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글로리> 리뷰
<더 글로리>는 한 사람이 자신의 온 생을 건 치열한 복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복수를 통쾌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인들을 데려온다. 그 악인들은 끝내 변함없이 지독하다는 점에서 이 복수극의 결말을 깔끔하게 만들고, 그런 면에서 매력적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매력적인 악인들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악행은 삶을 공허하게 만들고,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그 공허함을 채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악행은 필연적으로 공허하다. 이것은 주인공 ‘문동은’이 살아가는 원동력인 복수도 마찬가지고, 동은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문동은
용서는 없어. 그래서 그 어떤 영광도 없겠지만.
<더 글로리> 4화 중
어쩌면 동은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끝이 필연적으로 공허하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동은이 원하는 것은 무너져버린 자신을 재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무너뜨린 이를 더 처절하게 무너뜨리는 것이니까.
박연진
그래서? 넌 꿈이 뭔데?
문동은
너.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우리 꼭 또 보자, 박연진.
<더 글로리> 1화 중
도저히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느껴져 죽음을 결심한 때, 동은은 다른 길을 발견한다. 자신이 겪은 불행을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는 것. 이 순간 이후로 동은은 공허를 향해 전력질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청자의 응원을 받는 주인공이라면, 그 결말이 공허해서는 안 된다. 그 응원의 대가로서 주인공은 시청자들에게 무엇이든 보여주어야 한다. 공허로 달려가는 동은이 다른 결말을 맞기 위해서, 동은의 주변에는 조력자가 하나둘 등장한다.
1. 복수의 계기: 연대가 부재하던 과거
동은의 조력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조력자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학창시절, 학교 폭력을 당하는 동은에게는 조력자가 없었다. 한 명 있긴 했지만, 동은을 도우려던 유일한 어른인 ‘보건 선생님’은 동은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을 연진에게 들킨 후, 소리소문 없이 해고 당한다.
“보건교사의 퇴사로 당분간 문을 닫습니다”
<더 글로리> 1화 중
TMI: 나는 이 드라마를 통틀어서 이 장면이 제일 무서웠다. 문제의 고데기 장면보다 훨씬 훨씬 더...
이 장면 이후 동은의 유년기에는 그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동은이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는 그랬다.
2. 복수의 진행: 목적을 공유하는 연대
언제나 치밀하게 움직이던 동은의 뒤를 밟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현남이다. 현남은 세명초등학교 이사장의 집에서 근무하는 ‘이모님’으로, 이사장을 협박하기 위해 약점을 찾아내려던 동은을 주시하다가 동은에게 다가간다.
‘이모님’이라는 현남의 애매한 호칭은 현남의 사회적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남은 그녀를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누구의 이모도 아니다. 하지만 현남은 이모님으로, 적당히 뭉뚱그려진채 불린다. 그런 존재감으로 살아가던 현남은 동은을 만나 자신의 애매한 존재감을 활용한다. 누구의 이모도 아닌 현남은 동은의 ‘이모님’이 되고, 누구의 사모도 아닌 동은은 현남의 ‘사모님’이 되어 각자의 복수를 공조한다.
문동은
처음에 저 협박하셨을 때요, 저 진짜 그때 잘못 걸린 거였군요?
위험해지지 마세요.
<더 글로리> 5화 중
공조하는 동안 동은은 현남과 가까워진다. 동은이 예상하거나 계획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가까워진다. 이렇게 현남과 연대하는 동안 공허 뿐이던 동은의 복수에 웃음이 등장한다. 현남은 자신은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라고 표현하고, 실제로 현남의 명랑함은 동은을 웃음 짓게 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모여, 동은에게 현남은 ‘위험해지지 마세요’라는 말을 건낼 동료가 된다.
3. 복수 이후: 도움을 주는 연대
온실 속의 화초란 말은 아마도 여정을 두고 만든 말일지도 모른다. (...) 평생이 난동(煖冬)이라 밖이 그리 추운지 몰랐던 여정은 악몽 같은 사건을 겪고 난 후 지독한 겨울을 버텨내고 있었다. (...) 원래의 계절에 맞게 이제부터 아주 차가워질 예정이다.
주여정 인물 소개 중
여정은 동은이 복수를 준비하는 동안, 심지어는 동은이 여정을 떠나있는 동안에도 동은의 곁에 맴도는 인물이다. 하지만 여정의 역할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건, 여정이 동은의 곁을 지키고 있는 동안이 아니다. 자신의 극야(極夜)에 있던 동은은 여정의 계절이 겨울임을, 그에게는 그만의 지옥이 있음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수를 끝낸 동은은 죽음을 결심하고 가출하는 고양이처럼 여정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복수 이후의 공허를 완성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려는 순간, 상임이 등장한다.
박상임
도와줘요! 살려줘요. 나, 여정이 엄마예요.
여정이가 문 선생 복수 돕겠다고 할 때 나, 허락했어요. 그러니까 문 선생도 허락해줘요. 내가 오늘 당신 살리는 거. (...) 내 아들 좀 꺼내줘요. 지옥에서. 그래서 끝끝내 살게 해줘요.
<더 글로리> 16화
상임을 통해 여정의 지옥을 확인한 동은에게는 공허를 채울 목표가 생긴다. 여정을 지옥에서 꺼내는 것, 그래서 끝끝내 살게 하는 것.
문동은
보고 싶었어요.
주여정
근데 나 왜 또 떠났어요?
문동은
복수가 아니라 사랑이었나 보죠.
<더 글로리> 16화
그렇게 동은은 여정을 떠나야 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시 여정에게로 돌아간다. 복수가 아닌 사랑 때문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사람들이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 갔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서로를 도우며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망나니 칼춤 같은 모양새라도, 우리의 삶을 채워주는 건 결국 사랑이니까. 그것으로 서로를 구원해주려는 연대야말로 우리의 삶을 채워주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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