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추억이 있는 여행 이야기

by 나플라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삶이다.

-법정 스님


30년 직장생활을 퇴직한 후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외국 여행이었다. 마침 딸이 베를린에서 어학연수 중이어서 이 기회를 활용하기로 했다. 딸이 수업이 없는 주말에 주변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주중에는 오후와 저녁 시간에 독일을 여행하기로 했다. 이렇게 우리 모녀의 유럽 여행 분투기 첫 번째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혼자 외국 비행기를 타고 가서 딸을 만나는 것이 첫 번째로 내가 넘어야 할 고비였다. 영어를 못하면서 나 홀로 외국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불안했다. 딸이 수업이 없는 주말을 이용해서 함께 헝가리와 프랑스를 여행하기로 했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딸은 저가 항공으로 부다페스트에 몇 시간 먼저 가 있었다. 영어를 학교에서 10년 이상을 배웠건만 영어로는 의사소통이 안 되는데 실력인데 할 수 있을까? 딸과 무사히 합류하여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까? 비행기를 타지 못해서 혼자 길을 잃고 오도 가도 못하는 국제 미아가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실제로 부딪치기 전이 더 걱정되고 불안한 법이다.


그러나 웬걸 걱정과는 달리 문제는 쉽게 일이 풀려갔다. 내가 타고 갈 항공사를 찾아서 안내 데스크로 갔는데 아시아인 직원이 서투른 한국말로 ‘인천 가세요? “라고 말했다. 낯선 외국인에게서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말을 들으니 너무 반갑고 안심이 되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직원에게 부다페스트에 간다고 했더니 수속 절차를 밟아주고 항공권을 주면서 출국심사장의 방향과 위치도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니 나와 같은 연령대 한국 여행객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수행해야 할 과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출국심사 후에 탑승 게이트를 찾아서 그 앞에 앉아 있으니 혼자서도 척척 잘 해낸 것이 몹시 흐뭇했다. 마음은 헝가리로 벌써 날아가 딸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그런데 무심코 항공권을 보니 황당하게도 항공권에 좌석번호 칸이 비어있었다. 항공권을 받을 때 좌석번호가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을 자책했지만 안내 데스크로 다시 갈 수는 없었다. 여행의 낭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비행기를 못 탈 까 봐 심장이 다시 두근두근했다.


꼭 말이 아니어도 눈치코치와 표정, 몸짓으로도 의사소통이 된다. 정신을 간신히 가다듬고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뒤늦게 항공사 직원이 나왔다. 얼른 그에게로 가서 항공권을 보여주며 ’노 싯 넘버‘라고 말했다. 다행히 직원은 걱정하지 말라며 좌석번호가 있는 항공권을 새로 주겠다고 대답했다. 이때 영어를 알아들었다기보다는 대충 눈치로 알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절실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으면 못 알아듣는 외국어도 이해하게 된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이후 과정을 딸이 사진으로 자세히 알려주었지만 그것 만으로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같은 비행기 탑승객 한 명을 따라가기로 했다. 짐을 찾는 곳 출국장 입국심사장까지 그 사람에게 온 주의를 집중해서 끝까지 놓치지 않고 쫓아갔다. 그렇게 우여곡절 분투기 끝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랑하는 딸을 만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별 것 아니었던 것이 더 특별한 추억으로 남는다. 몇 달 만에 어렵게 만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한국 음식이 그리웠던 딸과 골목골목을 헤집고 한 걸음에 식당으로 달려가 김치찌개와 만둣국을 먹었다. 그때 먹었던 빨간 김치찌개와 속이 꽉 찬 만두 맛을 지금은 잊었지만 낯선 골목길을 돌고 돌면서 마음에 품었던 기대와 설렘은 지금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체니 온천에서 수영모 없이 멋모르고 수영장에 갔다가 안전요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늘 어리게만 봐왔던 막내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유럽 자유여행을 계획하고 진행했다. 기차, 항공, 버스 모든 교통편까지 두루 검색해서 예약하고 여행지에서 소문난 맛집까지 알아 놓았다. 여행에서 피로를 풀고 휴식할 수 있는 적절한 숙소로 정했다. 합리적인 가격대로 꼼꼼하게 비교해서 선택한 것은 물론이고 제한된 일정 안에서 최대한 풍성한 추억을 쌓기 위해 고심 고심한 것이다. 온 정성을 다해서 여행을 준비한 딸이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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