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좋아하는 너(1)

박효신-숨

by 설탕우유

0. Prologue


나는 비를 좋아하지 않지만 너는 비를 참 좋아했다.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네가 좋아하니까 나도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기로 했다. 내게 준 너의 생일 선물도 우산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내가 좀처럼 좋아하지 않던 비 오는 날을 함께 좋아했던 것 같다. 선물 받은 우산 손잡이에 무료로 각인을 새길 수 있었기에

"Happy Rainy Day"라고 새겼던 것은 아주 혹시나 너와 이 우산을 쓸 일은 없을까 했기 때문이었다.


난 운동장에 나가며 비가 그치기를 바라고 있는데 너는 "와 시원해서 기분 좋다"라고 말했다. 차마 그 상황에 싫은 티도 내지 못하고 마냥 같이 좋아하며 비 오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너에게 보내주었다. 하지만 내가 비를 좋아하지 않아서였는지 너와는 결국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렇게 비가 오고 쓸려가는 찌꺼기들처럼 그저 나는 너에게서 먼 곳으로 흘러가야 했을 뿐이다.


남몰래 너를 참 좋아했다. 어쩌면 몰래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마지막 에피소드가 될 너와의 이야기. 이제는 담담히 적으려 노력해 본다.



1. 친절함의 위험함


처음 너를 본 것은 직장인 극단이었다. 직장인 극단들은 보통 남자 배우가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마침 내가 다른 공연팀들에서 공연 경력이 있어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던 상태라 반년을 넘게 공연은 염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극단의 대표에게 직접 섭외요청을 받고 회비를 반값으로 감면해 주는 조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만남. 이미 많은 상처를 받아왔기에 너무 사람들과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너무 깊어지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함께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공연팀 소개와 자기소개를 간단하게 거쳐 각자의 노래를 조금씩 들어보는 차례가 되었다. 그때 옆에 있던 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쿨링 캔디를 나눠주고 있었다.


내 기억에 너의 첫 모습은 이 친절함이었다. 극단 대표가 '쿨링 캔디가 목에 더 안 좋을 수도 있는데...'라고 하자 오히려 사탕을 나눠줘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너의 모습이 똑 부러지는 듯한 모습에서 보이는 실수투성이의 허당끼가 보이는 것 같아서 재밌는 사람으로 보였다.



2. 별이 빛나던 밤에


이 팀은 공연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예 무대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각자 공연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에 공연 경험이 많던 나를 반장으로 정하고 자율적으로 수업이 없는 날에도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 만났던 날에도 새벽 늦게까지 이야기 꽃을 피웠던 우리는 연습 후에도 집으로 바로 가는 날이 없었다.


연습이 끝나고 난 뒤 종종 가볍게 술 한잔을 하는 일은 있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우리의 공연을 위한 회식처럼 약속이 잡혀 갈 곳을 정하고 신나게 마시며 노는 일이 있었는데 다들 택시와 대리를 불러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다 확인한 뒤 주차장에 세 명이 남아있었다. 나와 총무 그리고 너. 새벽 4시라고 적혀있는 핸드폰. 취한 기운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만 가득한 하늘이 보였다.


너는 우리 셋을 보며 "또 저희 셋만 남았네요. 저는 이렇게 있는 게 너무 좋아요."

취한 상태로 웃으며 말하던 너의 모습이 그날의 하늘의 별들과 함께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볼 빨간 사춘기 - '우주를 줄게' 중


한참 뒤에 별빛이 내리면

난 다시 잠들 순 없겠죠

지나간 새벽을 다 새면

다시 네 곁에 잠들겠죠

너의 품에 잠든 난 마치

천사가 된 것만 같아요

난 그대 품에 별빛을 쏟아 내리고

은하수를 만들어 어디든 날아가게 할 거야




3. 파스텔의 온도


너의 친절함은 봄 같은 온도였다.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는 부드러운 성격과 말투에서는 은은한 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파스텔과 같이 은은하게 스며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너에게도 고민이 있었다고 했다. 오디션을 통해 배역이 정해졌지만 너와 같은 배역을 맡고 싶어 했던 친구가 너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너는 그 상황들로 갈등이 되는 것보다 그 배역을 양보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 상황을 알게 된 다른 여자팀원들끼리 그 친구를 어르고 달래며 설득한 끝에 그 이야기는 끝이 났다고 했다. 그런 상황이 만들어져도 혼자 속 앓으며 그 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생각을 하고 있던 네가 안쓰러웠다.


너에게 보였던 이 마음은 네가 자주 입고 다니던 너의 옷들처럼 은근하고 은은한 온도를 띄고 있었다. 이때즈음부터 너의 마음은 내게 더 애잔하고 마음에 자주 비추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파스텔톤. 사진출처 : 픽사베이



4. 넌 내게 최고의 여주인공이었으니까


공연은 늘 여유로운 준비기간처럼 보여도 공연 직전이 되어서야 긴 시간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우리 팀은 공연 직전에 있었던 극단 대표와의 트러블로 공연을 올리지 못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뻔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우리 공연팀을 도와줄 사람들을 섭외하여 공연장 준비를 완료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새벽 3~4시에 잠들고 퇴근하면 정신없이 공연장으로 달려가던 일상이 공연이라는 완성으로 끝나가고 있었다. 공연 자체가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동안의 함께 해온 고생이 있었기에 이번 공연이 끝났을 때 우리는 이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어려워했다. 정확히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우리의 공연 뒤풀이는 MT로 마무리하기로 정해졌다. 말로 정한 것이 아니라 다들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MT가 끝나고 정산까지 끝나자 다들 긴 안부의 메시지를 단체 대화방에 남겨놓은 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른 공연팀으로 곧장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 비어있던 여자 주인공 자리에 네가 생각나서 연락하게 되었다.



5. 공연 그 이후 그리고


단체 대화방을 나갔다고 해서 모임이 뚝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작게 두 명 세 명씩 모이는 자리는 계속 이어졌기에 종종 러닝을 함께 한다거나 함께 바다로 드라이브를 다닌다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나 역시 너와 계속 만나고 있었기에 다음 공연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 상태였고 너는 고민을 시작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대답을 회피하는 너를 보며 함께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공연팀이 처음으로 모였던 날. 너도 함께 왔지만 기대감이 전혀 없어 보였다. 공연 준비를 하면서 이미 몸과 마음이 지쳤고 연달아 공연을 바로 준비하는 것이 지금의 업무에 지장이 생길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네가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기에 더 이상 나의 마음만으로 함께할 수 없겠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네가 하던 일은 종종 주말에 당직근무를 서는 일이었는데 나와 친한 형이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기에 우연히 들른 것처럼 자주 놀러 다녔다. 그렇게 자주 놀러 다니다 보니 둘이 밤늦게까지 서로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참 많이 나누었지만 친구 그 이상의 접점을 만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비스트 - '비가 오는 날엔' 중


세상이 어두워지고 조용히 비가 내리면

여전히 그대로 오늘도 어김없이 난

벗어나질 못하네 너의 생각 안에서


이제 끝이라는 걸 알지만 미련이란 걸 알지만 이제 아닐 걸 알지만

그까짓 자존심에 널 잡지 못했던 내가 조금 아쉬울 뿐이니까


비가 오는 날엔 나를 찾아와 밤을 새워 괴롭히다

비가 그쳐가면 너도 따라서 서서히 조금씩 그쳐가겠지



금요일에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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