한 동굴쯤에서 태어나 짐승을 맨손으로 맞서야 했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여자였다면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채집에 집중했겠지. 주린배를 움켜쥐고 채집한 그 무엇인가가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른 채 목숨을 걸고 입에 넣어보았을 것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옆에 돌을 갈아 도끼를 만든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그것으로 짐승을 잘 잡아와 배불리 먹여주었다면. 아마도 그 사람 곁에 머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에의 청동검. 모두 뭉뚝한 돌도끼가 최신이었을 때 누군가 철이라는 것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면. 지금의 핵 정도의 기술력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기술은 어떻게 발명되었을까. 대부분의 발명이 그렇듯 우연히였을 수 도 있고 끈기로 인한 수많은 실패의 대가였을 수도 있다.
갑옷들. 철로 만든 그냥 입고만 있어도 무거울 것 같은 철 갑옷들. 그것을 입고 목숨을 내건 전쟁으로 나갔을 전사들. 그런 전사들의 전쟁..
그런 수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의 21세기가 되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기를 쓸 수 있고,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며, 세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비누를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집이 있고 해외에 있어도 이메일과 전화로 거의 실시간 소통도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지금의 시대에 태어난 것,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이 당연하게 여긴 이것들이 너무나도 큰 행운임을 깨닫게 된다.
구석기시대의 사람이 지금 시대의 나를 보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혜택을 누린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 사람과 나 두 생명 모두 태어났을 뿐인데 말이다.
국립박물관을 다녀와서 집에 돌아오니 이 감사함을 토대로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요하게 생각해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