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약 같은 가시나(1)

정승환-너였다면

by 설탕우유


0. Prologue


첫 만남에 '이 사람 쎄하다' 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가까이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사람. 하지만 난 나 스스로 울린 경고를 무시하고 더 큰 재미와 자극을 바랐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너무나 큰 상처와 고통의 시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던 이야기. 그리고 정리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려야 했던 이야기다.


내가 가장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던 시기였다. 이 에피소드를 적어내기 두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고 다른 에피소드들처럼 담담하게 적어내기보다 왜 나 스스로가 그 당시에 냉정하지 못했었는지를 돌아보는 에피소드로 남기려 한다.


그건 아직 친했을 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은 농약 같은 가시나였다. 내가 억지로 밀어낼 수 없었고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도 뒤로 물러나지 못했다. 내가 냉정하지 못했고 판단이 무너진 것은 그 당시의 내 처지를 비관하며 자주 마신 음주 때문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1. 난 늘 술이야


그 사람을 처음 본 것은 공연 연습 중 우리를 궁금해하며 놀러 왔을 때였다. 당시 팬데믹 시기라 연습실도 최소한의 인원으로 조심스럽게 연습을 하던 시기였는데 연습 시간이 달라 본 적 없던 우리가 궁금하다며 연습실로 구경 온 것이었다. 그리고 곧장 알게 된 것은 함께 술을 마시며 놀 사람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좋아했기에 그 사람과 친해지는 일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어느 날부터 그 사람이 낀 술자리에서 만나는 일이 잦아졌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던 자리는 어느 순간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점차 잦아지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이 친구가 사람들을 향하는 톡톡 쏘는 말투는 가끔 시원하게 보이다가도 흠칫하고 놀랄 때가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깊게 친해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술자리에 익숙해지고 너무나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느낀 뒤 이런 감정들은 점점 무뎌짐을 넘어서 어느 순간 내가 챙겨야 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함께 있다가 집으로 보내주거나 나중에는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와야 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고 이런 관계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지내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2. 사랑과 우정사이


그렇지만 우리의 친구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던 것은 그 애의 남자친구가 있었고 당시의 나 역시 이 친구를 전혀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의 남자친구와 함께 친해져서 셋이 술을 마신 적도 몇 번 있었고 둘이 크리스마스에 심심하다며 나를 불러내서 함께 놀자고 연락이 온 적도 있었다. 물론 크리스마스에는 내가 거절하고 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잘 지내오던 중 이 친구네 커플이 헤어지고 내가 다니던 회사가 계속된 경영난으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우리 둘이 서로의 아픔을 털어내기 위한 술자리로 바뀌어 있었다. 그 친구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위해 맞추려다 보니 현실에서 서로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고 이별을 선택했다며 내게도 현실적으로 결혼을 준비하는 삶을 살면 좋겠다고 했었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옮긴 곳은 공장이었다. 처음에 입사할 당시 내가 들었던 근무 여건은 입사 후 달라졌는데 포괄임금제로 인해 야근을 해도 주말 당직 출근을 해도 월급은 늘 고정되어 있었기에 이런 삶에 갇혀버린 내 현실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내 속을 털어놓을 사람이 그 친구가 되었다.



사랑과 우정사이 - 피노키오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날 보는 너의 그 마음을 이젠 떠나리

내 자신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아끼던 내가 미워지네




3. 무력감, 우울감.


전 직장은 임금체불의 스트레스가 강했다면 이곳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상황들이 내게 스트레스였다. 일을 다닐수록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무너지고 있었다. 연말에 있었던 공장에서 건강검진의 결과에서 우울증 척도가 높게 나와서 병원을 가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지만 확인하지 못했었다. 다만 확실히 그 당시 나는 주변에서 보기에도 무너져 있었던 것 같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서였는지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웠고 매일 술을 마시다 보니 이런 삶을 벗어날 의지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취미생활을 통해 현실 도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다음 공연을 무조건 올려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그 친구를 포함된 소수의 인원들로 공연 준비를 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던 공연의 라이선스를 신청하여 대본과 악보를 받고 공연장 대관을 마쳐놓은 뒤 공연 준비를 시작했다.


무너지던 내 삶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보이는 순간이었다. 매번 이어지던 술자리가 그날의 힘든 일들을 풀어내는 자리에서 공연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으로 즐거움을 찾아가는 자리로 바뀌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내 우울감도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공연을 올리려고 시작했을 때까지는 그랬다. 이렇게 빨리 끝나게 될 꿈일지 몰랐으니까


a-glass-of-3287791_1280.jpg 인생에서 가장 많은 술을 마셨고 가장 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시간. 사진출처 : 픽사베이



4. 균열


그 당시 나만 심리적으로 무너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도 이별의 후유증과 함께 회사에서 재계약이 되면서 부서를 옮기게 되었는데 3교대 근무를 하게 되었다. 업무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3교대를 해야 한다는 현실에서 그 친구도 술자리를 함께 할 나를 찾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렇게 그 친구나 내가 서로가 서로를 계속 망가뜨리고 헤어 나올 수 없도록 더 깊이 떨어뜨리고 있었다.


내가 MBTI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 친구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내 성향과 나라는 사람을 잘 설명해 주는 것 같아서 신기했었다. 하지만 가장 신기했던 너무도 명백했던 그 친구의 MBTI 때문이었다. 외향적이고 직설적이었던 말과 성격으로 사람들과의 다툼이 잦다는 설명처럼 정말 그 사람은 하나의 유형처럼 보였다. 물론 MBTI가 그래서 싸운 것이 아니라 그 성격을 가진 친구의 MBTI가 그랬을 뿐이었지만


서로가 술을 마셔야만 서로의 힘듦을 털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 역시 그 친구의 모든 술주정과 투정을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을 느껴야 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몇 차례 꾹꾹 누르고 있었던 화가 터져 그 친구에게 더 이상 같이 못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 친구가 다음날 "오빠가 그렇게 말했으면 내가 잘못한 게 맞나 봐 기억이 잘 안나 미안해"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미 난 지쳤던 것 같다.



5. 트러블메이커


그 당시에 난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내게 공격적이지 않았던 것을 보며 이 친구가 내 말과 부탁이라면 따라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어떤 것이 계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몇 번 술자리에서의 오해와 이 친구가 내게 뱉어낸 말들이 나 역시 상처가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 사이에도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친구 독특한 성격과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은 공연팀 안에서 적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간혹 도를 넘는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말을 참지 않고 뱉어내는 편이었기에 팀 내에서도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 친하지 않은 반대 무리가 생겨나 있었다. 당시 극단에서는 그 친구를 제명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한번 생긴 균열은 빠르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는 도중에 내 옆에서 "아 귀 아파"라고 들리게 말을 하거나 연출적인 지시가 있을 때 "아 꼭 그래야 되나"라는 반응을 하거나 연습실에서 마주쳤을 때 "아 왜 꼴 보기가 싫지"라는 소리로 불만을 직접적으로 드러냈기에 이 공연팀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이 공연을 무엇 때문에 시작했는지 갈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금요일에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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