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환-너였다면
6. 퇴근 시간
우리의 균열이 일어나기 직전. 내가 퇴근하면 늘 그 친구가 퇴근이 아침이 아니라면 데리러 가서 잠시라도 보는 일이 잦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날들이었던 것 같다. 아주 잠시라도 보고 술을 한잔 해야만 그날의 일과가 끝나는 것 같았다. 이 잘못된 루틴은 우리의 균열직전까지 이어졌다.
어느 날 그 친구의 회사 팀장님이 데리러 오는 나를 보며 '좋아하지 않으면 저렇게 데리러 오지 않으니 한번 물어봐'라고 말했단다. 그런데 데리러 오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 인정하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날 그 질문에 그 친구는 팀장님에게 그렇게 답했다고 했다. "저 오빠가 저를요? 아유 그럴 리 없어요" 나도 웃으며 넘기고 나서 나 스스로 지금의 행동이 마음이 없으면 이렇게 하지 않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잘못된 관계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난 마음을 전해보기로 생각했다.
7. 기억의 휘발성
며칠 뒤 그 친구의 회사 회식이 있었다. 그 친구가 술에 취하면 아예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데리러 가겠다고 이야기하고 회식하는 근처에서 그 친구를 기다렸다가 회사 직원분들과 만나 이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그 친구를 데리고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줬다.
얼마 뒤 그 친구가 출근을 하지 않았던 날. 약속을 잡고 집 근처에서 가볍게 마신 뒤 둘 다 제법 취한 상태가 되어서 이야기를 꺼냈다. 집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둘이 신이 나서 팔짱을 끼고 걷던 중에 "나 네가 좋아"라는 말에 "나도 오빠 좋아!" 라기에 "아니 그거 말고 너 좋아한다고"라고 다시 말하자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당황을 했다. 그리고는 급히 택시를 잡더니 "어..? 어? 나 갈게" 하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날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그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한참을 웃었다. 문제는 그 친구가 그다음 날 이 기억을 아주 깨끗하게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며칠을 이 친구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대답이 아니라 이 날의 기억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또다시 말을 꺼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8. 너무 늦었어
며칠 뒤 다시 그 친구의 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던 그 친구에게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물었지만 그 친구는 내게 "엥? 대체 왜 나를 좋아하지?"라고 말했다. 나도 그 당시에 "나도 잘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건 확실해"라고 답했다. 그러고 둘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더 시작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오빠가 좋은 사람인건 알지만 이제 우리는 너무 친구라 너무 늦은 거 같아" 이 답이 나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마도 머리로는 납득하고도 마음이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상황인 것 같다. 그날 하루를 완전히 설쳐대고 나서 그 친구가 다음날 함께 공연을 준비하던 여자애들과 술집에서 보이는 남자들마다 장난으로 번호를 물어보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아주 나빴다.
물론 그 당시의 그 친구가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게 있어 그 행동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눈에 보이게 그 친구와 나의 균열은 시작되었다. 내 주변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고, 이미 주변에서 우리의 이상한 기류를 포착하고 있던 사람들은 뒤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완벽한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다.
JK 김동욱 - 미련한 사랑 '중'
너는 내일을 나는 이별을,
지금 함께 있다는 것 마저 잊은 채,
헤어날 수 없는 미련한 사랑에,
조금씩 빠져가고 있어 이렇게
9. 연출과 배역
일련의 사건 이후 우리와는 상관없이 극단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뻐꾸기가 되어 우리 공연팀 내부의 불화가 있음이 극단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다. 당시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다 몇몇의 친한 친구들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사이와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물었는데 내 속을 편하게 하려고 이야기를 꺼냈더니 극단 사람들이 그 친구를 제명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 친구를 극단에서 정리하려고 하니 내가 그 친구를 잡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우리 공연팀 안에서도 그 친구와 내가 극단적으로 갈라서기 시작하면서 나는 배역에서 연출만 맡는 것으로 물러나고 팀 내에서 여자 주인공 배역을 함께 하고 싶다는 의견이 내게 들어왔는데 본래 혼자 여자 주인공 역을 소화하려고 했던 그 친구가 곧장 반대 의견을 내며 나랑 부딪히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 친구는 내가 고백했다가 차였기 때문에 본인을 여자 주인공 역에서 한 자리를 뺏으려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었고, 또 그 제안이 충분히 받아들일만하다는 나의 설득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이제는 더 이상 의견 수렴이 아니라 팀을 다시 구성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같은 공연팀 내에서 의견이 모아지면서 일단 팀을 한번 해체하게 되었다.
10. 라이선스 신고
그리고 며칠 뒤였다. 우리는 잠시 공연팀을 내려놓고 재정비를 갖기로 했다. 물론 그 친구를 제외하고 다시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그전에 라이선스를 받았던 극단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라이선스 계약에 대한 규정을 어겨서 저작법으로 문제가 되어 라이선스 해지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이유는 그 친구가 팀에서 정리되자 곧장 그동안의 우리가 연습했던 자료와 참고 자료로 받아놨던 자료들을 모두 모아 극단에 '자료가 공중배포 되고 있어 저작법을 위반했다.'라고 나를 신고했던 것이었다. 신고했던 자료들이 나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 받기 위해 얻은 자료였지만 규정을 위반한 것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라이선스를 해지하고, 대본과 악보 원본을 반납하고 우리 팀이 갖고 있던 자료들을 폐기하여 증빙자료와 사과문을 보내 이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그렇게 내가 가장 사랑했던 공연을 내 손으로 올리려던 꿈이 조용히 사라졌다. 문제는 공연만을 올리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당시 우리 극단에서 시에 신청해서 우리 공연 이름으로 지원비를 신청해 둔 상태였기에 우리는 다른 공연이라도 올려야만 절차가 끝나는 상황이었기에 라이선스를 피할 수 있는 다른 공연을 급히 찾았다. 그렇게 부랴부랴 다른 극을 찾아 새로운 사람들을 뽑아서 급히 공연을 올리고 나서야 폭풍 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고요함을 찾을 수 있었다.
11. Epilogue
폭풍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아주 천천히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너무도 원망스럽고 저주하고 싶었던 그 친구와의 흐른 시간들을 되짚어보며 이렇게 최악의 관계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왜 그 친구와 만나는 시간들이 좋았는지를 잠시 떠올리기도 했었다.
그 친구와 만나는 시간이 좋았던 건 단순히 그 친구와 노는 자극만이 끌렸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 친구는 항상 내가 꿈을 갖고 배우로 데뷔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응원을 해주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오빠 좋은 사람이니까 제발 돈 좀 모으자"라고
시간이 흐른 뒤 정말 좋았던 기억과 정말 나빴던 기억을 내게 남긴 그 친구를 통해서 내가 얻은 작은 교훈은 "아무리 좋아도 사랑하지 않아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정승환 - '너였다면' 중
너였다면 어떨 것 같아
이런 미친 날들이
네 하루가 되면 말야
너도 나만큼 혼자
부서져 본다면 알게 될까
가슴이 터질 듯
날 가득 채운 통증과
얼마나 너를 원하고 있는지
내가 너라면 그냥 날 안아줄 텐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