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 리뷰
<미생>의 특별함은 ‘평범함’에 있다. 여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형사도, 정치계 거물도, 재벌가 인사도 아닌 회사원, 그것도 계약직 사원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보통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소재를 활용한다. 이 드라마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날들의 치열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바둑이 인생의 전부였던 장그래를 대형 무역회사의 낙하산에 던져넣는다.
주제와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질문은 ‘왜 그가 주인공인가?’이다. 주인공은 그 이야기의 주제와 소재를 드러내기 위해 설정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합평 수업 때 들었던 질문 중에 잊을 수 없는 물음이 있다.
- 근데, 왜 얘가 주인공이죠?
내 작품에 대한 질문도 아니었는데 기억하는 이유는, 그 질문이 그 작품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했기 때문이다. 나쁘지 않은 소재였고, 나쁘지 않은 전개였는데 재미가 없었다. 그 이유는 주인공이 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인물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 특별하다는 것이 꼭 비범한 능력이 있다거나 유별난 인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미생>은 왜 장그래를 주인공으로 데려왔을까. <미생>이 진행되면서 장그래는 어떤 변화를 갖게 될까.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형 무역 회사 ‘원인터네셔널’, 이곳에 낙하산 인턴 장그래가 들어온다.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인 인턴 동기들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낙하산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아니꼬운데, 어디 지방대조차 나오지 않은 검정고시 고졸이란다. 이 격차는 모두가 장그래의 과거를 폄하하는 배경이 된다. 그런 냉대 속에서도 장그래는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상식
너 나 홀려봐. 홀려서 팔아보라고. 너의 뭘 팔수가 있어? 없어? 없지?
장그래
노력이요. 그러니까 전 지금까지 제 노력을 쓰지 않았으니까. 제 노력은 새빠시 신상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조건 열심히 하겠습니다.
<미생> 1화 중
장그래는 스스로 자신의 노력을 ‘신상’이라 칭하지만, 사실 그는 절대 자신의 삶은 소홀히 해온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소홀히 해온 인물이 이 ‘치열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장그래는 바둑이라는 한 우물을 파며 노력해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유일한 우물은 끝내 오아시스가 되지 못했고, 그것 외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장그래는 단순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바둑은 기본적으로 싸움이고 전쟁이다. (...) 그 세계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었다. 패잔병이지만 승부사로 길러진 사람이다.
<미생> 3화 중
그럼에도 장그래는 불평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낸다. 바둑이 그에게 남긴 삶의 태도를 유지한 채로. 이렇게 장그래는 <미생>의 주인공이 된다.
이 드라마의 재밌는 점은, 주인공과 고정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며 함께 극을 끌고 가는 대립자가 없다는 점이다. 한때 그와 대립하던 인물들은 곧 이야기에서 하차하는 조연이거나, 결국은 그의 편이 되는 조력자다. 장그래가 진정으로 이겨내고 있는 것은 개별적인 인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검고 고졸’, ‘무스펙’, ‘낙하산’ 등 그에게 씌워진 세상의 프레임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다. 장그래는 언제나 묵묵하고 꿋꿋하게 전투 중이고, 조금씩 이겨낸다. 그 결과 그를 흘겨보던 인물들은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장그래는 그 손을 잡게 된다.
장그래
모르니까 가르쳐 주실 수 있잖아요. 기회를 주실 수 있잖아요.
오상식
기회도 자격이 있는 거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 빌딩, 로비 하나 밟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는지 알아? (...) 기본도 안 된 놈이 빽 하나 믿고 에스컬레이터 타는 세상. (...) 나는 아직 그런 세상 지지하지 않아.
<미생> 2화 중
이렇게 장그래를 부정하던 상사 오상식은 점차 장그래가 가진 진정성을 알아보게 되면서, 장그래를 ‘우리 애’라고 부르게 된다. 그 순간부터, 늘 혼자였던 장그래는 회사 안에서 ‘우리’를 갖게 된다.
장그래씨는 내가 믿고 살아온 정의가 아닙니다.
장백기 인물 소개 중
장그래와 함께 인턴으로 지내온 장백기도 그렇다. 인턴 동기 대부분이 장그래를 따돌리고 무시할 때도, 장백기는 그 대세에 합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장백기가 장그래를 존중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건 약자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대상을 굳이 상대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인턴 장백기는 그랬다. 그는 여전히 칭찬의 세계에 있는 모범생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직원이 된 후, ‘선임의 블루투스 헤드셋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게 된 장백기는 이제 비정규직 사원 장그래마저 의식하게 된다. 자신이 장그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속좁은 자신의 탓이 아니고 그게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다 장백기는 장사의 기본을 배워오라며 ‘10만원으로 무엇이든 팔아오기’ 미션을 받는다. 그것도 장그래와 함께. 두 사람은 각자의 방법으로 10만원어치 양말과 속옷을 팔기 위해 고분분투 하고, 그러면서 장백기는 장그래의 과거사를 알게 된다. 자신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장그래도 자신만의 과정으로 치열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장백기는 함께 늦은 퇴근을 하는 장그래에게 이렇게 말한다.
장백기
장그래씨, 나는 아직도 장그래씨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래도, 내일 봅시다.
<미생> 15화 중
여기서의 ‘내일 봅시다’는 장백기가 몰래 이직을 준비하던 시절, 그의 선임인 강대리가 그에게 한 말이다. 평범한 인사 같지만, 거기에는 내일도 당연히 당신을 만날 것이라는, 우리의 관계가 지속될 거라는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장그래의 과거를 알게 된 장백기는 그에게 자신을 이 회사에 남아있게 해줬던 그 한마디를 돌려준다. 자각을 했든 못했든, 장그래를 함께 할 동료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 이야기 속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하지만 치열한 날들을 살아가며 관계를 이어나간다. 당연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일 보자는 말을 건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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